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여름에, 만났던, 그분이, 생각나는 밤이다.
외로워도 외롭다고 말해보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다. 외롭다고 말하면 그 외로움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외로움에 매달려 살아야할 것 같아 두려워하던 날들이었다.
매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르던 ㄴ카페, 시원한 맥주로 시린 가슴을 달래고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날들을 보냈었다.
늘 다니던 카페에서 만나게 되었던 그분, 스스럼없이 친하게 되었었다. 나보다 무려 14살이나 많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언니들과 함께 들러 음악 듣고 춤도 추고 술 마시고 그랬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딘가에 구속되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겐 단골카페였던 그곳이 그들에겐 처음 방문하던 곳이었고, 그렇게 그들도 단골이 되어갔다. 그렇게 나도 그들과 친숙한 관계가 되었다. 다만 그 카페를 좋아하던 사람으로서 말이다. 같은 공간과 같은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동질감 같은 유대감이 어느새 우리들에게도 생겼었다.
내가 다니던 그 카페에는 단골들만 왔었다. 우연히 찾은 그곳에 반해 다시는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그런 곳이었는데 주인 아저씨의 LP가 한몫했던 것 같다. 낡은 테이블에 불편한 의자, 삐걱 거리던 마루바닥 소리, 은은하게 불 밝히던 촛불, 그곳은 우리들 추억이 깃들인 놀이터가 되었다. 그네도 시소도 미끄럼틀도 없었지만 우린 그곳을 너무 좋아해서 떠날 수 없었다.
가끔 마음 울적해하던 나를 위해 강바람을 쐬어주던 그분이 사주던 맥주는 언제나 달콤쌉싸르했다. 보통때의 맥주 맛과 분명 달랐다. 하지만 나는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몰랐다.
손 한번 잡아본적 없으니 당연히 어깨에 기대어 본적도 없었고 말해 무엇할까마는 키스조차해본적이 없는 사람과 사랑을 했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한동안 놀이터를 잊고 바쁘게 살아가다 눈이 오던 겨울 우연히 지나던 그 길에 다시 찾았던 카페, 그곳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주인 아저씨가 많이 아파 후배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고, 주인의 분위기가 바뀐 탓에 그곳은 예전의 나의 놀이터가 될 수 없었고, 그곳을 다녀가는 사람들조차 바뀌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었다.
그리고 봄이 오고, 여전히 걸려 있는 간판을 보는 것만으로 나의 이십대를 추억하며 지나다니다가 다시 들른 카페, 주인 아저씨가 다시 돌아와 있었고, 다시 예전의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들도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분과 함께 처음 카페를 찾았던 여자분이 계셨다.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이 된 나를 향해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맥주 한잔 마시고 일어서려는 내게 그녀가 불쑥,
"00아저씨, 자기 참 많이 보고 싶어했어. 마지막 가는 길에 자기 얼굴이라도, 목소리라도,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잡고 싶다고 했어."
그 해 가을 그분의 소식 한번 접하지 못한 채, 그분은 떠났다. 폐암말기 선고를 받았었고, 고통속에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다른 가족들도 없던 그의 곁엔 카페에 함께했던 친구들이 끝까지 지켰었단다.
그곳을 그렇게 떠나는게 아니었단 생각을 했다. 서로의 연락처를 알았지만 따로 연락을 해서 만난적이 한번도 없었다. 매일 들르는 카페에서 매일 그렇게 만났었으니 따로 연락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난 사람은 나였다. 그분이 나를 기다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냥 그렇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내가 힘들때, 내가 지쳤을때, 옆에서 위로가 되어주던 그분을 나는 사실 지금도 잊고 살고 있다. 그런데 아주 예기치않게 불쑥 생각이 날때가 있다. 한밤에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말이다.
그 뒤로 난 그곳을 다시 찾은 적이 없다. 두려웠다. 그분에 대한 나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보니 생각나는게 있다. 8월 중순, 한통의 전화가 왔다. 너무 보고 싶다고 당장 와달라는 전화였다. 내가 그 전화를 받던 그때, 나는, 남해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올라타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남해 금산을 보러 가야겠다고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고 있었다. 남해에 있는 동안 전화기는 off상태였다. 나의 여행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남해를 둘러보고 해남으로 가서 보길도에 들어갔다 완도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긴 여행이었다. 그 여행을 다녀온뒤 카페를 찾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늘 예기치않게 다가온다. 나는 정말 몰랐을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나는 모르는척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그분의 자유로운 영혼을 감당하기에 나는 너무도 부족했으니까 말이다.
지금에야, 입으로 내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저 세상에선 편안하시길......
다락방님께 이 책을 받았었다. 아직 읽어보질 못했다. 사실 이 책을 받아들고부터 나의 말하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생각이 났던 것 같다. 그 카페의 단골이었던 우리 몇몇만이 아는 그런 이야기다. 내 주변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인셈이다. 한번도 누군가에게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적이 없다. 할 수가 없었다. 그분이 내게 주었던 사랑을 나는 정말 모른척 했던 것 같다. 나의 철없는 이기심이 너무 슬프고 속상하고 안타까워 누구에게 토로할 수 없던 이야기들이었다.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 내게도 아픔이다.
함께 들었던 노래, 함께 추었던 춤, 함께 마셨던 술......아직도 그대로 추억할 수 있다는게 가슴 아프다.
조만간 이 책을 열어봐야겠다. 말하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