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이름도 모른다.
집 근처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스스로 '오류선생'이라 불렀다.
차분하고 말수가 적으며 명예나 이익에도 관심이 없다.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끝까지 읽지 않아도 개의치 않으며
'이거다' 싶으면 밥먹는 것조차 잊었다.
술을 좋아했는데 가난해서 늘 마시지는 못했다.(...)
늘 글을 쓰고 혼자 즐기며 자신의 주장을 드러냈다.
이해득실 따위는 잊고 살다가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일본 小출판사 순례기> 21쪽)


1981년 문예사상종합지 <고류(五柳)>를 창간하면서 한 평론에 도연명의 '오류선생전'을
소개함으로써 그 이름의 유래를 알린 일본의 출판사 고류쇼인(五柳書院).
'책읽기를 좋아하지만 끝까지 읽지 않아도 개의치 않으며'라거나,
'이해득실 따위는 잊고 살다가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는 인용된 구절이 참 좋았다.
도연명의 자전적 작품이라니, 갑자기 이 시인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개의치 않는다'는 건 도대체 얼마나 높은 경지인가.
'이해득실 따위는 잊고 살다가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니 또 얼마나 부러운지.
그런 경지의 1백만 분의 1에만 접근해도 좋으련만......

최근 내가 지갑 깊숙이 간직하며 제일 애지중지했던 건 
우리 동네 마트의 백설핫도그 250원 할인쿠폰이었다.
(딸아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패스트푸드 종류가 핫도그다.)
한달 동안, 다섯 개들이 핫도그를 두 번씩이나 사면서도 계산대 앞에서 까먹고
사용하지 못했던 그 쿠폰은, 결국 기한을 넘겨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휴가를 떠난 바닷가에서도 문득 기한이 이틀 남은 그 쿠폰이 떠오를 정도였으니
그 이상한 집착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개의치 않는다'는 것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영화.
어제 오후 일본 영화 <카모메(갈매기) 식당>을 보았다.
핀란드 헬싱키의 한 골목 모퉁이에서 조그만 식당을 열고
한 달째  텅빈 가게를 지키는 사치에.
돈이 남아도는 형편인 것 같지도 않은데 그녀의 태도는 유유자적하다.







식당을 열고 어언 한 달째 한 명도 손님이 없다면 초조할 만도 한데
그녀는 테이블을 닦고 커피를 끓이고 표정에 한 점의 미동도 없다.
위장된 침착함이 아니라 '개의치 않음'이다.
더욱 마음에 드는 건 사치에나 여행중 이 식당에 죽치고 앉아 허드렛일을 돕는 미도리,
짐을 잃어 이 도시에 잠시 발목이 묶인 전도부인처럼 생긴 여성 등
함께 주먹밥을 만들고, 서빙을 하고, 어느 날  잘 차려입고 소풍을 가서
파라솔 밑에 앉아서도 구구절절 자신의 사연을 말하지 않는다.

그 한적한 식당에서 풍기는 커피향이나 시나몬롤 굽는 냄새,
프라이팬에서 익어가는 연어구이와 돈가스 튀기는 냄새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창밖에서 텅빈 식당을 들여다보며 수군거리던 헬싱키의 할머니 삼총사가
시나몬롤 굽는 냄새에 홀려 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식당 안이 바글바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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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7-08-24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할인쿠폰을 스물다섯개쯤 받으면 그 중 한개 정도나 쓰지 싶어요. 전에는 기한 지난 쿠폰이 아까웠지만, 최근엔 못 쓸 거 같으면 그냥 버려요. 저절로 '개의치 않는' 경지에 이르렀나봐요.

sudan 2007-08-24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글의 맥락이랑 좀 맞춰보려고, 도연명을 검색해봤더니 음주시라는게 나오네요.
'내가 조용히 살다 보니 달리 즐거운 일도 없고 게다가 요즘 밤도 길어졌는데 우연히 귀한 술이 생겨 저녁마다 빼놓지 않고 마시게 되었다. ... 취하고 나면 자주 시 몇 구를 지어 보고 혼자서 흐뭇해하곤 했다.' 이야. 멋져요. >.<

로드무비 2007-08-2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 님, 우와 반갑습니다.^^*
갈매기식당의 사치에 이야기를 좀전에 덧붙였어요.
영화 참 좋더군요.
전 미도리 타입이랍니다.=3=3=3

저는 오류 선생 원문 긁어다 놨어요.
쿠폰의 재미는 최근에야 알았지 뭡니까.^^

치니 2007-08-2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본 영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영화, 카모메 식당!
근데, 사치에는 어딘가 자우림의 김윤아 같지 않아요?

로드무비 2007-08-25 05:16   좋아요 0 | URL
치니 님, 그러게요, 저도 그 생각을 했는데.ㅎㅎ
단호해진 김윤아.
그렇게나 창밖에서 오래도록 노려보던 한 손님의 술잔을 거절할 때
좋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어요.^^

hanicare 2007-08-24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매기 식당 스틸 올리신 거 보고
애들 동화 '펠레의 새 옷'이 떠오르더군요.
칼 라손이라는 스웨덴 화가의 책 '가족이 있는 풍경'도 따라 나오고요.
두 책 다 눈에 바랜 듯 엷은 색감이었거든요.

그런데 굳이 홀연히 어쩌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전 그냥 작은 그릇 그대로, 고냥 요 모양 요 꼴로 앙앙불락하면서 살거예요. 아무 멋없이.^^

굳이 징징 짜면서 구질구질한 자기 사연을 얘기할 만큼 인생이 내게 빚진 것도 없으니까요.흠...갈수록 건조해집니다.

DVD 나오면 보고 싶은 영화군요.

로드무비 2007-08-25 05:17   좋아요 0 | URL
홀연히고 나발이고 그게 어디 개인의 선택에 달렸어야 말이지요.
'포즈'말고요. 하니케어 님. 아시면서.^^

비로그인 2007-08-24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화 보고싶어요. 자기설명이 없다는 사람들이라니!

로드무비 2007-08-25 05:08   좋아요 0 | URL
새초롬너구리 님, 꼭 보세요.^^*
(전 아직 구차한 자기 설명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만.)

2007-08-24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5 0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5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5 0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07-08-25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도 사진도 너무 아름답습니다.
구구절절 인생 춘, 영화 꼭 볼테야요.

로드무비 2007-08-30 14:05   좋아요 0 | URL
구구절절 인생 춘 니임~
영화는 어제 끝난 것 같은데, 보셨어요?
전 님의 영화 페이퍼가 꼭 읽고 싶어요.^^

프레이야 2007-08-25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모메 식당은 디비디 나올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로드무비님의 맛깔난 글로 더욱 당겨요~~~

로드무비 2007-08-30 14:03   좋아요 0 | URL
카모메 식당은 디비디로 봐도 아늑하고 화면이 예쁠 거예요.^^

플레져 2007-08-26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였더라. 한 몇 주 되었는데요, 비오는 날 카모메 식당, 보고 왔습죠 ^^
사치에의 저 무연한 표정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때마침 드립퍼를 사뒀는데 커피 마실 때마다 '코피 루악' 을 외친답니다.
그래서 그런가 커피 맛이 아주 좋아요 ^^!

로드무비 2007-08-30 14:06   좋아요 0 | URL
플레져 님, "코피 루악!" ㅎㅎ
저도 드립퍼 하나 사려고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랑 커피랑 먹으니 아주 맛나더군요.^,.~

2007-09-01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3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에 2007-09-0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모메 식당도 궁금했던 영화였는데 빨리 보고 싶어지네요. ^^

로드무비 2007-09-03 13:43   좋아요 0 | URL
누에 님,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놓치셨다면 디비디로 꼭 보세요.^^

2007-09-14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