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결한 두 심장
고결한 두 심장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할 때
그들의 사랑은 죽음 자체보다 강하다네
우리가 흩뿌린 추억 우리가 주워 모으세
서로 사랑한다면 당장 곁에 없음이 무슨 문제이랴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처음 읽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온 우주를 뒤감는다고 생각하고 젊은 연인의 사랑이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던 순진하던 그때의 그 시절, 그리고 누군가 그리워 몸부림치고 뜨겁게 열망하던 날들이 있었던 그 어느 때가 생각나기도 한다.
100여년전의 젊은 시인의 사랑과 욕망이 고스란히 담긴 시집이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들에게 한번도 들어보지, 아니 받아보지 못한 사랑의 편지, 싯구들은 나를 은근 부럽게 만든다.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보면 한 남자의 욕정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을정도로 관능적인 싯구들이 많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은밀하고 황홀한 밀어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폴리네르와 루의 비밀편지를 몰래 엿보는 느낌이다. 사랑하는 남녀의 가슴 뜨거운 편지가 한 편의 시집으로 탄생한 것이다.
아폴리네르가 루이즈 드 콜리니샤티용이라는 여인에게 한 눈에 반하여 프로포즈한다. 그녀는 그 시대에 생각하기 어려운 팜므파탈이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결혼초 이혼을 경험한 그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아폴리네르를 외면하던 그녀가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아폴리네르를 찾아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고 다시 그를 떠나고 심지어 다른 애인까지 두고 있었단다. 그래도 아폴리네르의 사랑은 그녀만을 향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녀에게 보낸 1년여의 편지 2백여통이 시집 한 권으로 100여년이 지난 내 손 안에 와 있고, 난 그것을 읽고, 그들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내 사랑의 그림자를 나 또한 추억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밤이 새도록
밤이
새도록
기는
물고 늘어진다
천하가
루인
꿈을
전쟁 중이지만
기는
전쟁 생각 없다
밤은
별빛 찬란하고 밀짚에는 금빛 감돈다
사내는 흠모하는 여인 생각 골똘하다
1915년 4월 27일 밤
예쁘고 별나고 사랑스러운 사람아(p.139)라고 누군가 불러준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야말로 행복해하지 않을까.
오 루 내 사랑/ 요술을 부리자꾸나/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오묘하게/ 순결하게(p/118)라고 말하는 시인의 마음은 욕정으로 들끓는 수컷의 본능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 잔인하여라 독수리의 심장을 가진 종다리여/ 순진한 시인에게 그대는 또 거짓말을 하는구나/ 황혼녘 숲의 신음 소리를 나는 귀담아 듣는다네/ 그 길로 떠난 백작부인 얼마 후 다시 나타나 말했지/ 시인아 내겐 또 다른 사랑 있으니 나를 숭배만 할지어다/(p.109) 잔인한 루라는 생각을 잠시했다. 그녀는 아폴리네르를 사랑은 했던 걸까? 그 시대에 정말 보기 드문 팜므파탈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자신을 향해 있는 한 남자의 사랑을 지배할 줄 아는 놀라운 여자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슬퍼한다 생각지 말라 풀 죽었다 생각지 말라/ 네가 암만 그래도 세상이 암만 그래도 나는 장밋빛 인생을 본다/(p.101)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을 온전히 받지 못한다고 해도 행복을 꿈꾸는 시인의 마음을 본다.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으나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도 그리워하는 여인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장미빛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보초를 서며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의 루/ 저 위 별들의 반짝임 속에 너의 눈빛이 도사린다/ 하늘 전체가 너의 몸이다 내 거창한 욕망을 수태한 (중략)/ 사랑이여 그대는 부재가 무엇인지 모른다/ 부재를 죽음으로 아는 사람이 있음을 그대는 모른다/ 시시각각 괴로움이 끝없이 증가한다/ 날이 저물면 괴롭기 시작해서 밤과 더불어 다시 아픔이다// 나는 추억 속에서 희망한다 오 내 사랑아/ 추억은 젊어지게 한다 스스로를 지움으로써 아름답게 한다/ 그대는 늙어 갈 것이다 사랑이여 언젠가는 늙어 갈 것이다(생략) (p.76) 보초를 서며 사랑을 그리워하는 시인, 그를 애타게 만든 그녀가 나도 모르게 얄밉단 생각까지, 그래도 시인은 사랑의 편지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아름답게 읽은 부분은 '추억 속에서 희망한다, 추억은 젊어지게 한다, 스스로를 지움으로써 아름답게 한다'이다. 내가 '루'였다면 나는 아마도 이 시인을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매일 밤 그를 생각하고, 그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애태우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하지만 루는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었나보다. 시인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어느 때는 사랑에 목말라 애태우게 했으니 말이다.
야영지 모닥불
야영지 흔들리는 모닥불이
꿈의 형상들을 비추네
뒤엉킨 나뭇가지들 속
몽환이 천천히 올라가네
이제야 한심해하는 회한은
딸기처럼 온통 흠집투성이
추억과 비밀에서
남은 것은 오직 숯덩이
추억과 비밀에서 남은 것은 오직 숯덩이, 한참 타오른 나무장작이 숯이 된다. 불꽃은 높이 오르지만 그을음은 어쩌지 못한다. 나무장작보다 더 오래 은근하게 타오르지만 그을음은 없다. 시인의 사랑은 숯덩이가 되었지만 결국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젊은 연인들에게는 유용한 시가 될 것 같다. 물론 나같은 아줌마에게도 유용하다. 사랑한다는 감정이 이제는 가족들에게 향해 있지만 어느 날엔가는 한 남자만을 향해 있었고, 그게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날엔 나도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도 나를 사랑했던 한 여인이었다는 추억에 잠길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