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하는 골짜기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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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을 읽었다. <사평역>이라는 작품을 읽고 임철우 작가에게 반했던 오래전 기억을 꺼낸다. 소설 <사평역>을 먼저 읽고 나중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를 읽었다.  그때의 묘한 감정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別於谷,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퍽도 애잔한 이름을 지닌 산골 역.(p.12)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시인을 꿈꾸는 역무원 정동수, 비극적 운명의 끈을 놓치 못하는 신 씨, 일제시대 위안부로 황폐해진 전순례 할머니, 스러져가는 역사 앞에 제과점을 차린 양순지. 그들의 이야기는 별어곡이라는 역 이름만큼이나 애잔하다. 

사연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구구절절한 사연에 숨 쉬기가 쉽지 않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밖에 모르던 정동수, 숨을 거두며 어머니가 그를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 사연을 듣는다. 아버지를 끝내 미워하고 증오했던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에 동수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원하지 않는 자식을 열달을 품어 낳고 그가 자라는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일때마다 아버지를 미워하듯 그를 미워했다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사랑받지 못한 그가 어머니를 향해 아니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소리가 내게 들리는 듯 했다.  

그런 그의 진실은 거짓이라고 그의 아버지는 자신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양순지. 그의 영혼때문에 자신은 끝내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믿는 그녀, 그녀가 별어곡으로 들어온 사연 또한 운명이었는지 모르겠다. 조용한 소도시에 제과점을 차리고, 아침마다 빵과 쿠키를 굽고, 실내엔 늘 음악이 흐르게 하고, 틈틈이 창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스케치북을 펴놓고 연필화를 연습해 보는생활(p.270)을 꿈꾸던 그녀가 어느날 별어곡에 제과점을 차리고 빵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 저편 어린 시절 산 속에서 만났던 정일병을 떠올리고, 정동수를 보며 그의 아들일 거라고 직감한다. 그녀가 믿는 그것이 진실일 수도 혹은 거짓일 수도 있다. 다만, 그녀의 아버지가 교통하고로 반신불구가 되고, 어느날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그녀 혼자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고, 실업고를 졸업하고 부진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사장의 노리개가 되고, 임신 사실을 반기기는 커녕 수술을 권하고, 이틀 뒤 부도 난 사업체를 버리고 사장은 사라지고, 막상 낳은 아이는 심장 기형으로 인큐베이터에서 숨을 거둔다.  

어떤 사람의 절절한 사연의 무게를 가늠할 수는 없다. 누가 더 힘들었고, 누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비극적 운명의 끈을 놓치 못하는 신씨의 사연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흔히 나쁜 일은 어떤 순리에 의해 찾아오는 듯, 근무해야할 시간이 아닌 시간 근무를 하게 되고, 그가 근무하던 그 시간 열차 사고로 젊은 남자가 죽게 되고, 그 남자의 장례식장을 찾은 곳에서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을 보게 된다. 그 후 별어곡으로 흘러들어온 추레한 모녀를 그가 발견하게 되고, 그때 그 남자의 아내와 딸임을 알게 되고, 평생 혼자 살겠다고 6.25 전쟁통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먼저 보내고, 홀어머니마저 세상을 버렸을때 그는 평생 가족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런 그가 애 딸린 젊은 과부를 책임지기로 한다. 그는 아내에게 비밀스러워야만 했고, 절대 아내에게 알려지지 말아야할 이야기를 부둥켜 안고 숨가쁘게 살았다. 소유와 집착의 광기에 휩싸여 애지중지하던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끝내 비밀을 알게 된 아내는 자살을 하고, 딸은 그를 죽이겠다고 반드시 그녀 손으로 죽이겠다는 저주를 퍼붓고 사라졌다. 가슴 졸이며 살았던 그는 심장병으로 고통받는다. 그나마 그에게는 아버지의 정을 그리워하는 사위가 있어 다행스러웠지만,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했을 것 같다. 

치매에 걸린 70대의 할머니가 무거운 가방을 끌고 동네를 어슬렁거린다고 생각해본다. 그 할머니의 사연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동네를 저벅거리며 찾아가는 별어곡역, 100원짜리 동전을 내밀고 표를 받아드는 할머니 전순례. 우리가 기억해야만하는 역사의 피해자, 가녀린 그녀, 짓밟혀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끝내 살아준 그녀에게 먼저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전순례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숨을 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전쟁의 피해자는 늘 어린이와 여자라고 했던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가난한 농촌의 딸, 아직 달거리도 시작하지 않은 그녀는 단돈 350원에 팔려갔다. 중국의 방직공장에 취직시켜 준다고 하얀 쌀밥을 매일 먹게 해준다는 말에 늘 배고프던 그녀도 흔들렸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남자를 받아야내야했던 그녀를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나는 개다. 소다. 닭이다. 고양이다'라고 자기를 동물이라고 주문을 거는 그녀, 머리채를 잡히고 두들겨 맞아 뼈가 으스러지고, 매독에 걸려 독한 주사를 맞고, 온종일 피를 쏟아내도 멈추지 않는 짐승들의 광기를 고스란히 이겨낸 그녀를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흐른다. 그 험한 곳에서도 마음을 주고 받던 오빠같은 남자 하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위로가 아니다. 1945년 광복이 되고 위안부를 떠나 남으로 내려오는 여정에서 만난 처참한 죽음들, 일본군에 못지 않은 소련군의 횡포, 공포스러운 날들을 정말이지 어찌 보냈을까 싶다. 죽어가던 그녀를 살린 소달섭씨, 그녀와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도 낳았는데 1950년 전쟁을 맞는다. 남편은 징집되고, 어린 아이와 피난길에 나선 그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그녀의 젖은 마르고, 아이의 몸도 차갑게 식었다. 이런 상황에 온 정신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지옥같은 삶을 살게 된 그녀의 삶을 뭐라고 위로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간신히 찾아간 고향, 가족들은 빨치산이 된 장남때문에 몰살당하고, 그나마 남은 피붙이 조카를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전순례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내내 가슴 한켠이 휑했다. 눈물은 끊임없이 흘렀다. 

   
 

  "가만, 저게 누구지?"
  저만치 노파 바로 앞에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 첫눈에도 옷차림이 무척 희한하다. 무릎 높이의 검정 치마에 샛노란 한복 저고리. 요즘도 저런 옷이 남아 있었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필시 앳된 소녀인 성싶다. 생뚱맞은 단발머리에 검정 고무신, 게다가 놀랍게도 소녀는 양말도 신지 않은 맨살 종아리 그대로다. 세상에, 이런 지독한 추위에 맨발이라니! 누굴까? 저 이상한 여자애가 언제 불쑥 나타났을까?
  동수는 홀린 듯이 그 자리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 소녀는 노파의 바로 두어 걸음 앞에서 춤을 추듯 깡충깡충 뛰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노파와의 거리는 여전히 그대로다. 샛노란 저고리 소매와 옷고름이 팔랑거린다. 한겨울 눈밭 위, 소녀의 모습은 난데없는 한 마리 노랑나비처럼 화사하다. 그 사이 소녀와 노파의 뒷모습이 길모퉁이로 사라졌다. 동수는 잰걸음으로 급히 모퉁이를 돌아선다.(147쪽~148쪽)

 
   
 
임철우 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웃음이 머금어진다. 결이 참 고운 분이시다. 인자하시고, 버릇없는 학생들에게도 성을 내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며 성정이 고운 분이라는 걸 언제나 느꼈다. 잔인하게 슬픈 이야기를 세밀하게 쓰셨지만 마치 한편의 시를 읽는 듯, 어느 한 문장 버릴 것이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별어곡 사람들의 슬픈 사연에 가슴이 서늘해지긴 했지만 소설 속 팔랑거리는 나비들을 생각할때면 마음 한켠에 봄이 오는 것 같았다. 연약하지만 꽃을 찾아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를 가진 나비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동수, 신씨, 전순례 할머니, 양순지. 그들의 곁에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참으로 비정한 세상이지 뭔가. 빠른 것, 새것은 무조건 선이고, 느리고 오래된 건 모조리 악이 되고 말아. 이런 간이역들은 이 땅에서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철도 공무원 36년에 수만은 역을 돌아다녔네마, 어째선지 난 이 도토리 깍지만 한 역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네."(308쪽)  
   
 
신씨의 입을 빌려 선생님은 말한다. 참으로 비정한 세상이라고, 빠른 것, 새것은 선이고, 느리고 오래된 것은 악이 되고 마는 세상이라고 말이다. 
   
 
   '별어곡(別於谷)' 
  도토리 깍지만 한 역사 지붕에 걸린 그 낡은 간판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역 건물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합판으로 못질 된 창문들, 칠 벗겨진 벽체와 지붕, 잡초 무성한 화단.....그날 먼지 수북한 대합실 나무 의자에 나는 한참을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날 밤, 꿈속에 그 간이역이 다시 보였다. 역사는 말쑥한 모습이었고, 대합실엔 흰옷 입은 낯선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를 기억해줘."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그 버려진 역이 나한테 말을 걸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그 간이역이다.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애틋한 이름을 지니고 태어나쓰나, 이젠 모두에게 잊힌 채 홀로 흔적 없이 스러져가고 있는......(작가의 말중)
 
   

 다시 선생님을 뵙고 싶단 생각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잊고 살아가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기억 저편 아스라히 사라져가는 것들, 이제는 사라진 간이역, 역사의 피해자 정신대 할머니들, 워낙 고령이라 죽음 가까이 다가서신 분들, 죽음만이 아니라 기억조차 혼미해진 그분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빠르게 살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들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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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2-1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한편의 에세이같은 리뷰를 읽었네요.

음악 틀어놓고, 처음 올려주신 사평역이라는 시를 가만가만 되뇌어봅니다.
침묵하는 때,,,,, 목감기로 목이 계속 타들어가는 지금, 멍하니 그렇게 침묵해야 하는 때.
아직 감기가 낫지 않은걸까요, 감기란 놈은 사람의 무기력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바이러스인걸까요.

산골의 기차역, 톱밥 난로, 예쁜 심상.
꿈섬님... 좋은 하루되세요.

꿈꾸는섬 2011-02-10 12:03   좋아요 0 | URL
곽재구 시인의 시와 임철우 작가의 소설에 빠져 살던 때가 문득 떠오르네요.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시인도 소설가도 어쩜 이리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는지 감탄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소설도 뒤적여봐야겠어요.

양철나무꾼 2011-02-11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글 넘 좋아요.
님의 글이 한편의 산문시 같은걸요.
시와 소설과 산문의 멋진 조화.

아사다 지로도 생각나는 것이요~^^

꿈꾸는섬 2011-02-11 20:37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의 칭찬에 부끄러워하고 있어요.ㅎㅎ

아사다 지로의 소설은 읽어보질 못했어요. 영화 철도원 원작자라고만 알고 있지요. 광범위하 지식의 소유자 나무꾼님 정말 대단하세요.^^ 아사다 지로의 소설도 언젠가 찾아 읽어야겠어요.^^

아이리시스 2011-02-11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죠, 이 책,
언젠가 다시 읽어야지 하고 있는 참인데,
오늘 KTX가 탈선했어요, 흑흑.
낭만기차가 너무 빨리빨리 달리려고만 해서 천천히 가라는 메시지인지 원,,
인명피해 없는 게 다행이예요, 그래도 손해야 이쪽저쪽 이만저만이 아니지만요.

시 너무 좋아요. 저도 <사평역에서> 참 좋아하는데..^^

꿈꾸는섬 2011-02-11 20:35   좋아요 0 | URL
너무 좋아 점 찍어둔 책이었죠. 사실 임철우 작가님을 흠모한답니다.
아이리시스님 서재에서 리뷰보고 역시 너무 좋다고 생각했었어요. 땡스투도 제가 보냈는데 ㅎㅎ

너무 빠른 것에 익숙한 우리들이에요. 조금 천천히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아요.

소설 <사평역>이 <사평역에서>를 읽고 너무 좋아 쓰신거래요. 근데, 정말 좋죠. 시골 간이역의 정겨운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하잖아요. 시도 좋고, 소설도 정말 좋아요.^^

아이리시스 2011-02-11 21:4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땡쓰, 미투. 아하하.
저는 아직도 가끔 땡쓰투 적립금 보면 너무 신기해요. 감사할 따름이구요.

그럼 꿈섬님이 너무 좋아하시는 <사평역>에서를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저는 본 게 이것 뿐이라서 꿈섬님이 예전부터 좋다고 하신 거 관심 있었어요.
예전에 제 리뷰 읽어주셨잖아요.^^

꿈꾸는섬 2011-02-11 23:00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리뷰 참 잘 쓰신단 생각 종종해요.
20대 청춘이라기엔 생각도 넓고 깊은 게 느껴지구요.
<사평역>, 아직 안 읽으셨다면 꼭 읽어보시길, 너무 좋아요.^^
지금도 아이리시스님 리뷰 열심히 본답니다. 댓글을 안 달때가 많아서 그렇지요.ㅎㅎ 댓글을 열심히 달도록 노력할게요.^^

아이리시스 2011-02-12 19:14   좋아요 0 | URL
넵. <사평역>에서 찾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