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도시 중경과 한국의 이리(익산으로 지명이 바뀜)에서
장률 감독이 만든 영화 두 편(<중경>, <이리>)이 연달아 개봉되었다.
폭발 직전의, 무언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듯한 느낌의 도시 중경과
30여 년 전 이미 대폭발을 경험한 도시 이리는 영화 속에서 놀랍게 닮아 있다.
만약 장률 감독이 서울의 가리봉동이나 노고산동에서 영화를 찍었대도
적막하고 황폐한 분위기는 비슷하지 않을까. 
전작 <망종>의 여주인공 순이나, <중경>의 쑤이, <이리>의 진서가
닮아 있는 것처럼.
그녀들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치통을 견디듯 하루하루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줄 싸구려 진통제조차도 그녀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쓰레기통을 뒤져 얻은 몇 푼의 돈으로 거리의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였다가
공안에게 발각, 경을 치게 된 쑤이의 아버지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다.
아버지를 훈방해준 공안은 욕망도 없이 쑤이를 안는다.
사랑은커녕 최소한의 교감도 없는 남녀의 잠자리는 삭막하고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다.

동네의 중국어학원과 경로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택시운전사인 오빠와 사는 진서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30여 년 전 이리역 폭발사고 때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것이 원인.
사과 몇 알을 살 때도 계산을 못해 주인에게 지갑을 통째 맡기는 그녀다.
경로당의 꺼칠한 노인들 속에서 그녀의 말간 얼굴과 통통한 종아리는
눈부시다.
중국어어학원 원장은 몇푼 되지 않는 그녀의 수고비를 자꾸 미루고
주변의 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니, 그녀는 자주 하혈을 하며 쓰러진다.






장률 감독은 오래 전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그들을 바라볼 뿐 내게 다른 권리는 없다.

호들갑과 과장된 탄식 속엔 되려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기미가
농후한 법인데, 장률 감독의 시선은 그럴 수 없이 드라이하다.
관객인 나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그저 바라볼 뿐.

"엄마, 아버지는 또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고 저는 자꾸만 더러워져 가요."

엄마의 묘소를 찾은 쑤이의 독백이다.
그런데 꼴도 보기 싫은 아버지의 밥숟가락 위에 거친 손길로
반찬을 올려주는 장면과 함께 쑤이의 북경어 수업시간이 좋았다.
강사의 선창에 이어 수강생들 목소리로 초여름 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이백의 시와 주자청의 수필 <背影> 한 구절.
(중국의 시인들 중에서 이백을 특히 좋아한다는 장률 감독은
몇 년 전 <당시唐詩>라는 영화를 만든 바 있다.)

--그해 겨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실직했으니
설상가상의 날들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먼저 주자청의 산문집을 펼쳐보았다.

--그해 겨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뒷모습> 82쪽, 박하정 譯, 태학사 刊)

이리에 사는 진서와 중경의 쑤이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리역 열차사고 당시 근처 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하고 있다가
무명 코미디언인 사회자 이주일의 등에 업혀 구출되었다는 가수 하춘화.
바로 그녀의 노래를 즐겨 부르고 가끔 듣는다는 것이다.
사랑이 어쩌고 이별이 저쩌고 하는 아주 구성진 가락의 유행간데
이리역 폭발사고로 다리를 잃은 한국인 수강생 김씨의 선물이다.

하춘화의 노래 외에 두 영화에 또 나오는 게 있으니
동네 모퉁이에 어색하게 자라잡은 성인용품 가게.
살아갈 의욕은커녕 식욕조차 없어 모래알을 씹는 것 같은
영화 속 인물들은 그래도 그 성인용품 가게에 들러 콘돔도 사고
대형 고무인형도 산다.
시무룩한 낯짝으로.

"당신의 영화에는 왜 희망이 없느냐?"고 한 평론가가 물었다.
장률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희망을 삶에서 찾아야지 왜 영화에서 찾냐고.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


영화 <중경>을 찍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중경의 쓰촨 지역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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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2008-11-3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정성일이다. 우선 댓글 먼저 쓰고 읽기 시작~ 고맙습니다!

로드무비 2008-11-30 13:21   좋아요 0 | URL
이 얼룩말 님이 그 얼룩말 님이시군요.^^

twoshot 2008-11-3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도 버거워서 장률의 영화는 피하게 되네요-.-;;
그보다는 어째 주자청의 산문이 떠 끌립니다.^^

로드무비 2008-11-30 18:20   좋아요 0 | URL
영화 속에서 만나는 주자청의 산문이 더 매력적이더군요.^^

치니 2008-11-3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망종> 하나도 참으로 버거웠던 기억인데, 정말 2개를 주루루 볼 수 있을지...저도 걱정이 앞서기는 하지만, 찜 해둡니다.

로드무비 2008-11-30 18:25   좋아요 0 | URL
영화 두 편을 개봉일에 맞춰 사흘인가 나흘에 걸쳐 보고 나니
아닌 게 아니라 기진맥진한 기분이었습니다.

2008-12-01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01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8-12-01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버지의 뒷모습'이 옛날 국어 교과서에 나오던 그건가요? 제겐 꽤 감동적인 작품이었는데... 저는 장률의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다 로드무비님 덕분이지요... 언제고 볼 기회가 오겠지요..

로드무비 2008-12-01 15:37   좋아요 0 | URL
옛날 교과서에 나왔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교과서를 읽고 감동하긴
쉽지 않은 일인데......
장률 감독 영화가 제 입에 잘 맞습니다.
에로이카 님껜 어떠실지.

nada 2008-12-0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밥상.
밥상은 한 가족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를 말해주는 거 같아요.
황량하고 푸석푸석해 보이는데, 그래도 또 따듯한 느낌도 있네요.
참내 애비란 인물들은...


로드무비님이 소개해주시는 장률 영화들이 좋아요. 영화 읽어주는 언니 같아요.^^

로드무비 2008-12-02 12:16   좋아요 0 | URL
쑤이와 아버지가 마주한 밥상과
진서와 태웅이 마주한 밥상이 같습니다.
아무 말 없이 화난 사람들처럼 밥만 먹는데
정말 맛없이 먹습니다.
제가 웬만하면 밥상위의 반찬들을 아주 유심히 관찰하거등요.
뭘 먹나 해서......
그런데 그들이 먹은 게 뭔지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누들>을 보고 와선 한동안 국수를 그렇게 먹었고
<굿'바이>를 보고 와선 당장 치킨을 시켜먹었던 제가 말이죠.
복어정자를 구할 수 없으니 치킨이라도 먹어야지요.^^

무해한모리군 2008-12-02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양배추님의 영화 읽어주는 언니라는 표현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왠일인지 점점 잔인하거나 충격이 클 것 같은 영화들을 잘 못보게 되요.
참 좋을거 같은데, 너무 마음이 아플거 같아서 또 볼 엄두가 안나네요..
소심쟁이 ㅠ.ㅠ

로드무비 2008-12-02 16:58   좋아요 0 | URL
잘 모르는 사람이 언니라고 하면 그렇게 부르지 말라며
정색했는데 요즘은 언니 소리 들으면 반갑더라고요.ㅎㅎ

'생선 한 마리 못 잡으면서 뭐라고 토를 다는 인간' 여깄습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소심과 연결이 되어서요.

2008-12-19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19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