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계모의 말만 듣고 아직 어린 아이를 돌아가며 구타한 한 마을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도벽이 있다는 계모의 말만 듣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를 볼 때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머리통을 쥐어박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나는 그 기사가 사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집단악'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영화를 한편 보고 난 기분이랄까. 현실은 종종 나쁜 영화보다 훨씬 악독하다.

악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책이라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극찬했다는 M.스코트 팩의 <거짓의 사람들>을 읽었다. 저자의 머리말 첫 대목이 "이 책은 위험한 책이다"이다.

'인간의 악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기 전까지는 치유의 희망을 꿈꿀 수 없다. 그런데 악이란 기분좋은 볼거리는 아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다룬 책이 유쾌하게 읽힐 리는 없다. 그런데 나는 그 어두운 면에 평소 호기심이 많다.

10년 전쯤, 남대문시장 골목 노상에서 칼국수를 사먹는데 나는 칼국수를 말아주는 여성의 안 보아도 좋을  얼굴을 보고 말았다. 어쩌다보니 나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그녀의 좌판 앞 긴 나무의자에 궁둥이를 걸쳤다. 다른 나무의자 위는 바글바글했다. 그녀는 그것이 몹시 유감이었던 듯 혼자서 앙앙불락이었다. 그나마 하나 얻어걸린 손님에게 친절하게 대하긴 해야겠는데 기분이 몹시 나쁘니 혼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도 덩달아 어쩔 줄을 몰랐다. 억지로 웃는 얼굴의 무시무시함이라니! 그녀는 여차하면 자신의 손님을 모두 가로채가는 옆 가게 여자에게 칼이라도 던질 기세였다. 나는 침통한 얼굴로 칼국수를 먹었다. '하고많은 가게 중에 왜 하필 이런 가게로 기어든 거야. 아아, 내가 사는 건 왜 이 모양일까!' 속으로 탄식하며 말이다. 나는 왜 그때 그녀의 안 봐도 좋을 얼굴까지 고스란히 보고 앉아 있었던 것일까! 내게도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날 저녁 퇴근 후 내가 좋아하는 시인을 만났다. "신이 내릴려나, 제 눈엔 요즘 이상한 게 자꾸 보여요. 모르고 지나가도 좋을 사람들의 얼굴까지!" 그날 낮에 본 칼국수집 여자 이야기를 하자 그 시인은 씨익 웃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걱정 마! 로드무비는 절대 신이 내릴 얼굴이 아냐!"

"가려진 영혼 속에서 벌어지는 섬뜩한 숨바꼭질 놀이, 단 하나뿐인 인간의 영혼은 그 속에서 혼자서 치고받다 스스로 피하여 숨는다."(저자가 Good and Evil이란 책에서 인용한 글)

위의 구절은 남대문시장 칼국수집 여자가 국수를 끓이고 또 내가 국수를 다 먹길 기다리는 20여 분 동안 보여준 바로 그 무시무시한 원맨쇼에 대한 기록에 다름아니다.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저 구절을 보는 순간 그녀가 의식의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악은 아주 멀쩡하고 태연한 얼굴로 우리의 일상 속에 출몰한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알코올로 도망가는 것만이 악이 아니다. 악은 아주 교묘한 모습으로 나타나 어느 날 문득 우리의 삶을 뒤흔든다. 자기 기만, 무정한 것, 이 모두도  악에 포함된다.

교회 헌금통 속에 55센트를 넣다가 어느 순간 '너는 55세에 죽을 것이다'라는 밑도끝도 없는 문장이 머리속에 떠오른 조지. 차를 달리다가 45마일 속도제한 표지판을 보는 순간 '너는 45세에 죽을 것이다' 하는 말이 떠오른다. 그는 결국 그런 식의 강박에 시달리다 못해 상담을 받기 위해 저자를 찾아온다. 그는 얼마나 그런 생각에 시달렸던지 마침내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 그는 그 전까지만 해도 아주 평범하고 멀쩡한 시민이었다.

또 이런 부모도 있다. 형이 자살한 후 급격히 우울증에 빠진 소년 바비. 그의 무정한 부모는 그런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총을 선물한다. 바로 바비의 형이 자신을 쏘았던 그 총을......

부모자식 간의 기묘한 관계(바비, 로저의 두 경우), 뒤틀린 부부관계(사라와 하틀리), 애증의 모녀(빌리), 자신의 상담의사조차 가지고 놀고 장악하려다 실패하고 사라지는 찰린이라는 독신 여성......이 책에는 정말 이 인간 세계에서 타인과 자신을 속이며 어두운 얼굴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 생생한 사례들을 읽다보면 깨닫지 않을 수 없다.거짓을 바탕으로 한 관계는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는 걸......

'악한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 모습이 빛 가운데 드러나는 걸 끊임없이 피하면서 자신의 목소리 듣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완전한 공포 속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더이상 지옥에 갈 필요가 없다.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무시무시한 실체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나의 의도다.'

나는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속에서 내 속에도 고스란히 있는 악의 씨들이 꿈틀꿈틀하는 걸 느꼈다. 그런데 저자의 다음과 같은 명쾌한 정의가 조금 위로가 된다.

'인간은 우연히 악의 파트너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인이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어쩔 수 없이 악의 세력에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덫을 놓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스스로 덫을 놓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우를 범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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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09-1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으니, 저에게도 떠오르는 책이 하나 있네요, 다시 들춰보고 저도 얘기를 하나 풀어놓고 싶어집니다.
이런 게 바로 웹의 효과가 아닐까요, 거미줄이 확산되듯, 하나의 줄에서 또 다른 줄이 이어져 나오고, 그렇게 한 줄 한 줄 이어져 또 하나의 새로운 망과 공간이 생겨나는 것......

누구든 우연히 악의 파트너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것! 선이든 악이든, 그 씨앗은, 그 선택의 실마리는, 그 결정적 계기는 모두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자라고 있는 걸까요?

하얀마녀 2004-09-1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잘 쓰시네요. ^^

로드무비 2004-09-1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빨리 하나 풀어놓으세요.
이 리뷰를 읽고 뭔가 떠올랐다니 몹시 궁금합니다.^^

하얀마녀님, 역시 잘 쓰죠? 호호호(방자한 웃음)
인간에게 최고의 악은 교만과 태만이래요.
이 책을 쓴 분이 그렇게 말했어요.^^;;;

superfrog 2004-09-1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에게 최고의 악은 교만과 태만.. 흠.. 같은 글자로 끝나는 낱말인데도 전혀 다른 의미로군요. 타인의 교만에 심하게 질리고 자신의 태만에 괴로워하고 있어요..;;;

로드무비 2004-09-1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 질렸다는 말씀이세요? 금붕어님? 엉엉.
저는 교만과 태만을 다 가지고 있어요.엉엉.

水巖 2004-09-11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역시 잘 쓰시네요. 군더덕이 없이.

플레져 2004-09-1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에서의 악을 가면이라고 했을 때, 예전에 아주 강했던 친구가 요즘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요. 그애 답지 않은 연약한 행동들 때문에 기막힐 뿐이지만, 친구 역시 강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겁많은 소녀가 아니었나 싶네요. 별 다섯개에 어울리는 리뷰여요! 보관함에 넣겠습니다 ^^ 추천~!

2004-09-11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깍두기 2004-09-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고도 무서워지니 이 책을 읽어야 할라나요?
님의 칼국수집 아줌마 이야기 정말 리얼하군요. 나도 생에서 그런 얼굴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로드무비 2004-09-1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암님, 고맙습니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칭찬......(__)
플레져님, 저는 저 책 속의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꼈어요.
단, 자식을 교묘하게 학대하는 부모들 빼고...
깍두기님, 마음이 가면 읽으시고 두려움이 느껴지면 읽지 마세요.
읽고 싶은 책만 읽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2004-09-1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었는데, 읽으셨군요. 저도 읽으려도 벼르고 있어서 리뷰는 안 읽었어요..책 읽고 읽으려고요,ㅎㅎ.어쨌든 기인~ 리뷰...짝짝짝! 아, 리뷰는 안 읽었는데 댓글만 읽고도 추천!

2004-09-12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4-09-15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군요.^^
자기기만과 무정,뒤에서 살짝 웃고 있는 메시스토펠레스에 대해 동의합니다.근데 또 한편으론 자기위무를 위한 악도 가능하리라 생각해요.허무적인 위악이 될 수도 있으나...제가 최근에 본 오에 겐자부로의 책에서도 이러한 느낌이 많았습니다.현상적인 악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존재하며 수시로 꿈틀거리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과 공포가 악의 한 모습일 듯 해요. 때론 본인의 의지를 부드럽게 설득하며 좌절시키는 두려움도 그 깊은 모습중하나가 아닐까....

드팀전 2004-09-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악을 연상하신 건 너무 낭만적 관찰자의 시선인거 같아요.꼭 그런식은 아니어도 좋았겠으나.그녀의 생활을 위한 치열함이 그런 얼굴을 낳았다면...삶의 치열함이 악이 되어야만 하지요.가끔 장사하시는 분들의 과격한 열정이 눈에 거슬리고 한심해 보일때도 있긴하지만 먹고 살기 위한 애씀으로 이해하시는게...

로드무비 2004-09-15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드팀전님. 반갑습니다.
저는 평소 시장통의 악마구리같은 소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제게 없는 생의 열기 같은 걸 부러워도 하고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에게서 악을 본 건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분노.
어딘가에 사로잡힌 것 같은 모습...그것 때문이죠.
정말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거든요.
제 속에 있을지도 모를 분노 그런 것 때문에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러니 낭만적 관찰자의 시선이라는 말씀은 조금 억울해요.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할 수 없지만...^^

드팀전 2004-09-15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억울하셨다니 죄송해서 어쩌나 .....쯥
전 시장통의 소음을 별로 안좋아합니다.제가 관찰자죠.
단 마음에 뭉게 뭉게 피어오르는 낭만성을 자제하려고 하지요. 뭐 그런 경계심 아닐까해요.
시골에서 농부들 보면 도시인들이 멋도 모르고 "아...시골에서 농사나 지었으면.."이런 헛소리 하진 말자는.....그런 낭만성에 대한 자기경계정도...
자주 들를게요.

로드무비 2004-09-15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안 삐졌어요, 드팀전님.^^

라이더 2005-01-13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예스24를 능가하는 알라딘의 리뷰. 이래서 다시 돌아오곤 합니다.

잘 읽었어요. 알라딘은 전공서적(원서) 서포트좀 잘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