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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평점 :
시인 고은의 어느 시에 등장했던 '민음사 미스 문'이 그토록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분명 그런 시가 있었다.) 내가 흠모하는 시인과 직접 만나 고양이나 개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라니! 백수로 하릴없이 시민도서관이나 들락이던 시절 서울의 출판사 편집실은 내게 꿈의 요새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좋아하는 그 출판사(민음사는 아님)의 편집부 직원이 되어 있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 영업부 직원이 소설가 이제하 선생의 인지에 도장을 찍고 있길래 사무실에 오시느냐고 물었더니 교보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사장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인지를 가로채어 교보로 갔다. 교보문고 내에 커피숍도 있고 스파게티집도 있던 먼먼 시절의 일이다. 이제하 선생과 커피숍에 마주앉아 벌벌 떠는 손으로 커피를 마시는데 '지금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사무실로 돌아가 사장에게 엄청 깨졌지만......
사람은 참 간사한 동물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어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딱 뗀다.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나는 말도 안되는 원고의 교정을 보면서 투덜대기 시작했으며 1년을 조금 넘기고 사표를 냈다.
그 해 코엑스에서 열린 도서전시회에서 고은 시인도 소설가 이청준도 직접 볼 수 있었다. <만인보>를 1에서 5권까지 사서 두 권에 사인을 받았는데 독자들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가 좀 짜증스럽고 건성건성이어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이청준 선생은 한 시간 후에 있는 자신의 강연회에 사람이 아무도 안오면 어쩌나 진심으로 걱정을 하고 계셨다. 우리 사장과 그런 말씀을 나누고 계시길래 "그럴 리가 있나요?" 했더니 나보고 가지 말고 꼭 머리수를 채워 달라신다. 나는 살아가는 데 자신감도 좋지만 기고만장한 사람보다는 수줍은 사람을 선호하는지라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강연을 무사히 마친 이 사람좋은 소설가는 고맙다며 내게 신작소설집을 주겠다고 하시더니 멋지게 서명하여 며칠 후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키작은 자유인>이 바로 그 책이다.
출판사 편집부 직원으로 밥을 먹고 살았던 그 1년 몇 개월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월급은 쥐꼬리만했고 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었다. 어렵사리 새책이 한 권 나오면 아바이순대 같은 집에서 회식을 하고 다음날은 다시 새벽부터 기어나와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이라면 환장을 하는 아이였지만 책을 만드는 기술적인 일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사장도 그런 나의 성향을 눈치챘는지 디자인 쪽이나 제작 쪽 일엔 관여하게 하지 않고 원고를 고르는 일, 다듬는 일, 보도자료를 쓰는 일 등에 나를 부려먹었다. 나는 그런 주제에도 잘난 척은 엄청 했다. 가령 이런 일. 황동규 시인과 말씀을 나누던 사장님이 나를 부른다. "소설가 손창섭 선생 근황을 혹시 알고 있소?" "저 일본에 계신 걸로 아는데요." 그리곤 우쭐우쭐하며 사장실을 나오는 것이다. 무슨 엄청난 정보를 줬다고......
시인이자 도서출판 마음산책의 대표인 정은숙 씨의 <편집자 분투기>를 재밌게 읽었다. 출판편집자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20년. 그녀의 아이디어로 이 세상에 나와 사람들의 심금을 건드리는 책만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박영택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 조은의 <벼랑에서 살다>, 구효서의 <인생은 지나간다> 등 우선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책만 해도 여러 권이다.
자신은 성공적인 기획자이면서 출판사들의 기획 만능 추세를 비판하며 기획, 편집, 디자인, 제작, 홍보 등 출판과 관련된 모든 과정을 자신의 노하우를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뿐인가, 책이란 무엇이며 편집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철학과 자세까지......한마디로 나만의 안테나로 세상을 읽되 균형감각과 미세조종술까지 획득하라는 것이다. 이게 참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어느 날 시인 조은의 사직동 한옥집에 놀러갔다가 그 골목과 고졸한 방안 풍경을 보고 사진과 곁들인 멋진 책을 머리속에 떠올렸다니, 그리하여 그렇게 예쁜 책 <벼랑에서 살다>가 세상에 나왔다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기획 실패 사례까지 적나라하게 공개하고 있다.
책을 탁 덮으며 나는 희미한 부끄러움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이것은 내게 좀해서 찾아오지 않는 감정이라 나도 조금 놀랐는데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