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란 非存在의 힘, 즉 궁극적 허무, 철저한 무의미, 그리고 영원한 죽음이라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감한 사람은 자아 긍정을 통하여 비존재에 대한 불안을 자기 자신이 짊어진다. 

                                         -폴 틸리히 <존재에의 용기/ Courage to be>  중

 

십몇 년전,  현대문학인지 문학사상을 읽다가 '폴 틸리히의 <존재에의 용기>를 읽고
절망의 끝에서 용기를 얻었다'는 시인 원재길의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흥분하여 당장 서점에 알아보았더니  절판, 출판사에 전화를 했더니 어디 창고에 한 권쯤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변하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퇴근 후 무작정 버스를 탔답니다. 
마포구 구수동의 한 출판사였는데 뺑뺑이 돌다가 결국 못 찾고(제가 길치입니다!)
근처의 허름한 생맥주집에 들어가 맥주만 벌컥벌컥 한잔 마시고 나왔지요.
어느 시골 장터의 술집 같은 곳이라 혼자 앉아서도 별로 불안하지 않았답니다.

어제 갑자기 생각나서 검색해 보니 <존재의 용기>란 제목으로 2004년에 책이 출간되었네요.
2006년 저의 첫 주문 책은  당연히 <존재의 용기>입니다.
혼자 비실비실 돌아다니던 그때가 울컥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참, 생각나는 일화도 하나.
1990년대 중반,  불발로 끝났지만 무슨무슨 문학 행사 준비 관계로 프라자호텔 한식당에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상희 시인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한국의 아누크 에메'라고 김영태 시인이 말했잖아요.
그는 바로 원재길 시인의 아내였어요.
<존재에의 용기>라는 책을 혹시 책꽂이에서 본 적이 있냐고 묻고 싶은데 입이 안 떨어져
달싹이다가 결국 밥을 코로 먹었는지 어디로 먹었는지도 모르게 그 시간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열심히 갈비찜을 뜯던 주둥이로 '존재에의 용기'라는 말을 꺼내는 게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그때도 '존재에의 용기'가 그토록 간절히 필요했나 봅니다.

신기하지 않으세요?
'존재'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별로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살고 있는데 저 책이 뚝 떨어진  것.
지금도 저 책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 봅니다.
사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도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다를 바 없고요.

읽지도 않는 책을 마구 사들이고,  허구헌날 알라딘 방에서 죽치고.
방만한 한 해로 올해가 정리됩니다.
내년엔 좀 다르게 살아야 할 텐데 어찌 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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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5-12-30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도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다를 바 없고요...
연말과 연초를 여는 페이퍼로군요
내년에도 용기를 내어 살아야 겠지요~

hanicare 2005-12-30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에 실린 사진은 정말 아누크 에메같은 얼굴이었어요.실제는 어떨까 잠시 궁금했던 기억이 나네요.(사진이나 소문, 비 올 확률 50% 등의 말들이 같은 부류로 여겨져서요.맞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 로드무비님은 실물확인을 하셨군요.

각설하고 틸리히의 저 말, 요즘의 내게 꼭 필요한 처방같습니다. 덧붙여 저 또한 방만한 생활을 정리해야겠다 되뇌고 있습니다.에센스만 남기고.
늘어나는 살림을 보니 물건에 압사당할 것 같아요. 책도 이젠 그만 사들이리라고 굳은 맹세를 합니다. (사실 이젠 책같은 것 별로 믿지도 않아요.) 이 꼴 저 꼴 안봐도 될 것들을 본의아니게 보다보니 마음이 차고 딱딱해집니다.신데렐라에게서 제일 무서운 점은 계모와 이복자매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꿈을 잃지 않았다는 건데, 참 독한 년이라고 생각했었죠.그러나 사람에겐 독한 구석도 분명 필요하다 싶습니다. 다만 제 속내에 과일의 씨방처럼 잘 감춰둬야겠지요. 타인에게 자기 쓴맛을 마구 내놓는 사람은 저급해보여요.자해행위가 경멸스럽듯이.

그런 생각도 때때로 해보라고 세월마다 마디마디를 박아넣었나봅니다. 어리석고도 간교한 인간 종족들이 말입니다.
(참, 이렇게 긴 댓글을 써넣고 보니 민망합니다.)

비로그인 2005-12-3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추천을 열개하고 싶은 페이퍼네요
특히 저처럼 마흔고비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참 와닿는 말이구요
오십이 되어도 용기가 필요하겠단 생각이 왜 좌절이 아니라 희망을 주는지..
(저 들어왔는데 부랴부랴 여기부터 왔습니다..ㅎㅎ 일단 밥부터 먹고 또 뵐게요..^^)

로드무비 2005-12-30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야님, 추천 10개 해주세요.ㅎㅎ
그리고 어쩌면 50, 60에 용기는 더 필요한 것인지 몰라요.
어째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하니케어님, 간단하게 댓글로 대꾸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주셨군요.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가끔 제 방의 어떤 글에도 눈살 찌푸리고 가시는 님을 느꼈답니다.
그것도 아주 무관심한 것보다는 고마웠고요.
올해 제가 다소 질척이는 면이 있었는데 좀더 산뜻하고 드라이한
로드무비가 되려고요. 그러면 마음에 드실라나?!
(언제 편지 한 통 따로 쓸게요!^^)

mong님, 님은 그냥 떠오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사셔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드문 사람인데요?^^

바람구두님, 네. 마음으로 읽을 책들이 몇 권 쌓여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구두님껜 저 책이 이미 추억의 책이에요?
징그러운 사람!=3=3=3




로드무비 2005-12-30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제가 오해를.
그래도 이미 뱉은 말이니 그냥 둘게요.
뭐 '징그럽다'는 말도 뜻이 가지가지니까!^^

mong 2005-12-30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참 귀여우신 멘트를...ㅎㅎ
로드무비님, 느끼는 대로 살다가도 와락 겁이 날때가 있어요 ^^
그럴때마다 어렸을적 엄마가 안보이면 가슴이 철렁 하던 시절과
달라진게 없는것 같아요

blowup 2005-12-3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만한 사람들 계모임 할까요?^^
플라나리아 계 하고 그대로 겹치나요?(후후)
로드무비 님은 어쩜 그렇게 재미난 일화가 많으신지...
전 뭐하고 살았나 싶어요.


2005-12-30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春) 2005-12-30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만한 한해 ㅋㅋ~ 설렁설렁 읽을 때는 방만한 게 뭐야? 어떻게 한 해가 방만해?? 했는데.... 쩝 제 2005년이 방만했어요. 바다만했어야 하는데... ^^;;

겨울 2005-12-30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재에의 용기. 자아 긍정. 새해의 마음가짐으로 꼭꼭 심어두고 싶은 글귀입니다. 새해 첫 책을 벌써 정하시다니 정말 부지런하세요.^^

로드무비 2006-01-0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우리 올 한 해 색다르게 함 살아볼까요?
색다르고 뭐고 간에 전 그 전에 살(!)을 좀 덜어줘야 하는데.
비법을 좀 가르쳐주시라요.^^

우울과 몽상님, 이런 일만 부지런하니 문젭니다.
읽을 책만 열심히 사고 막상 오면 안 읽고!^^

하루님, 그거 유머 맞죠?
깜찍하시긴 한데 별로 안 웃기는군요.=3=3

namu님 돈 안 되는 일화만 무성합니다.
그나마 없는 것보단 나을랑가요?^^
(방만한 사람들 뭘 믿고 계 모임씩이나 하겠어요.ㅎㅎㅎ
그래도 님이 오야 하시겠다면 할게요!^^)

mong님, 아이구 짠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