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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에서 살다
조은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1년 2월
품절
--작은 언덕배기 동네, 사직동에 그녀가 산다. 주워온 개와 더불어 독신으로 살고 있는 시인 조은의 삶.(표지의 글)
1960년생 시인 조은.
2001년, 이 책이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는데 질투심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왜냐하면 나도 인생의 꽤 긴 시기를 북아현동이라는 허름한 골목 낡은 한옥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고 이 책에 실린 글과 사진들은 바로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질투심을 느끼는 건 아주 드문일인데......
--어둠 속에 섬돌처럼 떠 있는 불빛들을 딛고 가면, 자신이 불을 밝혀야 할 작은 집이 있다.
그림동화 <나의 사직동>처럼 이 책의 배경도 한옥이 유난히 많은 광화문 근처 사직동. 나는 능청스럽게 시인의 책 포토 리뷰에 나의 북아현동 이야기를 섞어 보련다.
남동생과 둘이 자취를 하던 때 바로 저 사진 속 골목의 낡은 2층집에서 2년 정도 살았다. 그 전에 살던 한옥이 헐리게 되었던 것.
살림은 빌린 리어카로 세 번 정도 나르니 끝!
한옥의 욕심 많은 주인 할머니는 자신이 10년이나 쓴 조그만 하이콜드 냉장고를 아주 싼 값이라며 내게 팔아먹(!)었는데 알고보니 새것에서 몇만 원 정도 빠진 금액이었다.
아무튼 새로 옮긴 단칸방, 세탁기도 없이 주워온 책상과 비닐옷장이 살림의 전부였던 때 여동생 부부가 서울에 놀러왔다가 우리 사는 꼴을 보고 기겁을 하여 집에 내려가 아버지를 졸랐다. 그리하여 단독 2층으로 이루어진 이사.
그때 여동생은 나보고 미련하기가 곰같다고 했던가!
--솜이불과 덧신, 체온이 낮은 사람이 자고 일어난 티가 난다.
(사진 설명 74쪽)
--내가 사는 곳은 인왕산 밑이고, 내 방에서는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가 은사시나무 사이로 잘 보인다.
오늘 새벽 나는 너를 생각하며 인왕산에 올랐다. (...)나는 인왕산에 올라 세상과의 편안한 거리감을 얻는다.
그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이 큰 가닥으로 보이고, 내가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볼 수 있어 좋다.
산은 언제나 물통을 지고 제속으로 드는 사람들을 출구처럼 드러내며 침묵하고 있다.(46쪽)
수녀의 방처럼 침구가 소박하고 정갈해 보인다. 이 책을 썼을 때 시인의 나이 마흔 살 부근.
--길보다 낮은 집들(사진 설명 87쪽)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방을 구하던 때 합정동 너훈아가 함께 살던 골목 다세대 지하의 방이 났길래 구경 갔다. 그런데 그렇게 독특하고 멋진 가구며 인테리어라니!
무슨 사연으로 그 좁은 곳에 임시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방의 안주인은 여배우를 능가하는 미모의 세련된 여성이었다.
6천만 원에 가구까지 몽땅 주겠다고, 자기는 곧 미국에 살러간다고 하는데 살림살이까지 몽땅 준다고 하고 그것이 보통 고급스러운 게 아니어서 나는 구미가 동했다. 그때 우리의 예산은 3천 5백만 원 정도. 돈을 좀 빌려 그 지하방을 사자고 남편을 졸랐으나 남편은 들은 척도 안했다.
그때 무리해서 그 방을 샀더라면 몇 년 뒤 전세금을 홀랑 날리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이상하게 한번 본 그 반지하 집이 가끔 생각난다. 지하든 반지하든 그 이후 돌아다녀본 다른 집들은 너무 어둡고 지저분했는데......
--은이 태릉집에서 사직동으로 홀로 나온 이후에 은이 살았던 몇 개의 방을 나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적절치 못한데 햇살만은 찬란히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낮잠을 잘 때면 모자를 쓰고 자야 했던 방에서부터... 그리고 지금 추운 채송화처럼 옹송거리며 살고 있는 방까지.
(...) 은이 방이 사직동에 없었다면 내 서울 생활은 꽤 적막했으리라.
(소설가 신경숙의 발문)
신경숙, 황인숙 시인, 김형경 등이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는 시인의 사직동 집.
'마음산책'의 발행인 조은숙 시인이 이 집에 놀러왔다가 그 고졸한 골목과 집, 친구가 사는 모습에 반해 책을 기획하게 된 것이라니 재밌다.
(보라색 티셔츠 입은 이가 시인 조은, 맞은편은 신경숙. 클릭해서 큰 사진으로 보세요^^)
--인간의 뇌세포처럼 굴곡이 진 지붕 위의 세계를 응시하다 보면, 눈썰매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갈 때처럼 가속도가 붙으며 순식간에 발치에 와닿는 기억들이 있다.(112, 113쪽)
북아현동 한옥에 살던 어느 해 겨울, 눈이 몹시 내려 기와며 담벼락이며 눈으로 소복소복하고 그 풍경이 너무 좋아 방문을 열고 앉아 마당을 내다보았다.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 지갑을 뒤져보니 달랑 200원뿐.
풀빛출판사 뒷골목의 구멍가게에 가서 200원을 내밀고 백자라는 담배를 샀던 기억. 그나마 너무 독해서 한 대도 제대로 피우지 못했다.
--혼자 살다 보면 십자드라이버의 다양한 용도를 알게 된다. 내가 직접 달아놓은 옷걸이.(144쪽)
시인 조은의 이 벼랑의 기록은 참 매혹적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 '과도기' 아닌 때가 어디 있으며, '벼랑' 아닌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는 한 아이의 엄마였고 비록 전세지만 꽤 넓은 집에 살고 있었는데 사직동, 그녀의 벼랑이 너무 부러워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오늘, 이 책을 오랜만에 꺼내어 읽어본다.
(이 책은 본격적인 사진집은 아니며 사진작가 김홍희 씨가 찍은 동네 골목과 그녀의 집 풍경들이 조그만 사진으로 시인의 다감한 산문과 함께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