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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ㅣ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숨은아이님의 어떤 페이퍼에 나는 이런 댓글을 달았다. "나는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살고는 있습니다만......" 이 말은 사실이다. 살아가는 일이 아직 어색하게 여겨지고 너무나 게으른 나머지 의로운 일에 앞장선다거나 남을 돕는 일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지만 서명이 필요한 경우 등 머리수를 채우는 정도의 일, 후원금을 얼마간 내는 정도의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는 하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내게는 십시일반의 정신인 것이다. 어떤 이가 보기엔 이런 나의 태도가 몹시 비겁하고 가소로워 보이겠지.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십시일反>은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없는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랄까, 보고서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했다고 하면 너무나 형식적이고 딱딱한 내용일 것이라 오해하기 쉬운데 의외로 구석구석 이 세상의 가려운 곳까지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다. 빈부격차, 노동, 교육,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성적 소수자 문제 등 그 시선이 뻗치치 않은 곳이 없다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이 재미있는 기획에 참여한 작가들은 박재동, 손문상, 유승하, 이우일, 이희재, 장경섭, 조남준, 최호철, 홍승우, 홍윤표로 자신이 포착한 이 사회의 차별을 자신의 만화에 꼼꼼하게 담고 있다.
손문상 씨의 '최종합격'이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이렇다.
xx주식회사 신입사원 최종면접 현장. 여섯 명의 최종후보가 억지미소를 짓고 앉아 있다. "4번... 부모님이 아직 월세 살아요?"(탈락) "1번, 출신대가 본굡니까 분굡니까?"(탈락) "2번...잉? 야간이넷!"(탈락) "6번...결혼란을 안 썼네요? 기혼? 미혼?"(이 여성도 탈락) "두 분은 입사 성적도 좋고 출신성분, 학력 다 좋은데...두 분 다 아버님이 공직에...(한 후보의 아버지는 교직에, 한 후보의 아버지는 의원...) 김의원님 잘 계시죠?"(최종합격 3번!)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나의 경우 조남준의 에피소드 '누렁이 1'이 특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60평 이상 아파트인 1단지에 사는 아이와 40평 이상인 2단지, 20평 이상인 3단지에 사는 한 학교 아이들의 생일파티 이야기였다. 아파트 평수에 따라 친구를 맺고 생일파티에 초대하고 하는 것이 결정된다는 건 어느 먼 천박하고 악독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의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나는 끝까지 그렇게 믿고 싶다.
자신은 꽤나 상식적이고 공평하고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자위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십시일反>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찔리고 눈물이 솟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울고 있는 아이나 노인, 장애인이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무관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