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가 제철 트리플 14
안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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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 있는 슬픔을 덜어낼 수 있는 가장 큰 그릇은 존재할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슬픔이 다 마르거나 증발해버려서 덜어낼 필요가 없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이 현명하다. 애도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시간은 없다. 일정 기간이 지났다고 해서 상실과 애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들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 안윤의 『방어가 제철』 은 그런 애도의 기록이다. 그래서 수록된 세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은 낯설지 않다. 


우리 생에는 발작처럼 대응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후회를 몰고 온다. 뭔가 나의 잘못으로 기인한 일이 아닐까 싶은 마음과 상대를 향한 애정이 부족했다는 안타까움에 책망의 시간이 시작된다. 화자가 ‘소애’의 생일상을 차리는 장면을 천천히 묘사하면서 그 모든 과정을 ‘은주’ 언니에게 들려주는 형식의 「달밤」 속에서 그녀의 부재를 직감할 수 있다. ‘소애’의 생일과 ‘은주’의 기일이 같은 날이라는 게 애석하지만 누군가 죽는 날 누군가 태어나는 게 삶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은주’의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화자가 수첩에 쓴 것처럼 결국 남겨진 이들의 몫은 살아가는 일이다.


살아 있는,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그렇다고 너무 아끼지도 말고 너무 아까워도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 (「달밤」, 30쪽)


알고 있지만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가는 게 불가항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오빠의 친구인 ‘정오’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방어가 제철」 속 ‘나’가 그러하다. 미대에 가고 싶어 하던 나를 위해,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간 오빠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삼십 대가 된 ‘나’는 지병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반찬가게를 하고 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정오’는 엄마의 죽음을 통해 재회했다. 그리고 방어가 제철인 계절에 둘은 만난다. 오빠 ‘재영’과 ‘정오’, 화자까지 셋이서 하나처럼 지냈던 시절, 이제는 남은 둘이 의식처럼 ‘재영’을 기억한다. 그러나 시시콜콜 일상을 나누면서도 ‘재영’을 언급하는 일은 없다. 서로를 통해 ‘재영’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것을 모른 척 위장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더는 내게 묻지 않는다. 언제부터 묻지 않게 되었는지조차 묻지 않는다. (「방어가 제철」, 70쪽)


「달밤」과 「방어가 제철」이 가까운 이를 애도하는 기록이라면 「만화경」은 우리 주변의 고독사에 대한 애도라 할 수 있다. 이혼 후 한 빌라의 세입자로 들어온 ‘나경’은 집주인 ‘숙분’ 때문에 불편하다. ‘나경’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할머니라 여기고 거리를 두었는데 ‘숙분’의 친구 ‘단심’이 빌라로 이사를 오면서 오해가 풀렸다. ‘나경’이 살던 집의 전 세입자가 혼자 외롭게 생을 마감한 일이 있어 ‘숙분’이 그렇게 살폈던 것이다. ‘미리내’란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녀를 애도한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겼던 사람의 죽음과 그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일상에서 스치듯 그 이름과 마주했을 때 그 이름이 갖는 슬픔까지 마주할 수밖에 없다. 알게 된 이상 그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불행한 사고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이다. 소설은 우리를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차오르는 분노와 함께 신당역 역무원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처럼 저마다 담담하면서도 차분하게 일상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하며 살아가려고 애쓴다. 때로는 그리움에 울부짖고 때로는 부정하며 곁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생활한다. 특정한 물건을 볼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선명하게 확보된 부재에 절망한다. 하나같이 차분한 안윤의 소설은 에세이까지 한결같다. 나는 소설보다 에세이에 마음이 기운다. 애도는 구멍이 뚫린 가슴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지는 구멍을 그저 내버려 두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없이 쓸쓸하고도 다정한 애도가 나를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온다.


당신에게는 더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서서히 멀어졌거나 뒤돌아 떠났거나,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이름들. 대답을 들을 수 없다고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주 그 이름들을 부른다. 묵독을 할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을 때처럼 호명한다. 그 이름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지만 당신은 선명하게 듣는다. 고유한 말투, 희미한 미소, 가만가만히 고갯짓을 본다. 때때로 그 이름들이 당신들의 일상에 출몰하기도 한다. (「없는 것들이 있는 자리」,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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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23 1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없이 쓸끌하고 다정한 애도가 나를 떠난 이들의 이름을 불러온다. ㅠㅠ 자목련님이 소개해주시는 책내용도 좋지만 자목련님이 쓰신 문장에 눈시울이 붉어지네요. 쓸쓸하고 다정한 이름들을 가끔 꺼내보고 쓰다듬으며 그렇게 사는거겠지요.

자목련 2022-09-25 15:39   좋아요 2 | URL
나도 어떤 이들에게 그런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미니 님, 맑고 빛나는 오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9-24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어회 맛있지...
하고 보다가, 다시 방어가 제철이란 제목에 쓸쓸함으로 다가오네요

자목련 2022-09-25 15:38   좋아요 2 | URL
전체적으로 쓸쓸한 소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쓸쓸함이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님, 맛있는 가을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