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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3 ㅣ 소설 보다
공현진.김기태.하가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젊은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의 설정과 교묘한 은유와 상징으로 나를 어지럽게 만들기도 한다. 다르게는 그만큼 매력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소설 보다: 여름(2023)』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새로운 작가의 소설을 읽는 건 언제나 반갑지만 그 첫 만남이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니까. 조심스럽다는 생각, 그러다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싶다. 그냥 끌리는 소설의 읽고 그 작가를 기억하면 그만인 것을.
『소설 보다: 여름(2023)』는 대체로 좋았다. 특히 좋았던 소설은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이었다. 제목이 암시하는 우울과 절망의 분위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보여주는 게 좋다. 소설 속 ‘희주’와 ‘주호’는 성인 기초 수영반에 등록했다. 기초에 주목하자. 그러니까 수영을 처음 배우는 것,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매우 빠른 속도로 수영을 잘 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열심히 해도 그 자리인 경우가 있다. 희주와 주호는 후자라 할 수 있는데 강사나 다른 회원의 눈에는 둘은 성실하지 않게 보인다. 눈치가 없는 주호는 특히 그렇다. 잘 하는 사람은 앞에 서라는 강사의 말에도 주호는 맨 뒷자리로 가지 않는다. 그런 주호를 희주가 뒤로 이끈다.
수영장 밖에서 주호와 희주는 어떤 사람인가. 주호는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희주는 10년의 교사 생활을 끝으로 퇴직했다. 희주는 환경을 생각해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버리는 만큼 필요한 것들이 늘어났다. 물건과 물건 사이에서 희주는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교사 시절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에게도 우리는 물에 잠기고 인간은 다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걸 말한 것도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괴롭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주호의 직장에서 사출성형기에 끼어 동료 하나가 죽었다. 동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사고 후에도 공장을 돌아갔고 주호는 이건 아니라며 기계를 컸다. 누가 봐도 돌방행동이었다. 지속되는 주호의 행동에 회사는 주호를 쉬게 만들었다. 어떤 죽음과 어떤 사건에 대해 적당한 기준의 애도와 추모가 가능한가. 그만하면 됐다는 그 선은 누가 정하는가. 주호에게 침묵을 강요한 건 누구인가.
네가 왜 난리냐,라는 말을 듣고 주호는 그러게, 왜 내가 난리일까, 싶었다. 곽주호는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살았다. 나는 정말 책임이 없는 걸까. 그 생각에 사로잡혔고, 무슨 일을 대하든 습관처럼 이 질문을 마주했다. 점점 주호는 자신과 상관없는 뉴스들을 보면서도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물속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21~22쪽)
어쩌면 희주와 주호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왜 남들처럼 살지 않고 유난을 떠냐고 말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환경을 생각하며 행동하고 싶었던 희주와 이제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걸 느낀 주호. 그들은 정말 나와 다른 사람일까. 수영을 배운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지만 수영을 배우는 이들이 다양한 것처럼 수영에 대해 다가가는 방법이 모두 똑같을 수 없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여러 각도에서 읽을 수 있는 좋은 소설이다. 사회 속 우리의 모습을 수영장에서 수영장의 그것으로 비유한 점이 탁월하다. 수영장은 다른 어느 곳으로든 치환된다. 내가 속한 작은 모임, 공동체 그 안에서 어떻게 의견을 나누고 연대할 수 있는 생각하게 만든다. 공현진의 다음 소설도 꼭 읽고 싶다.
김기태의 「롤링 선더 러브」는 세태소설로 무방하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를 선택해 출연한 37세 독신 ‘조맹희’의 이야기다. 너도 나도 사랑을 외치고 찾지만 정작 진짜 사랑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고 할까.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소설이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큰 의미나 재미는 없다.
서울에서 고향 울산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해 엄마 ‘추자 씨’와 ‘나’ 사이의 시간과 둘 사이의 관계의 변화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들려주는 하가람의 「재와 그들의 밤」도 나쁘지 않다. 20년 동안 살았던 한울 아파트가 산불로 인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가 챙겨온 앨범에서 ‘나’ 가 마주한 건 ‘추자 씨’ 사진뿐이다. ‘나’ 가 모르는 진짜 엄마의 모습. 재와 그들의 밤이 지나면 ‘추자 씨’와 ‘나’의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까. ‘나’의 열망으로 가득한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둘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결말이 탁월하다.
나는 바랐다. 바람이 굳게 닫힌 투명한 창문을 깨뜨리기를.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이 오래된 발자국들을 뒤덮기를. 깨진 창문으로 걷잡을 수 없는 강한 바람이 불어닥치기를. 또 바랐다. 바람이 집 안의 모든 문을 열어젖히기를. 옷장과 서랍 속을 뒤집고 흔들어 부질없는 내용물들의 무덤이 만들어지기를. 산에서 시작한 불길이 빠르게 번져 한울을 집어삼키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구호도 장비도 무용해지기를. 모든 것이 까맣게 재가 되어 사라지기를. (「재와 그들의 밤」, 150~151쪽)
한 쪽을 기운 편향적인 리뷰지만 취향의 차이일 뿐 장맛비 쏟아지던 여름에 만난 『소설 보다: 여름(2023)』는 장맛비처럼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