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까지 나가 영화 한 편 보고 돌아오는 길에 1단지 앞의 할아버지 노점을 유심히 봤더니
오며가며 지나가는 버스 속에서 한달 전부터 점찍어 놓은 '스텐' 주전자가 그대로 있다.
집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후 산책 겸 그 노점을 찾았다.
깨끗하게 손질된 헌옷가지며 가방이며 전기다리미며 전자계산기며
한마디로 없는 것이 없는 할아버지의 노점은 '만물상'이라는 간판(손글씨로 쓴)을 내걸고 있다.
스텐주전자는 몇 년은 족히 쓴 것 같은 투박한 모양인데
자세히 살펴보니 웬만한 초강력세제로도 지울 수 없는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았다.
얼마냐 물으니 5천 원이라는 대답.
4천 원에 안 되느냐고 물으니 단칼에 거절이다.
당장 로맨스그레이 영화를 찍어도 될 정도로 준수한 외모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얼굴에 자신이 있는지 짬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 보신다.
그 단호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에 매료되어 군말없이 5천 원 지폐를 내밀었다.
막걸리 심부름을 하는 소녀처럼 나는 자랑스레 주전자를 흔들며 집으로 돌아왔다.
왠지 모르지만, 딱 둥굴레차를 끓여 먹기 좋게 생긴 주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