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한 포털에 들어갔다가 그 얼굴을 보았다.
회색 체크 외투를 입은 또랑또랑한 어린 시절의 얼굴.
그리고 10여 년 전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드라마를 보다가
앗, 내 친구 옥명 씨랑 똑같잖아, 하고 놀라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얼굴.
(그래서 그 본명이 그렇게 익숙했던 거구나.)

옥명 씨는 내가 북아현동 문간방에서 자취할  때 김장김치를 꽁꽁 싼 분홍색 보자기를 손에 들고
거리에 면한 들창문 아래서 나의 이름을 불렀던 친구다.
그 들창문에는 영화 <정복자 펠레> 팸플릿이 붙어 있었다.

오래 전  퇴근 후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몹시 취하여 택시에서 내려(왜 내렸을까?) 
굴레방다리를 털레털레 걸어올라 왔을 때,
어찌된 셈인지 다음날 내 핸드백을 돌려주겠다는 모르는 남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한걸음에 달려와 기꺼이 나와 함께  약속장소인 빵집까지 나가준 친구다.

잿빛 승복이나 수녀복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 서늘하고 단아한 얼굴.
그녀에게 빌린, 연필로 그은 밑줄이 가득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돌의 정원>.

결혼하고 몇 년 뒤  영광에 가서 살게 된 그녀를 겸사겸사 만나러 갔다가
처음으로 얻어먹어 보았던 굴비정식. 
그 봄 나의 단독 패키지(광주 비엔날레 - 망월동 묘역 - 카페 '브레히트와 노신'을 묶은) 
남도여행을 그녀는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나는 쓸쓸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어린 남매의 머리통을 하나씩 수박처럼 옆구리에 끼고 버스가 떠날 때까지 서 있던
을씨년스런 풍경의 시외버스 정류장이 생각난다.

내 결혼식 때 보고 나서 연락이 두절된 그 친구의 얼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돌의 정원>을 보고 잠시 떠올렸을 뿐.

우연히 본 가수가 되기 전 연기자 이혜련의 얼굴은 옥명과 똑같았다.
내 친구와 똑같은 그 얼굴도 좋았고,  몰라보게 화려해진 얼굴도 예뻤는데......
(짐작컨대)  타의에 의해 변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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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ky 2007-01-23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너무 안타까워요. 사실 저는 아역배우로 나왔을때만 기억하고, 가수로 데뷔한지는 몰랐었어요. (제가 이민간 이후의 일이라..)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로드무비 2007-01-2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우차우님, 저도 오늘 처음 알았어요.
그녀가 그녀인지.

oldhand 2007-01-23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 님이 유니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어디서 또 술한잔 기울이고 계실지 모르겠군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는 일은 연유가 어찌되었든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로드무비 2007-01-2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 님, 저도 마태우스 님 생각했답니다.

nada 2007-01-23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악플러들은 법적으로 처벌해야 돼요. 정치인들은 별 시시껍절한 말 가지고도 명예훼손이다 뭐다 파르르 떠는데.. 악플은 그보다 백 배 천 배 더 잔인하잖아요..

2007-01-23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7-01-23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일 먼저 마태우스님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엔리꼬 2007-01-23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마태우스님 생각하신 분이 한둘이 아니시군요. 유니씨는 가는 길마저도 쓸쓸했다고 하죠? 좋아했던 가수는 아니었지만 자신 취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로드무비 2007-01-23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림 님, 물만두 님, 새벽별 님,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네요.

꽃양배추 님, 자신이 내뱉은 말들은 어느 날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믿으면 사는 태도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요?
어떤 악플들은 보면 정말 그 상판이 궁금하고,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고 싶어요.



2007-01-23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23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01-23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인터넷 통신 초반기에 지금의 악플러에 해당하는 인물을 직접 대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살벌하게 독설을 퍼붓고 육두문자를 날리던 그 인간....
오프라인에서는 입도 뻥긋 안하더라구요..거기다가 외소하고 파리한 체구.....
내적갈등의 외적표현이라고밖에는 생각이 안들더라구요..^^

로드무비 2007-01-2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 님, '내적 갈등의 외적 표현'은 너무 우아하고요.
열등감의 표출이나 분열되고 비겁한 자아 쪽이 아닐까요.
메피스토 님이 악플러들 혼내키고 갱생시키는
학원을 차리시면 좋겄는디.=3=3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정복자 펠레 님, 누구라도 어떻게 정확한 연도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89년, 90년, 91년은 세상에 태어나 제가 제일 많은 곳을 바쁘게 다니고
제법 많은 것을 경험한 해들이었답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건우와 연우 2007-01-2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 다독이며 살아도 팍팍한 일 천진데, 쓰잘데없이 남의 심사나 긁는 참견으로 분주한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여유로운 시간이 나는 건지요...
생명이야 누구나 귀하지만 곱게도 생긴 젊은 처자라 죽음이 더 처연해보이더군요.
이 사건이 두루두루 반성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2007-01-25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