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도둑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아사다 지로의 소설 중 처음으로 읽은 작품집이다.
나는 왠지 이 작가를 오해하고 있었다. 달짝지근한 연애소설이나 써서 이름을 얻은 사람으로.
연애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취향이 확실해서 로맨스 소설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이 책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 중 '수국꽃 정사'와 '나락'을 특히 재밌게 읽었다.
그러면서도 '장미 도둑'을 표제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장미 도둑'은 화장으로 치면 맨살이 보이는 듯한 투명한 화장법인데 나이브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친애하는 대디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메이 프린세스 호에게,로 시작하는 편지 형식도 그렇고
이국 품종의 장미들이 지천인 정원이 딸린 집에서 아름다운 어머니와 사는 어린 소년이
세계를 항해중인 아빠에게 떠듬떠듬 영어로 작문을 하다시피 써서 띄우는 편지라니
가벼우면서도 애상이 느껴진다.

남편이 옆에 없는 젊고 아름다운 엄마라고 하면 이 책 속에 나오는 '히나마츠리'라는 단편도
빠트릴 수 없다.
12세의 소녀, 소녀를 극진하게 보살펴주는 24세의 이웃집 우직한 청년,
술냄새를 풍기며 가끔 새벽에 귀가하기도 하는 36세의 엄마......
'장미 도둑'과 달리 '히나마츠리'에는 구차하고 고단한 생활의 냄새가 물씬하지만
엄마를 짝사랑하는 이웃집 아저씨와 결혼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소녀라니,
웃음이 절로 난다.

'나락'의 주인공은 임원 오찬 모임 후 3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다가
승강기가 미처 도착하지 않은 채  문만 열린 것을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가 추락사한
52세의 총무부 직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승강기가 도착하지 않고 문만 열린 것을 분명 알았고
걸음을 옮기면 시커먼 엘리베이터 속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가 웃는 얼굴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다.
그에게는 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나락인 줄 뻔히 알면서도 웃으며 발을 옮기다니, 너무나 매력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수국꽃 정사'에는 전날 하루종일 뺑뺑이를 돈 평일 대낮 비오는 유원지의 대관람차,
혹은 간밤에 단체예약손님을 정신없이 치러낸 시골 요정의 룸 같은  피로와 퇴폐가 덕지덕지 묻어난다.
그런데 인생 막장에 이른 중년의 고독끼리 스산하게 만나는 장면에서 피어나는 온기가
그렇게 따뜻한 풍경을 연출할 줄이야.

밤새워 술을 마시고 아침 일찍 북창동의 한  전주국밥집에 해장을 하러 간 적이 있다.
색동 한복과 무릎까지 깡뚱한 치마 밒으로 하얀색 속바지를 입고 다소 요란한 화장으로
손님을 맞던 여종업원들이 막 세수를 마치고 티셔츠 차림에 떼꾼한 눈으로 우리들을 맞았다.
점심시간에 가면 기다리는 손님이 하도 많아서 뜨거운 국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밥을 퍼넣다가, 종업원들의 맨얼굴과  고요한 적막 속에 콩나물국밥을 먹고 있자니
이상하게 쓸쓸하면서도 만족스러웠던 기억.
생의 이면을 흘낏 본 것 같은......

'수국꽃 정사'는 까맣게 잊고 있던 콩나물국밥집에서의 그날 그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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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3-1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강장 사건이 매력적인 설정이라니 로드무비님도 참..ㅎㅎ
읽고 싶어지는 책이고 리뷰예요
갑자기 저도 해장하던 아침의 어느 식당도 생각나고..^^

로드무비 2006-03-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술이 덜 깬 채 함께 해장국 먹으러 가던 친구들이 보고 싶네요.
그리고 '승강장'을 '나락'으로 바꾸면 매력적이지 않은가요?^^

mong 2006-03-1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도 아사다 지로를 읽으셨군요
괜히 반가워요 ^^

로드무비 2006-03-12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사다 지로의 소설을 네 권 확보해 두었습니다.
몽님도 아는 분이 빌려주셨어요.ㅎㅎ

하이드 2006-03-12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걸로 처음 아사다 지로를 시작했었네요.
'철도원'도 재밌는데 ^^

비로그인 2006-03-12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사다 지로가 너무 좋아요.....;;;;;;;

플레져 2006-03-12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사다 지로와 로드무비님과 궁합이 잘 맞으리라 예감했습니다 ^^

sudan 2006-03-12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은 취향이 분명하신 분이셨군요. ^^; 에스에프, 로설, 추리소설 등등의 장르 구분 없이 소설쪽 취향이 늘 불분명했던 저이지만, 아사다 지로는 여태껏 못 읽어봤어요. 익히 들어왔던 이름이라 뭘로 시작할까 생각했는데, 이 책으로 결정.

로드무비 2006-03-13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예. 비교적 그런 편인가 봅니다.
다른 책은 저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책 재밌었으니
결정에 찬성합니다.^^

플레져님, 찰떡궁합은 아닌데 괜찮은 편이었어요.^^

비숍님, 아사다 지로 좋아하시는군요.^^

하이드님, <철도원>도 바로 읽으려고요.^^

Mephistopheles 2006-03-13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콩나물국밥은 서울대입구 전철역 부근에 있는 `완산정'이라는 집이 참 맛있습니다.
모주도 곁들여서 드셔보세요....^^ (진짜 뜸금없는 댓글이군요 ㅋㅋ)

DJ뽀스 2006-03-1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즌호텔이 괜찮다고 하던데요. 저도 아직 이 작가 작품 하나도 못 읽어봤답니다. "파리로 가다"는 제목에 끌려 도서관에 신청해 놓고는 입고된 후에 나몰라라 해버린..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지요. ㅋㅋ

sandcat 2006-03-13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해장하러 가던 청진옥은 해장국 맛이 아닌 분위기 때문에 갔었던 것 같아요. 옆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역시 딴 소리지만 광화문 쪽 삼백집 콩나물국밥도 맛있어요, 모주는 그저 그렇지만.

로드무비 2006-03-1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모주가 전 맛있는 줄 잘 모르겠어요.
서울막걸리 정도가 딱인데.....
청진옥은 못 가봤고, 삼백집은 가보고 싶네요.
북창동 저 집 전주콩나물국밥만큼 맛있는 건 아직 못 먹어봤습니다.^^

DJ뽀스님, 프리즌 호텔도 이 작가 것인가요?
도서관에 신간 신청해 놓고 나몰라라, 저도 그런 경험 있습니다.
무슨 심뽀인지 몰라요. 그죠? ㅎㅎ

메피스토님, 완산정이요?
기억할게요.ㅎㅎ

kleinsusun 2006-04-0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지로 아저씨 책을 처음 읽으셨군요.
사실...<장미도둑>이 최고라 생각됩니다. 특히 "나락"은... 섬뜩하면서도 공감되죠?
<낯선 아내에게>, <러브레터> 이런 단편집들도 좋아요. 근데...장편들은 단편에 비해 쩜 별로라 생각되요. 전 지로 아저씨 짱 좋아한답니다^^

로드무비 2006-04-0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 심각하지 않게 무거운 이야기들도 풀어내더군요.
감각적으로.
짱 좋아하실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