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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명심의 문인의 초상 -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72인, 그 아름다운 삶과 혼을 추억하며
육명심 글.사진 / 열음사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 김종삼은 항상 빈곤이라는 산더미 같은 바윗덩이에 깔린 신세인데도
어쩌다 원고료라도 생기면 그 즉시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에 써버렸다.
또한 후배들에게 술도 사주고 용돈도 잘 주는 사람이었다.
결코 비상금 따위를 따로 챙기는 꼼수를 쓰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그가 쓰는 시도 그의 이런 고급 취향과 맞물려 있다.
그의 시는 하나같이 짤막하고 간단하며 단단하게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매우 탐미적이다.
대표작 중 하나인 '북치는 소년'은 그의 이런 특징을 잘 말해준다.
또한 그의 탐미적인 시선은 꿈과 환상의 세계로까지 잇닿아 있다.
이 같은 생득적인 본성을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소풍을 따라간 적이 있었다.
점심을 먹은 후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어린 딸은 한참을 찾아다니다
한 언덕 위에 묵직하고 넓적한 돌을 가슴에 안고 잠들어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딸은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왜 그러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하늘로 날아갈까 봐'라고 대답했다.
과연 그다운 말이다.
(김종삼 시인, 본문 73쪽 중)
<문인의 초상>은 1970년대 언저리에 사진작가 육명심이 집중적으로 찍은
우리나라의 시인과 소설가 등 문인들의 흑백 사진집이다.
박두진 박목월 김종삼 구상 강은교 등 널리 알려진 시인들 외에도
전봉건, 박봉우, 이원섭, 이유경 등 어느 날 시나 글로 만나
어떻게 생겼을까 잠시 궁금해 했던 시인들의 사진이 떠억하니 나와 있다.
반바지에 '난닝구' 차림으로, 한동안 우리집 뒷방에 진을 치고 있다가
소원대로 트럭 운전기사가 되었던 식객과 똑같이 생긴 강우식 시인을 필두로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멋들어진 글씨의 '禁酒' 쪽지 앞에서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홍소하는 고은 시인,
동네 개천 앞에 쪼그리고 앉은 박용래 시인의 모습은
한편의 시를 방불케 한다.
시인이랍시고 한껏 폼을 잡은 사진들은 몇 편 없고
대부분 생활인의 냄새를 물씬 풍겨서 더할 수 없이 좋다.
1990년대 초 한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만취하여 자신이 수상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갈짓자 걸음으로 돌아다녔던 시인이 있었다.
시상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그가 이 책에서
눈빛이 형형한 청년의 모습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 부끄러운 기억은 지워달라고.
(어쩌면 그는 그날 필름이 끊긴 가운데 연출했던 그 장면이 너무 무참해
일찍 세상을 버렸는지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다.)
올해 2월 세상을 떠난 오규원 시인의 초상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오규원 시인이 눈을 감기 전 제자의 손바닥에 쓴 시)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다소 가볍게 시를 쓴다고 생각했는데
책꽂이 앞에 검은 스웨터를 입고 앉은 모습에서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아우라를 본다.
책상 앞에 붙여두고 오며가며 보고 싶다.
그리고 책 표지를 장식한 박두진 시인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
이상하게 오싹해지는 휴전선'의 시인 박봉우.
보기만 해도 내 사는 꼴이며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얼굴들이 있다.
지난해인가, 이 비슷한 포맷의 <시인 박물관>이라는 책은
나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 주었는데......
생각지도 않은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