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로드무비 님이 몇 월 며칠에  **카드로 롯데백화점에서  사용하신
198만 원의 카드 대금이 연체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듣고 싶으시면 *를 누르고,
상담원과 통화하시려면 *번을 눌러주세요.

이런 종류(그러니까 카드 대금 연체)로는 이달 들어 벌써 두 번째의 전화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혹시나 싶어  근무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해 봤다.
"그거 사기전화야, 무조건 끊어버려."
남편은 놀라지도 않고 경쾌하게 말했다.

좀전에는 전화를 받고 짜증이 발동, 상담원과 통화를 시도해 보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사투리를 숨기고 서울 말씨를 처음 쓰려는 사람처럼
조선족 특유의 말투가 그대로 드러난다.

"카드 대금 198만 원이 연체되었다는데 전 백화점에서 카드를 사용한 적이 없는데요?"

"카드를 사용하셨으니까 연체가 되었다는 거겠지요.
구체적인 상담을 원하시면 카드 담당자를 바꿔 드릴까요?"

"카드 담당자가 따로 있다니 지금 저와 얘기하시는 분은 그럼 누구십니까?"

갑자기 전화가 탁 끊어지며 뚜뚜~ 신호음이 울린다.

내가 알기로 예전엔 사기를 쳐도 1 대 1로 직접 만나서 쳤다.
얼굴이라도 직접 보여주면서 시나리오도 직접 짜고 명연기(?)를 펼치는
최소한의 성의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 사기꾼들은 날로 먹으려고 든다.(물론 나름대로 애환은 있겠지.)
불특정다수에게 무더기로 전화를 걸어 어리숙하게 걸려드는 몇 안 되는 사람을 노린다.
짐작건대 이런저런 정보들로부터 차단된 상태에 있는 순진한 노인이나
주부들이 타깃이 아닐까.

문득 부산의 부모님이 이런 전화를 받으시면 어떨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달 여동생과 통화를 하는데 가슴이 찡했다.
엄마의 수술을 앞두고 입원을 할 때였던가 퇴원을 할 때였던가,
병원 창구 앞에서 아버지는 외투의 지퍼를 열고 미리 준비한 두툼한 봉투를 꺼내셨다고.
수표도 없고 오로지 1만 원짜리 현금으로만.
우리 부모님은 이때까지 카드를 한 번도 발급받으신 적이 없는 것이다.
(그 봉투를 쓰게 할 동생 부부가  아니다.)

이번 주말 부산에 다녀왔다.
홍삼이니 몇 가지의 반찬들보다 오히려 내가 흐뭇한 마음으로 준비한 건 엉뚱하게도
베이지색의 '앙드레김 담요'였다.
쇼핑몰 측에서 보낸 메일을 받고 특가(29,000원)로 사게 된 것인데 부드럽고 따뜻하고
가볍고 좋아서 한 장을 더 샀다.

자식들이 제발 따뜻하게 지내시라고 당부하며 보일러 기름값을 따로 드리더라도
아버지는 그 기름값을 제대로 사용하신 적이 없다.
엄마는 차가운  안방에서 20년도 더 된 낡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내가 보낸 박완서와 장영희의 책들을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계셨다.
서강대 영문과 교수 장영희 씨 산문집의 앞부분에는
살아생전 너무 절약하고 검소하게 사신 부모님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일화가
소개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제 아침 앙드레김 담요는 안방 장롱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엄마는 다시 그 낡은 담요를 두르고 책을 읽으실 생각인가 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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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1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왠만하시면 그 퐌따스틱한 담요...쓰시지..어머님도 참...로드무비님 맘도 몰라주시고..^^

로드무비 2007-12-17 14:35   좋아요 0 | URL
메피스토 님, 헤헤, 퐌따스틱하다기보다는 의외로 수수해서
마음에 드는 담욥니다.
어쩌면 자식들이 떠난 후 그 담요를 다시 꺼내지 않으셨을까요?^^
심술이 좀 있는 분이라.=3=3

무스탕 2007-12-1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저런 사기전화가 끊기질 않았군요 --++
저희 부모님도 가끔 그렇게 사드린 물건들 넣어둘 가능성이 있다 싶을때 전 사용하고 계시던것 그냥 홀랑 버려버릴때도 있어요 ^^;

로드무비 2007-12-17 15:06   좋아요 0 | URL
무스탕 님, '아직도'라니, 그런 전화가 아주 일반화된 모양이군요.
우째야 쓰까......
어제 아침, 칠 벗겨져 검댕이 묻어나오는 찻주전자 하나를
몰래 처리하고 왔습니다.
님의 경험에 기대어 다음엔 프라이팬 두 개를 교체하고 오겠습니다.
불끈.=3(그런 상태가 되면 건강에 안 좋은 게 확실한데도
괜찮다고 우기시니 정말.)

2007-12-17 1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8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12-17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끼고 싶으신 거겠지요.^^
그러나 자식들에게서 받은 물건은 나중에 이웃 분들에게 자랑하실거라 생각합니다.^^

로드무비 2007-12-17 20:48   좋아요 0 | URL
L-SHIN 님, 자랑할 만한 이웃분도 없고 연세도 많으셔서......
예쁜 옷탐은 여전하신 분이 이상한 부분에서 아끼세요.
많이 속상합니다.



라로 2007-12-17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부모님과 똑같으시네요,,,현금박치기,,,,ㅎㅎ
저두 뭐 사드리려면 됐다시고 필요없다시는데 속상해요.....
뭐 자식이 능력이 없으니 보주셔서 그런건지 알지만
가끔, 아니 한번만 "그래 고맙다"라며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로드무비 2007-12-17 23:34   좋아요 0 | URL
nabi 님, 그러게요.
현금 봉투라도 자주 넉넉하게 드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노년'에 대해 자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먼 후일의 일이 아니어서리.^^
(전 주는 것마다 넙죽넙죽 기쁘게 받는 엄마가 될겁니다.)

2007-12-18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8 1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12-1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부모님 댁에 가서 옛날 제 물건들을 갖고 오면서 내가 보기 싫어하는 물건들을 몰래 버리곤 하는데요... 정말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것들을 얼른 제 손에서 뺏아서 딴 데 감추곤 하세요... 저도 깨끗하게 치워놓고 살 부지런함은 없으면서도 버리지는 또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하지만 깝깝할 때가 참 많은 것 같아요. ^^

로드무비 2007-12-19 23:13   좋아요 0 | URL
에로이카 님, 저도 깔끔이나 정리와는 거리가 먼 주제에. 헤헤.^^
아무튼 부모님과의 그런 숨바꼭질은 재밌기도 하고 깝깝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깝깝하기만 합니다.
한편으로 책장수 님이 확 내다버리고 싶어하는 여러 물건들을
저는 또 애지중지하는지라 '쓰잘데기 없는 것'의 기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우리 부모님이 좀더 편안하고 화사하고 쾌적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님도 그러시죠?

마노아 2007-12-18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기에도 상도가 있거늘 정말 날로 먹으려 드는 세상이에요. 따땃한 담요 두르시고 자식들 생각 한 번 더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러면 서로 포근할 거야요..

로드무비 2007-12-19 23:05   좋아요 0 | URL
마노아 님, 능력도 안 되면서 잔뜩 긴장하여 사기를 치려던 저 무리는
차라리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네요.
얼마나 먹고살기 힘들었으면......
'돈'도 모자라서 '권력'까지 장악한 인간도 있잖아요.

2007-12-21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8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9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29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31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3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2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0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밥헬퍼 2008-01-11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전화 받은 적 있습니다. 처음에 당황했지만, 이내 알아챘지요, 새해 복 많이 누리십시오.

로드무비 2008-01-11 13:47   좋아요 0 | URL
밥헬퍼 님, 이 전화 안 받은 집이 드문가봐요.
아까 님의 새 글들 반갑게 읽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