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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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을 때 어느 순간 글에 나를 대입하고 있다는 걸 발견할 때가 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상관없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쉽게 바꿀 수 없는 환경을 경험했을 때 모든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된다.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에 가려 다른 것은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독자는 비평가가 아니기에 그저 작가가 원하는 바를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은 독서 일지도 모른다. 모든 책의 마지막에는 독자가 있으니까.


이주혜의 단편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를 읽으면서 여성 독자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입장에서 소설 속 인물이 놓인 어려움이 고스란히 내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주혜는 장편소설 『자두』에서도 간병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림자 노동의 현실을 보여주고 돌봄의 주체인 여성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여전히 차별적인 여성의 지위에 대해 들려준다. 첫 단편집에서 수록된 9편의 단편에서도 여성의 삶을 다룬다.


가족 안에서 딸, 아내, 어머니라는 자격을 부여받은 여성의 위치와 감당해야 하는 역할은 여전히 불편하다. 세 자매가 아버지의 사십구재를 치르고 모인 「오늘의 할 일」에서 자매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 기억은 세 딸을 둔 아버지가 밖에서 낳아 온 아들로 이어진다. 어린 동생을 향한 자매의 감정을 충분히 알 것 같은 건 오빠를 두고고 아들 하나를 더 낳기 위해 딸 셋을 낳은 엄마가 생각나서다. 엄마는 내 밑으로 남동생을 낳았다. 우리 자매에게도 남동생을 돌봄과 동시에 미움의 대상이었다. 아들만 대우를 받았던 시대는 지났지만 많은 여성이 그 상처와 함께 살아간다.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엄마 되기를 강요받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해부학자 ‘녕’과 결혼한 산부인과 의사 ‘규’도 다르지 않다. 산부인과 의사이기에 낙태를 선택할 수 없었다. ‘규’는‘원’을 출산 후 엄마라는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집을 떠나 아프리카 난민 봉사활동에 전념한다. 친정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열여섯 ‘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 때에도 곁에 없었다. ‘원’의 죽음을 두고 ‘녕’이 ‘규’를 비난하는 건 옳은 것일까. 누가 엄마의 역할을 규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에서 한 번 더 묻는 질문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시작된 시점, 아이들을 통해 맺어진 세 엄마의 우정이 흔들리는 과정을 통해 엄마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나’,‘수라 언니’,‘미예’는 엄마라는 이유로 친해졌다. 기혼 여성이 학부모로 만나 이어지는 유대관계는 친밀 그 이상을 지닌다. 셋 역시 그러했다. 팬데믹의 상황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미예를 위로하는 자리가 코로나 확진으로 이어졌다. ‘수라 언니’의 확진으로 밀접 접촉자인 나’와 ‘미예’는 물론 가족까지 검사를 받는다. 가족 일부가 확진되고 치료를 위해 생활치료센터로 떠나거나 자가 격리를 한다. 코로나 확진의 모든 책임은 엄마에게도 쏟아진다. 아이를 키우는 고충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맘충’이나 ‘유한부인’이라 비난을 받아야 했다. 3년 차인 현재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걸 알지만 3년 전으로 돌아가면 사회 전반의 시선이 소설과 다르지 않다.


무엇이 자꾸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까? 우릴 자꾸 고립시키고, 왜 저러고 사나 싶게 만들고, 경멸하기 좋은 얼굴로 변모시키고, 끊임없는 자기 증명의 압박을 가하는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부터 재난의 한복판에서 천근만근이 되어버린 아이를 업고 달리는 (그러나 달리지 못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걸까? 이 바이러스의 진짜 이름은 무엇일까? ( 「우리가 파주에 가면 꼭 날이 흐리지」, 120~121쪽)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엄마의 역할뿐 아니라 가장의 역할도 맡았다. 표제작인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속 주인공 ‘은정’이 그러했다. 자궁 적출을 위한 수술대 위에 오른 몸에서 유체이탈한 영혼이 지난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는 쓸쓸하다. 결혼하지 않은 않고 일하는 여성을 향한 온간 소문과 추문은 한결같다는 게 창피할 정도다. 


이주혜가 보여준 소설 속 인물은 허구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실재하기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엄마와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제시하는 「봄의 왈츠」는 가까운 미래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반갑다. 봄이 여자친구인 ‘나’에게 세 명의 엄마를 소개한다. 혼자 봄이를 낳은 ‘선남’, 선남의 오랜 친구 ‘리온’, 리온의 연인 ‘미호’는 모두 봄의 엄마다. 그들은 각자 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고 무시와 학대를 받았다. 선남, 리온 , 미호는 봄의 가족으로 자신이 잘 하는 일로 봄을 돌보며 봄의 엄마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 오래전 한 어린 사람을 이 세상에 환대해주어 내가 사랑할 수 있게 해준 여자들을 만나서, 내가 오히려 고마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다만 봄을 한번 와락 안아주었다. (「봄의 왈츠」, 243쪽)


「그 시계는 밤새 한번 윙크한다」 속 ‘나’와 ‘온’과 ‘율’도 다르지 않다. 이혼한 ‘나’가 딸인 ‘율’에게 미처 챙기지 못하고 알려주지 못하는 부분을 나의 친구인 ‘온’이 채워준다. 과거 ‘나’와 ‘온’이 각자의 엄마에게서 받지 못하 애정과 사랑을 ‘율’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되어서야 자신이 알지 못한 엄마의 상실과 외로움을 알게 된다. 


이주혜의 단편집은 여성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마나 아내가 아닌 여성으로 사는 일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없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따뜻한 배려와 연대에 대해 말한다. 다양한 가족 형태, 과거의 상처를 안아줄 수 있는 다정한 시선, 나가 아닌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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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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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 있는 슬픔을 덜어낼 수 있는 가장 큰 그릇은 존재할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슬픔이 다 마르거나 증발해버려서 덜어낼 필요가 없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이 현명하다. 애도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시간은 없다. 일정 기간이 지났다고 해서 상실과 애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 안윤의 『방어가 제철』 은 그런 애도의 기록이다. 그래서 수록된 세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은 낯설지 않다. 


우리 생에는 발작처럼 대응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후회를 몰고 온다. 뭔가 나의 잘못으로 기인한 일이 아닐까 싶은 마음과 상대를 향한 애정이 부족했다는 안타까움에 책망의 시간이 시작된다. 화자가 ‘소애’의 생일상을 차리는 장면을 천천히 묘사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은주’ 언니에게 들려주는 형식의 「달밤」 속에서 그녀의 부재를 직감할 수 있다. ‘소애’의 생일과 ‘은주’의 기일이 같은 날이라는 게 애석하지만 누군가 죽는 날 누군가 태어나는 게 삶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은주’의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화자가 수첩에 쓴 것처럼 결국 남겨진 이들의 몫은 살아가는 일이다.


살아 있는,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그렇다고 너무 아끼지도 말고 너무 아까워도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 (「달밤」, 30쪽)


알고 있지만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가는 게 불가항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오빠의 친구인 ‘정오’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방어가 제철」 속 ‘나’가 그러하다. 미대에 가고 싶어 하던 나를 위해,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오빠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삼십 대가 된 ‘나’는 지병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반찬가게를 하고 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정오’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재회했다. 그리고 방어가 제철인 계절에 둘은 만난다. 오빠 ‘재영’과 ‘정오’, 화자까지 셋이서 하나처럼 지냈던 시절, 이제는 남은 둘이 의식처럼 ‘재영’을 기억한다. 그러나 시시콜콜 일상을 나누면서도 ‘재영’을 언급하는 일은 없다. 서로를 통해 ‘재영’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것을 모른 척 위장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더는 내게 묻지 않는다. 언제부터 묻지 않게 되었는지조차 묻지 않는다. (「방어가 제철」, 70쪽)


「달밤」과 「방어가 제철」이 가까운 이를 애도하는 기록이라면 「만화경」은 우리 주변의 고독사에 대한 애도라 할 수 있다. 이혼 후 한 빌라의 세입자로 들어온 ‘나경’은 집주인 ‘숙분’ 때문에 불편하다. ‘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할머니라 여기고 거리를 두었는데 ‘숙분’의 친구 ‘단심’이 빌라로 이사를 오면서 오해가 풀렸다. ‘나경’이 살던 집의 전 세입자가 혼자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일이 있어 ‘숙분’이 그렇게 살폈던 것이다. ‘미리내’란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녀를 애도한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겼던 사람의 죽음과 그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일상에서 스치듯 그 이름과 마주했을 때 그 이름이 갖는 슬픔까지 마주할 수밖에 없다. 알게 된 이상 그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불행한 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이다. 소설은 우리를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차오르는 분노와 함께 신당역 역무원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처럼 저마다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일상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하며 살아가려고 애쓴다. 때로는 그리움에 울부짖고 때로는 부정하며 곁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생활한다. 특정한 물건을 볼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선명하게 확보된 부재에 절망한다. 하나같이 차분한 안윤의 소설은 에세이까지 한결같다. 나는 소설보다 에세이에 마음이 기운다. 애도는 구멍이 뚫린 가슴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지는 구멍을 그저 내버려 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없이 쓸쓸하고도 다정한 애도가 나를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온다.


당신에게는 더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서서히 멀어졌거나 뒤돌아 떠났거나,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이름들.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주 그 이름들을 부른다. 묵독을 할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때처럼 호명한다. 그 이름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지만 당신은 선명하게 듣는다. 고유한 말투, 희미한 미소, 가만가만히 고갯짓을 본다. 때때로 그 이름들이 당신들의 일상에 출몰하기도 한다. (「없는 것들이 있는 자리」,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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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23 1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없이 쓸끌하고 다정한 애도가 나를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온다. ㅠㅠ 자목련님이 소개해주시는 책내용도 좋지만 자목련님이 쓰신 문장에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쓸쓸하고 다정한 이름들을 가끔 꺼내보고 쓰다듬으며 그렇게 사는거겠지요.

자목련 2022-09-25 15:39   좋아요 2 | URL
나도 어떤 이들에게 그런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미니 님, 맑고 빛나는 오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9-24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어회 맛있지...
하고 보다가, 다시 방어가 제철이란 제목에 쓸쓸함으로 다가오네요

자목련 2022-09-25 15:38   좋아요 2 | URL
전체적으로 쓸쓸한 소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쓸쓸함이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님, 맛있는 가을 이어가세요^^
 
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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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을 행복하다. 삶 전반에 자신만이 아는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으로 비칠지라도 상관없다. 나만의 기쁨을 누리고 그것을 채우는 일에 만족하고 집중할 수 있으니까. 누구도 그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다가 지칠 게 뻔하다. 우리는 그가 아니고 그도 자신의 삶에 대해 설명하거나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 설터의 장편소설 『고독한 얼굴』의 주인공 ‘랜드’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나갈 뿐이다. 그에게 삶은 그런 것이다. 랜드에게 산을 오르는 일, 고산 등반은 그 자체가 삶이었다. 어떻게 등반을 시작했고 무엇 때문에 산에 매료되었는지 소설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오르는 일에 기쁨을 두는 것일까. 아니다. 랜드의 욕망은 산 정상을 오르는 정복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프랑스의 알프스 ‘샤모니’의 드뤼까지 죽음의 여정을 시도할 필요가 없다. 그곳에서 친구 캐벗과 드뤼 서벽을 오르는 과정에서 등반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나는 너무 두려웠고 조바심이 났다. 부상을 당한 캐벗이 죽을까 봐, 그런 친구를 홀로 남겨두고 랜드가 혼자 암벽을 끝낼까 무서웠다. 동시에 도대체 산악 등반에 성공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길래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물론 소설을 다 읽고서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았다. 랜드만의 기쁨은 그에게 속하는 것이니까.


물론 설터가 구사한 등반의 과정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가 그려낸 문장을 통해 나는 눈앞에 설경의 알프스를 오르는 두 남자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등반 소설이라는 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느끼는 전율을 만끽하는 스포츠 정신을 알려주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삶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길을 찾아 등반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화될 수도 있다. 수없이 마주하는 돌방상황, 그때마다 달라지는 선택지와 그에 따른 책임들. 소설 속 ‘산’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산’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산악인은 산을 알아야 한다. 속도와 판단은 필수적이다. 계속 오르든 하산하든 고전적인 결정은 언제나 같다. 계속 오르는 것이 더 쉬운 때가, 사실상 정상에 이르는 것이 유일한 출구인 때가 온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힘이 있어야 한다. (93쪽)


등반 과정 중에는 산이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가장 어렵고 힘든 피치가 있다. 그 지점에서 산은 조그만 움직임도, 아주 작은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다.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가는 선 하나만 있을 뿐인 그곳을 어떻게든 넘어가야 하는 것이다. (109쪽)


랜드가 드뤼에서 고립된 조난자를 구조한 후에는 그 기쁨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언론이 주목은 물론이고 산악계에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랜드는 자신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 세상이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혼자만의 길을 원했다. 스스로 고독을 자처한 젊은 청년은 삶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도무지 잘 모르겠다. 그러기엔 뭔가 부족하다. 랜드에게 산이 왜 유일한지 와닿지 않는다. 거기 산이 있어 오른다는 진부한 설명보다는 절실한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 랜드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소설을 통해서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대학에 실패하고 군대에서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쓸쓸한 낙오자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정착하는 대신 떠돌이처럼 유랑의 삶을 즐기는 방랑자란 표현을 쓸 수도 있다. 그것은 무책임의 다른 말이다. 그가 만나고 관계를 맺은 후 떠나버린 여자들은 마치 하나의 소모품처럼 여겨진다. 왜 떠나야 하는지 그가 산으로 향하는 맹목적인 이유에 대해 단 한 번도 상대에게 진심을 다해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랜드와 마찬가지로 소설 속 랜드가 만나는 등반가들도 비슷하다. 때문에 산은 거대한 남성성을 상징하고 하나의 안전한 도피처로 여겨진다. 물론 도피처에는 위안, 위로, 안식, 휴식의 뜻이 있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산을 찾는 이유처럼 소설 속 랜드도 그 안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등반을 통해 나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174쪽)


『고독한 얼굴』 은 제임스 설터가 실존 인물인 한 산악인에 대해 조사하고 자료를 찾아 읽은 후 완성한 소설이다. 때문에 등반의 고통과 기쁨을 아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고전이나 교과서처럼 생각할지도 모른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등반 과정과 산을 오르는 동안 랜드의 심적 변화에 공감하며 함께 산을 타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을 대하는 숙엄한 분위기나 경건한 태도는 찾을 수 없어 아쉽다. 인간이 지닌 절대적 고독을 랜드를 통해 보여주려는 설터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지만 아름다운 울림으로 기억하기엔 그 파동이 너무 짧고 약하다. 


그럼에도 랜드의 고독과 산을 올랐을 때 그가 맛본 기쁨은 인정한다. 우리가 저마다 삶을 사랑하는 것처럼 랜드는 산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 삶이라는 게 항상 산의 정상인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도 느꼈을 것이다. 삶과 고독은 어디에나 있다. 산의 초입에도 산의 중반에도 산의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그 산을 바라보는 지점에도. 누구나 자신만이 아는 고독과 기쁨이 있으니까. 랜드는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려 했고 설터는 함께 나누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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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은 아직 - ‘처음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 재탄생’ 프로젝트
세오 마이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스토리텔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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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한다. 쉽게 떼어 놓을 수 없는 운명적 관계라는 뜻이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어려운 게 없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뜻대로 커주지 않고 자식은 부모가 너무 자신을 모른다고 여긴다. 처음부터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를 향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서로를 힘들게 하고 다른 방향으로 흐를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5년 만에 처음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오 마이코의 소설 『걸작은 아직』 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25년 만에 처음 만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니. 아이를 잃어버렸거나 입양 보내고 긴 시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만난 감동의 스토리가 아닐까 기대할지도 모른다. 전혀 아니다.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 소설만 쓰는 아버지 가가노와 아들 도모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가가노와 미쓰키는 한 번의 만남으로 도모가 생겼지만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미쓰키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가가노는 양육비를 보내는 조건으로 한 달에 한 장의 사진을 받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까 가가노는 사진으로만 도모를 만났다. 그런 도모가 자신을 찾아왔다.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첫 만남으로도 당황스러운데 도모는 가가노의 집에서 지내겠다고 한다. 근처 편의점에서 일하는 동한 한 달 정도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원고는 메일로 보내고 편집자를 만나는 일도 거의 없는 가가노에게 도모의 방문은 그의 일상을 흔드는 일이 되었다. 가가노와 달리 도모는 거리낌 없이 생활을 이어간다. 출퇴근을 하면서 만든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편의점에서 먹거리를 가지고 와 가가노와 함께 먹는다. 늘 먹던 커피도 도모의 방식은 달랐고 가가노는 어느새 그 맛을 좋아한다. 편의점에서 사 온 음식을 가가노가 사러 나가기에 이른다.


도모는 가가노를 집안이 아닌 밖으로 이끈다. 아주 사소한 커피 주문부터 이웃을 만나고 동네 소식을 듣고 가을 축제에도 참여한다. 도모가 없었더라면 가가노에게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가가노는 조금씩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는 아들 도모가 궁금해진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이, 미쓰키는 한 장의 사진만 보내고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사진 속 이야기를 도모에게 들으면서 가가노는 자신의 부모를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부모, 그 뒤로 연락을 하지 않은 가가노다. 지난 25년 동안 어떻게 아들을 한 번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버지나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가가노 같은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한 사정이 있으니 가가노와 도모는 양호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된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도모는 가가노에게 집으로 돌아간다고 전한다. 가가노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 도모를 붙잡는다. 하지만 정작 도모의 성장과정이나 어머니인 미쓰키에 대한 건 하나도 묻지 못한다. 모두 알고 싶지만 말로 설명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오랫동안 소설 속 대화만 들어왔다. 등장인물들은 쉽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고민을 털어놓고, 빛나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풀이 죽어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슴속에 간직한 진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 마음속 어딘가에 소망. 산다는 건, 나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그런 질문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대화는 더 현실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대화가 겹쳐지면서 그 안에서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더라도 도모가 잘 자랐음을 쉽게 알 수 있듯이. (199~200쪽)


한 달의 시간으로 지난 25년의 시간을 채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통해 가가노와 도모 사이에는 뭔가 생긴 건 맞다. 도모의 방문으로 가가노는 28년 만에 자신의 부모를 찾아 나선다. 가가노는 아버지이자 아들이니까. 가족이라는 건 무엇일까. 단순히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관계는 아닐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응원하고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이라면 괜찮은 가족일까. 


25년 만에 처음 만나는 부자라는 설정은 뭔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기대와는 다르게 소설은 따뜻하고 유쾌한 일상으로 흘러간다. 잔잔하고 평온한 소설은 부모가 된다는 게 무엇이며 어떻게 가족이 탄생하고 만들어지는지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25년 만에 시작된 아버지의 역할, 고독으로 가득했던 어른 가가노가 세상과 소통하는 성장소설이다. 이제 막 부모가 되는 이들에게, 부모로 살면서 여전히 자식이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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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9-19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럭키걸의 세오 마이코네요. 구매각입니다~

자목련 2022-09-20 11:51   좋아요 1 | URL
기억의집 님은 이미 작가의 팬이시군요. 그렇다면 즐겁게 만나실 수 있을 듯해요^^*

mini74 2022-09-19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란 영화제목이 문득 떠오르네요 ~ 25년 만에 시작되는 아버지 역할이라니. 흥미가 생깁니다 *^^*

희망으로 2022-09-19 13:37   좋아요 1 | URL
아....저도 그 영화가 떠올랐어요.
부모와 자식은 참으로 특별한 관계인것 같죠.
어쩌면 여기 알라딘에서도 특별한 친구로 발전된 케이스가 많을것 같습니다^^

자목련 2022-09-20 11:5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아버지라는 주제를 생각하면 그 영화도 비슷합니다. 큰 사건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소설이었어요^^
 
톨락의 아내
토레 렌베르그 지음, 손화수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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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을 가린 덥수룩한 수염, 오뚝한 코, 가늘게 뜬 눈, 표지 속 남자는 분명 ‘톨락’일 것이다.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괴로운 표정을 짓는 이 남자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노르웨이 문학의 거장 토레 렌베르그의 소설 『톨락의 아내』는 제목만 보면 아내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소설을 들여다보면 톨락의 아내 ‘잉에보르그’가 아닌 그녀의 남편 톨락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화자 톨락이 자신의 지난 삶과 실종된 아내 잉에보르그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상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톨락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던 아내는 어디로 사리진 것일까. 소설은 오직 톨락의 시선을 통해 전개된다. 사라진 아내, 아들과 딸, 주변 상인과 이웃은 단역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톨락에 의한 톨락을 위한 톨락의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대 중앙에 덩그러니 앉자 고해성사를 하는 한 남자를 상상하게 된다. 아내가 사라진 후 그의 곁에는 입양한 아이 ‘오도’가 있을 뿐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 오도를 입양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생모로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해 아내에게 동의를 구하고 데려온 정도다. 아내는 오도를 정성으로 대했고 치료를 위해 애를 썼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톨락은 그렇게 믿었으니까. 


톨락은 스스로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임을 인정한다. 도시 외곽의 목재소만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내만 있으면 다 괜찮았다. 톨락이라는 거대하고 단단한 성에 들어와 살 수 있는 이는 잉에보르그, 단 한 사람뿐이다. 시대가 바뀌고 도시로 이사를 가자는 아내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아들과 딸에게도 톨락은 친절하거나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


톨락은 자식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소통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자식들과 자신 사이에 불편함은 잉에보르그가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다 과거일 뿐이다. 아내는 실종되었고 아이들은 성장해서 각자의 삶을 꾸려 톨락의 곁을 떠났다. 오도만이 톨락과 지낼 뿐이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데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스스로와 화해하기 마련이다.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과거에 행했던 모든 일과 과거에 보았던 모든 것과 과거에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차례 눈앞에 스친다. 하나도 빠짐없이, 좋든 싫든, 바로 그때, 우리는 스스로와 화해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지금의 내 모습이다. (55쪽)


톨락은 암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처럼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자식들에게 진실을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톨락이 꺼내려는 진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제목이 말해주는 아내 잉에보르그에 관한 것이리라. 톨락과 잉에보르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독자 역시 가장 궁금해하는 일이다. 물론 이미 톨락의 고백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외통수와 고집불통의 남자, 그를 닮은 아이 오도에 관한 진실까지도 말이다.


톨락은 자신만의 삶을 살았다고 자신할지도 모른다. 친절하고 다정한 잉에보르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자신할 것이다. 그랬기에 오도를 대하는 잉에보르그의 이중적 태도에 그의 행동도 후회가 아닌 사랑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정해놓은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는 남자. 완고하고 억센 가부장적인 아버지, 잉에보르그를 향한 모든 게 사랑이라고 믿는 남자의 치유될 수 없는 고통. 스스로가 부여한 고통을 그는 끝낼 수 있을까. 


『톨락의 아내』가 특별한 점은 실종된 아내를 내세워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와 스릴러 방식을 표방하고 있지만 자전적 소설이자 독백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톨락과 그의 아내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건 하나의 장치에 불과하다. 톨락이란 남자의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는 토레 렌베르그의 문체가 이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감정을 서툴게 내뱉으면서도 단호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객관화시킨 문장은 아름답다. 압축된 세 문장으로 소설의 전부를 보여준다. 이것으로 『톨락의 아내』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내 이름은 톨락. 나는 과거에 속한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 어느 곳과도 걸맞지 않는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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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9-07 16: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교보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얌전하게 내려 놓았습니다.

대신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을 샀네요.

결국 톨락도 읽게 되지 않을
까 싶습니다.

자목련 2022-09-07 16:05   좋아요 2 | URL
이 책, 묘하게 매력적입니다.
보뱅의 <가벼운 마음>을 사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