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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오정희 소설의 매력은 매끈한 문체와 현실 속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탁월한 것이 아닐까한다. 읽는내내 내가 마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까지 불러 일으킬정도로 인물들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소설 속으로 나를 깊이 끌어당긴다.
또 한가지 오정희 소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라면 술술 읽어 내려가다가 극적인 반전을 맞이하는 결말을 갖는다는 것일게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현실 이면의 적나라한 진실을 결말로 마주하게 될때의 허무함은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도 하지만 또다른 통쾌함을 느끼게도 한다.
<가을 여자>에 담긴 몇편의 기억나는 단편은,
<그 가을의 사랑> 속 그녀는 젊은 나이 미망인이 되고 3년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아이들이 날마다 함께 노는 젊은 청년을 어느날 보게 되고 외롭게 살아오던 3년 세월을 되돌아 본다. 그리고 청년을 위해 스웨터를 완성하고 그를 찾아 나서는데......'자혜정신요양원' 망상증을 앓고 있는 청년이었다.
<첫눈 오던 날>의 그녀는 도서관 사서 노처녀, '한때 모든 여자들이 한번씩 꿈꾸어보기 마련인 독신생활을 그리'곤 했지만 쉰살의 독신녀 사서주임을 만나고부터 독신자의 꿈을 버렸다. 눈 내리는 주말 집으로 일찍 들어가기 싫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공짜로 생긴 음악회 표를 생각하고 춥고 초라한 음악회를 간다. '거리에 나서서 나는 값싸게 취급받고 모욕당한 기분이었'단다. 위로받고 싶어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맥주 한병을 시키고, 청년 하나가 '젊은 여자가 고독한 분위기를 갖는 것은 쉽지 않'다며 다가온다. 그리고는 애인과의 이별 얘기 등을 나누다보니 술을 꽤나 마셨다. 그리고는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보여달라며 자기 새끼손가락에 끼워보고는 농을 지껄인다. 취기가 주는 나른함, 해방감 따위에 자신을 맡기며 문득 돌아갈 시간이 되어 화장실을 다녀온다. 자리에 돌아왔을 때 남자는 사라졌다. 황당한 금액의 계산서를 내미는 웨이터와 자신의 손으로 돌아오지 않은 반지의 빈 손가락만이 남았다.
<비 오는 날의 펜팔> 비 오는 날 노점상에서 산 우산이 사나운 바람과 빗줄기를 견디지 못해 뒤집히고 살대가 부러져 비를 온통 맞게 되고 비를 잠시 피하려고 길 옆의 건물로 들어간다. 찻집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려다 물이 뚝뚝 흘러 염치없어 서성이는데 찻집 문이 열리고 서너 명의 여자들이 나온다. 흘낏 스친 인상으로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던가 빌딩 입구까지 갔다 걸음을 되돌려 와 그를 알아본다. 이십 년이 지난 수줍고 곱던 소녀를 떠올린다. 펜팔 친구로 어느 여름 그녀가 그를 찾아온다. 사진보다 더 예쁘고, 체격도 태도도 나무랄데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돌아설 수 밖에 없던 사연은 다름 아닌 풀숲에서 똥을 짚었던 것, 선창의 기름 뜬 물에 손을 씻으며 낯선 언덕에 남겨진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헌데 그녀을 다시 만났다. 새로운 운명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부질없고 아련한 감상과 공상에 빠져드는 그의 귓가에 "허 선생님 보험 든 거 있으세요?......" 그의 무위한 공상과 감상에 찬물을 끼얹어 현실로 돌려놓고 그 옛날 똥을 만졌을 떄의 그 부끄러움과 배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멋 또는 존재증명> 경진이라는 친구가 실연을 당했다. 꽉 찬 서른 살 나이의 실연은 끔찍한 사건이다. 당사자는 너무도 담담하다. 늘 곱게 차려 입고 정성들여 화장을 하는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초주검이 되어 있거나 초췌하고 형편없는 모습을 생각했던 그녀의 기대와 달리 경진은 한껏 절제한 모양으로 우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난다. 어디에도 버림받은 여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제발 겉멋 좀 그만 부려. 네가 이따위 폼만 잡고 있으니 그 꼴로 당하는 거야. 좀 솔직해질 수 없니?" "사랑에 배신 같은 게 있을까? 사람의 정이란 흐르는 물 같은 게고......인연이 생기면 다할 때도 있는 법이고......" "......삼류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냐? 게다가 꽃다발은 다 뭐야? 구역질난다. 영재 씨가 아니라 네게. 그 겉멋과 허영심이 널 망치는 거야. 이 비본질적인 멋에서 떠나 진정한 삶의 자리로 와야 해." "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안다면......난 고아원에서 자랐어. ...... 너는 겉멋이니 비본질적이니 하지만, 그 멋부림으로 자신의 남루하고 열악한 삶의 조건들을 깁고 메우고 다스려가지 ㅇ낳았다면 나는 아마 되는 대로 팽개쳐졌을 거야. 나는 뒤틀리고 거친 삶 속에서 참 반듯하게 살고 싶어 구긴 옷을 정성껏 다리고 공들여 화장하면서 내 삶도 이렇게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바랐어. ...... 네가 보기엔 구역질나는 겉멋이어도 내겐 처철한 생존방식이고 존재증명인 셈이야."
<어떤 자원 봉사> 이 소설은 정말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아파트 위층에 사는 형제가 날마다 그녀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다. 자식을 둔 엄마로서 남의 자식이라고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인데, 그 형제의 엄마는 자원 봉사로 바쁘다. 어느날 그 두 형제까지 데리고 대공원을 간다. 그곳에서 한녀석을 잃어버리고 그 녀석을 찾는 안내 방송을 부탁하는데, 아이를 찾는 안내 방송이 흘러 나오고, 안내방송을 하는 그녀가 바로 그 잃어버린 아이의 엄마다.
<방생> 스물아홉 나이에 미망인이 된 그녀, 남편 묘소에 성묘를 하고 오고, 역시 젊어 홀로 된 어머니가 함께 왔다.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을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물건을 모조리 엿장수에게 넘기고 강냉이와 엿으로 바꾸었다. 그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친척들은 어머니를 향해 모질고 독한 여자라고 머리를 흔들고 어머니는 그 후 아버지 이야기를 입에 올린 적도 눈물을 보인적도 없다. 성묘를 하고 내려오는데 플라스틱 함지에 잉어 세 마리가 담겨 있고 어머니는 그걸 사신다. 비싼 값에 그걸 사들고 가는 어머니가 딸은 못마땅하다. 어머니는 인적 없는 곳에 이르러 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잉어를 조심스럽게 놓아준다. "어리석게 낚시꾼의 미끼에 걸려들지 말고 멀리멀리 가거라." 마치 산 사람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며 어머니는 내게 특별히 들으라는 빛도 없이 중얼거렸다. ......우리 같은 아낙네야 생사의 깊은 이치를 어찌 알겠느냐만 돌아간 네 아버지 생각이 견딜 수 없이 간절해질 때마다 이렇게 죽을 목숨 살리는 일로 마음을 다래왔지. 단지 자기 마음의 위안이겟지만 사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것밖에 더 있겠니.......
<긴 오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은자의 시어머니에 대한 스트레스나 불만은 꼭 내 얘기인 것만 같아서 솔직히 좀 오싹했다. 밥투정도 잘 하시고 입에 달고 맛있는 것만 찾으시는 시어머니가 꼭 우리 어머니같아서였다. 친척의 결혼으로 사나흘 집을 비우시게 된 시어머니, 그 틈에 집안 정리를 다시 하고 시어머니 재봉틀을 어머니 방으로 들여놓으려다 빈방 서랍장에서 발견하게 된 망부의 시계, 그리고 몇장의 사진 속에 존재하는 은자 부부와 그 아이, 부끄러운 행동을 통해 자신과 시어머니의 삶을 다시 생각하는 가슴 시린 소설이었다.
<건망증> 남편 몰래 계를 부어 천만원을 모은 아내, 그 돈으로 분양 신청을 넣으려고 은행에 앉아 예금 청구서를 작성한다. 비밀번호가 틀려서 돈을 찾지 못하는 우스운 이야기였는데, 사실 요샌 비밀번호 몰라도 본인확인만 되면 비밀번호 바꿔서 돈을 찾을 수 있으니 이 소설은 정말 오래전에 쓰신 것이리란 생각에 잠깐 웃음을 흘렸다.
<독립선언> 마흔이라는 나이를 코앞에 두고, '독립선언'을 외친 친구가 있다면 우린 어떤 상상을 하게 될까? 소설 속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그녀가 결국엔 이혼을 결정했다고 생각했다. 워낙 사는게 팍팍하고 남편이 빈둥거렸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냐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녀의 독립은 함께 동업으로 운영하던 의상실을 업고 분식집을 차렸다는 것, 정말 유쾌했다.
<서정시대> 어느날 문득 소쩍새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감상어린 추억들이 하나 둘 생각난다. 까마득히 오래전 고등학교 국어시간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이라는 옛시를 떠올린다. 짝사랑의 열병을 앍던 시절, 절절한 그리움으로 혼자 읊조리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시구, '젊은 날 함부로 쏘아버린 화살을 찾아 풀숲을 헤맨다'라는 구절이 느닷없이 튀어나놔 쓸쓸해지기도 한다. 나이든 아내를 향해 '지금은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라는 구절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라는 구절도 떠오른다. 집을 향해 가까워지는 소쩍새 울음 소리가 그의 향수를 자극했던 것인데......"쓰레기차가 이제야 오네. 여보, 쓰레기통 좀 골목 밖으로 내다줘요."
내가 좋아하는 오정희 소설은 <유년의 뜰> <바람의 넋> <새>, 특히 <새>는 2003년에 독일에서 변역 출간되어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 한국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랜만에 오정희 작가의 소설을 받아 들고 너무 신이나서 읽었다. 사람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탁월하면서 술술 잘도 읽히는 책이다. 이 가을, <가을 여자>를 만나는 사람들 모두 <가을 여자>의 매력에 빠져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