1993년 3월 4일자 나의 신문 스크랩. (기사 이주헌)
--조양규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이다.
1980년 중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센다이를 방문했다.
(...)센다이에서는 미야기 현립미술관을 찾았다. 거기서 처음으로 조양규의 '맨홀 B'를 보았다.
인물도 하늘도 없다. 이 화가는 왜 지면과 맨홀만을 그린 것일까.
꿈틀거리는 호스는 화가 자신의 몸부림일까.
화가가 그린 어두운 구멍을 계속 들여다보는데 조금도 질리지가 않았다.
조양규는 1926년 일본식민지하의 조선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당하고,
마침내 남쪽에 친미반공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단독선거가 강행되자,
그는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초대대통령으로 선임된 이승만은
좌익운동과 통일운동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결국 조양규는 일본으로 밀항해 도쿄 네다가와의 재일 조선인 밀집지역에 정착했다.
이듬해에는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입학해 미술을 배웠다.
재일조선인 조직에서 기관지의 표지나 삽화를 그렸고,
그 후 일본의 미술계에서도 그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재일의 인권전"에 출품한 '밀폐된 창고'나 '맨홀 B'는 그의 대표작이다.
(......)조양규의 북조선 귀환에는 그 자신만의 동기가 있었던 듯하다.
"재일 생활이 길어져 조선의 풍경도 조선인의 풍모와 거동도
기억과 상상을 통해서밖에 알 수가 없는 게 내게는 답답한 일이다.
북조선에서는 도구도 표현도 일본보다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공중에 매달린 듯 어중간한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 조국의 현실 속에서 싸우고 싶다."
(어느 미술 평론가에게 남긴 말)
조양규는 북조선을 '지상의 낙원'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곳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일본에서 살아가는 것은 '공중에서 매달린 상태'일 뿐이었다.
예술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진정한 인간적 삶을 찾아 그는 도약했던 것이다.
--서경식 <디아스포라 기행>120~124쪽, 돌베개 刊
13년 전 신문기사로 보고 너무 좋아서 보고 또 들여다봤던 조양규의 그림 '맨홀 A'.
<디아스포라 기행>에는 도쿄국립 미술관에 소장된 <밀폐된 창고>와
미야기 미술관 소장의 <맨홀 B>가 컬러로 실려 있다.
'예술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진정한 인간적 삶을 찾아 그는 도약했던 것'이라는 표현이
가슴을 친다. (1928년생이고, 북에서의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을 특별한 것으로 규정하고, 친일이니 뭐니 아랑곳없이
예술가로 누릴 수 있는 건 모두 누리면서, 종국에는 자신의 삶을 변호하기에 급급했던,
자칭 예술가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