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를 저질렀다.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보르헤스)
오래 전 나의 여동생은 몇 년째 뻔뻔한 얼굴로
용돈 좀 나눠쓰자고 요구하는 나에게
"언니 니의 그 자부심의 근거는 무엇이고?"하고 물었다.
"내가 뭐, 그리 잘난척한 게 있다고 그라노." 하고 어물쩍 넘어갔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분명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근거 없는 자부심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해 대선을 앞두고 내가 받는 월급의 두달치를 주겠다며
퇴근 후 자신의 오피스텔(1인 출판사)에서 한 달여 숙식하며
모 대통령 후보 부인의 책을 만들자는 제의가 들어온 걸 거절했다.
한강변 그 오피스텔의 전망이 무지 좋아서
이런 곳에서 그런 경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이 뭐 그리 엄청난 제안인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잘난척하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자기가 영부인인 것 같았다.)
내가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모시는 분의 절친한 친구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나의 선생님인 건 아니지 않는가.
"얘길 들어보니 제가 적임자가 아닌 것 같아서요."라고
예의 바르게 그 선생님껜 이유를 댔지만,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건방지고 못됐더라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행복'이니 '희망'이니 하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이 우스워 보였다.
<샘터>니 <작은 행복>이니 하는 잡지를 무지 싫어해서
어떤 빤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마음속으로 그걸
'샘터식 행복'이라고 명명하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는 행복에 목을 매는 인간이 돼버렸을까.
호세 카를로스 카네이로의 보르헤스 전기
<책과 밤을 함께 주신 신의 아이러니>를 읽는데
다음 시가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를 저질렀다.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망각의 빙하가
내 몸뚱이를 끌고 가 무참하게 내동댕이쳤으면.
부모님은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삶의
유희를 위해, 땅과, 물과, 공기와, 불을 위해
나를 낳으셨다
나는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나는 행복하지 못했다.
그분들의 푸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찮은 것들을 교직하는 예술에
매달려 온통 정신을 쏟았다.
그분들은 내게 용기를 물려주셨지만 나는 용감하지 못했다.
불행한 사람의 그림자는 나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 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이라도 하던 교만이 있었는데
어딘가 조금만 이상해도 혹시 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마음을 안 먹은 게 아니라 마음을 먹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막연한 자부심은 시건방이라는 결론.
그런데, 온순한 얼굴을 목 위에 내걸고
마음속으로만 한없이 시건방졌던 날들이 그리울 때도 있다.
페이퍼 제목 '노름꾼의 트럼프'는 이 시가 소개된 페이지
다음에 나오는 글 제목.(보르헤스의 에세이집 제목이라고.)
그냥 그렇게 적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