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국 평전 -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정운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출판사에 꽤 알려진 자신의 이름과 해사한 얼굴을 빌려주고, 대필 작가를 무슨 몸종 부리듯
이래라 저래라 온갖 사항을 지시한, 한 유명 여성의 어이없는 메모 내용을 
오늘 오전 키노 님의 페이퍼로 보았다.
그것이 초고라니, 기가 막혀서!
그래놓고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부끄러운 줄 모르니, 아무 상관 없는 내가 다 낯이 화끈하다.

임기가 끝난 국회의원들이 의정원인가 의정단인가 하는 단체를 조직하여
공공건물에 공짜로 상주하며  시 예산을 갉아먹고 있다는 보도를 며칠 전 접했는데,
단체관광을 '시찰'로 둔갑시키질 않나, 그들은 온갖 명목으로 시민들의 혈세를 뜯어내고 있었다.
더구나 어느 시 의정회의 대표는 공금유용과 서류 조작 건이 들통나
취재기자가 끈질기게 물고늘어지자,
"이 사회가 얼마나 썩었는데, 겨우 이 정도의 돈을 가지고 그러느냐며 화를 버럭 내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이라고 현역시절에 큰소리 치고  치부하고 살았으면 됐지,
죽을 때까지 단물을 빨아먹겠다는 노욕 앞에서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며칠 전 수중에 들어온 <임종국 평전>을 만지작거리다 내심 2007년의 첫 책으로 찜해놓고 있었는데
참지 못하고 야곰야곰 파먹다보니 오늘 새벽에 다 읽었다.
이런저런 마음속의 갈증 때문이겠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경제적으로든 뭐든 딱할 만큼 요령과 주변머리가 없었던 그는
미간에 깊이 주름을 세우고 닥치는 대로 애꿎은 물그릇이나 발로 차며 지냈다.
젊어 천재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는데, 참혹한 가난은 그에게 두터운 벽이었다.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의 그가 생활고 때문에 화장품 외판과 참빗 행상에까지
뛰어들 정도였으니,  <선데이서울>의 원고청탁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생활을 위해 온갖 허드레 원고를 쓰던 중에 일생의 과업을 만나게 되었으니
바로 친일파 연구.

붙잡아야 할 필생의 업이든 사람이든 어느 날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상(李箱) 시인을 연구하다 보니 일제 강점기가 눈에 들어오고,
모 신문의 청탁으로 '흘러간 성좌'를 연재하다 보니 친일을 했던 이들이 아무런 반성 없이
떵떵거리고 사는 이 땅의 말도 안되는 현실을 목도하게 되는 식.
친일파 문제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와 연결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제일 감탄했던 부분은 가난과 병고와 결혼생활의 파탄 등
참기 어려운 인간의 구체적인 고통 속에서 비록 가까운 가족에게 화풀이를 하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의 필생의 작업이다.
친일파 청산 없이는 이 나라에 올바른 미래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
<친일문학론>을 써내고 사람들의 관심을 기대했지만,  세상은 끝까지 그를 외면했다.
그는 말년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로 식솔을 끌고 내려가 사과궤짝을 엎어놓고
원고를 썼다. 나이 오십줄에 친일파 관련 자료 수집을 위해 어린 아들과 상경하여
단칸방에서 자취를 하다가 병이 더욱 깊어지고.
연구비를 어느 단체에서 지원받자고 하는 지인의 제안에
지원금을 받으면 손이 떨려 글을 못 쓴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한 그이다.

타협을 모르는 성미 탓도 있겠지만, 연치에 비해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마디로 사는 게 편치 않은 그의 얼굴을 다음 페이지에서 새로운 사진으로 만날 때마다
나는 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일찍이 천재라는 칭송에, 시를 쓰고 클래식 기타며 각종 악기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등 
예술가적 자질이 넘쳐났던 그가 아니던가.

오래 전 <친일문학론>을 책으로 읽었을 때의 충격이 되살아나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와 문덕수의 친일문인  옹호론을 소개하며 이 평전을 쓴 정운현 씨는
존경하는 스승 청마 유치환을 보호하기 위해 백석 정지용 등의 친일 사실을 언급하며
물귀신 전법으로 일관한 문덕수를 유종호와 비교해 사정없이 깎아내리는데,
문덕수는 아예 언급할 가치도 없고,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지적인 유종호의 견해가
나는 더욱 갑갑하게 느껴졌다.

일제 강점기에 교사로 근무하며 어린 학생들에게 일본말을 가르치고 천황에게 절을 하게 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뜻에서 지금도 매일 온 동네를 깨끗이 쓸고 다닌다는 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못 들어봤나?!

반민특위의 후신격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일을 하며 평소 흠모하던 선배의 삶을
꼼꼼하게 기록한  정운현은 딱 이 평전의 적임자다 싶으면서도  
6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집필일기를 부록이라고 평전 뒤에 떠억하니 실어 사람을 기함시켰다.
재밌게 읽긴 했지만 이건 영 아니라고 본다.
그 형식도 내용도 임종국의 묵직한 삶과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자신의 집필일기는 지면을 마련하여 관심있는 독자에게만 따로 소개했으면 좋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학 휴학 후) 죽치고 앉아서 암담한 생각으로 해를 보내고 있을 때
내 안에서 중뿔난 소리가 들려왔다.
타고난 오기라 할까, 반골의 소리가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권좌에 앉아서 만 사람을 머리 숙이게 하지 못할 바에야,
내가 만 사람에게 머리 숙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권력을 내 것으로 못한다면
대신 자유를 가지면 될 게 아닌가?
권좌에 연연하고 뇌물에 머리 숙이는 치사한 인간이 되느니 철저하게 자유인으로 살자!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뜬구름 한 조각이 되어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내 것으로 하면서 사는 거다!
이리하여 나는 신주단지 모시듯하던 법률책들을 술과 바꿔 버리고 말았다.
후련한 것도 같고, 서운한 것도 같았던, 젊은날의 자화상 한 토막이다.
                                                             (임종국의 글  '술과 바꾼 법률책' 중 인용, 182쪽)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헬퍼 2006-12-2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얼마전에 살던 집을 이사하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던 책들을 골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결국 파지 주우러 다니시는 노부부에게, 필요하시면 가져가시라면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 곧바로 오셔서는 늦게까지 두 분이 리어카에 몇번을 싣고서 몽땅 가져가셨습니다. 도와드릴까요 했더니 한사코 손사래치며, 준 것만도 고마운데 그럴 것 없다고,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나중에 한번 물었지요. 꽤 될텐데 얼마 받으세요. 오늘은 좀 무게가 나가니 낫겠지요 뭐...짐작하건데, 나의 그 애지중지했었던 책들은 아마도 '기천원'의 판결이 났을 것이다. 책 팔아 술먹어 버릴 때의 심정은 잘 모르겠지만 내 손에서 애지중지하던 책, 그것을 치워버리고 나니 한편 허전하기도 하지만, 돌이켜, 내 안에 그것들의 그 아련한 잔상이 남아있지 않는다면, 엄청나게 값싸면서, 쓸데없는 무게만 잔뜩 품고 있는 파지 아닐까 싶어 조금은 씁쓸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돌아보면 안그래도 좁은 집에 파지 짊어지고 사느니, 누군가에게 소중한 기천원이라도 남겨주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한편의 리뷰가 한 책을 대신할 때가 이 서재에는 자주 있네요. 연말 잘 보내시죠?

2006-12-26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6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2-2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헬퍼님, 아이고, 그 책들 아깝습니다.
기천원이든 기만원이든 노부부의 일당에 도움은 되었겠지만
말입니다.
전 결국 버리지 못하고 다 싸짊어지고 왔습니다.
나의 독서행위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 봐야겠어요.
밥헬퍼 님도 최근 주소가 바뀌셨군요.
정신없이 바쁘셨겠어요.
님의 댓글을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로드무비 2006-12-26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도를 지키는 것이 님, 어떤 때는 정말 속에 천불이 납니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의롭게 산 그를 일러 주변에서
'기인 아닌 기인'으로 평할 정도이니 어떻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가......

쓰다만 책 님, 친필유고요?
정말 궁금하네요. 어떤 인연으로 접하셨는지.
그의 저작을 모두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친일문학론> 말고는 읽은 게 없거든요.


nada 2006-12-26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하려면 뻔뻔해야 되나 봐요. 아니면 그 반대든가. 한씨 사건, 정말 기막혔어요. 제목만 보구선 무비님 서재 떠나신다는 소린줄 알았잖아요. ㅎㅎ

가랑비 2006-12-26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

sudan 2006-12-2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 문학론부터 읽어야겠어요. 어유. 로드무비님 리뷰 읽고 나니까 새삼 열받아서 손 떨려요.

2006-12-26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짱꿀라 2006-12-27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이 뉴스 신문을 보다가 서평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서평도 좋은 인상을 주었답니다. 오늘 로드무비님의 서평을 보니 또 한 번의 좋은 인상을 받고 가네요. 지금 주문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마노아 2006-12-2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 댓글을 능가하는 리뷰였어요! 정말 한 편의 리뷰가 책 한권을 그대로 꽂히게 만드는군요.

로드무비 2006-12-28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 님, 그의 업적보다 인간적인 측면을 많이 파고들어간
평전이었어요.
짬짬이 읽고 리뷰를 쓰고 싶게 만든.
좀 신통치 않게 써졌지만요.^^

santaclausly 님, 정운현 씨가 오마이뉴스 편집장이었죠?
장황한 집필기를 평전 뒤에 실은 건 명백한 실수라고 봐요.
읽고나면 리뷰 꼭 올려주실 거죠?
님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클릭하고서 뜨끔 님, 제 낯짝도 그래요. 사는 게 편치 않은......
맞아요, 마음이 자꾸 가는 쪽이 있어요.
성탄절엔 서울의 근사한 레스토랑에 진출, 맛난 저녁을 먹었습니다.
주하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없다고 나발을 불다가
결국 선물을 못 받았고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걸어둔 양말을 보고 실망하던 얼굴이라니!ㅎㅎ)

sudan 님, 윤봉길 의사가 나라를 위해 행동을 개시하는 동안
이광수는 어린 소년의 동성애 경향에 관한 소설을
일본어로 집필하고 있었다는군요.
<친일문학론>을 읽은 후 동시대를 산 작가들을 볼 때
'친일' 여부가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하더군요, 나도 모르게.^^

FTA반대벼리꼬리 님, 오랜만입니다. 와락=3

꽃양배추 님, '...님 때문에 제가 서재를 뜰 수가 없답니다.'
이런 말 되풀이하는 사람 제가 제일 싫어해요.
'떠날 때는 말없이'가 저의 신조. ㅎㅎ
그 여인은 정말 웃겼죠?
코미디가 따로 없어요.^^



waits 2006-12-28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하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없다고 나발을 불다가
결국 선물을 못 받았고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걸어둔 양말을 보고 실망하던 얼굴이라니!ㅎㅎ)
... 아, 주하한테 미안한데, 너무 웃겨요. 낮에 사무실에서 보고 한참 웃었어요.
다시 봐도 너무 웃음이~^^;; 그래도 야무진 주하는 금세 씩씩해졌겠죠?
주하 엄마도 참 못지 않으시구요. ㅎㅎ

2006-12-30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12-30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 나어릴때 님, 동주가 크리스마스 선물 받을 거라고 자랑하니까
초를 치느라고 한 소린데 딱 걸렸지 뭡니까요.
동주는 선물을 받았거든요.
급히 나가서 선물을 하나 준비할까 하다가 그녀의 발언이 얄미워서
냅뒀습니다.
저도 한 심술하거든요.
님이 웃으셨다니 즐겁습니다.^^

해사한 낯짝 님, 아니 지가 낯짝을 얼굴로 바꾼 걸 어찌 아시고!
질투라는 단어는 님과 저에게는 절대 어울리지 않습니다.( '')

2006-12-31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24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