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완벽한 2개국어 사용자의 죽음
토마 귄지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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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이전 작품을 재미있게 읽어 그의 다른 소설이 나오길 기다리던 차였다. 소설집『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에서 그가 보여준 인간, 무기력하고 자기중심적인 남자들의 캐릭터는 유난히 독특하여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나' 역시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한편으론 어이 없는 웃음이 나오고 또 한편으론 이 불쌍한 중생을 어찌하면 좋을까 동정마저 들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든 사건의 배경에는 부조리한 현실과 자본주의의 거대한 돈줄이 얽히고섥혀 힘없는 평범한(!) 인간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지만 말이다.  

이야기는 1978년 3월,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그날을 중심으로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던 한 남자 '나'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나'는 깨어났으나 그 사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한다. 말도 한마디 못하고 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면서도 그를 대하는 간병인이나 간호사들의 태도에서 의문을 갖는다. 저들이 왜 '나'에게 저토록 악의를 가지는가, 도대체 '나'가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또 '나'는 왜 여기 친구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 이곳에 누워 있는 것일까? 이쯤되면 독자도 1978년 3월 그곳에선 어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추리 소설이 아님에도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토마 귄지그는 그 사건을 향해 '나'가 하나하나 기억을 되찾는 과정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보여준다. '나'가 왜 그곳에 누워있는지는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알아낼 수 없다. 어렴풋한 짐작조차 힘들다.   

또한 '나'의 과거 속에 등장하는 '나'가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보너스와도 같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는 자신들만의 이야기는 '나'와 연결되어 스토리를 풍부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나'와 함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돈줄에 얽혀 상처 입고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제 두 번째로 만나는 저 먼 나라 벨기에의 작가지만 그가 써내려가는 문체에선 지금 살아가는 현실의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본주의의 부조리함을 알게 한다. 또한 그 부조리한 폭력에 맞서지 못하고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인간들을 내세워 지금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가 병원을 나가며 내뱉는 말은 현실을 도피하고 자기 합리화를 해버리고자 하는 서글프고 비열한 모습을 보여주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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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쟁이, 루쉰
왕시룽 엮음, 김태성 옮김 / 일빛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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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을 아시나요? 네, 맞아요. 『광인일기』『아Q정전』의 그 루쉰이고 '노신'이라고도 불리죠.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이며 『아Q정전』을 읽었다면 아시겠지만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는 아Q를 통해 신해혁명의 좌절로 저항심을 잃은 중국의 민중들을 깨우치려 하기도 했죠. 그런 풍자적 소설을 쓴 루쉰이 그림쟁이였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 책 『그림쟁이, 루쉰』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한 작가 루쉰의 그림들을 모았습니다. 작가가 아닌 그림쟁이로서의 루쉰, 또 다른 루쉰을 만날 수 있는 책이죠. 이 책을 집필한 저자는 루쉰에 관한 연구를 30년이나 한 사람이랍니다. 한 작가의 생애를 연구하는 후세의 사람이 있다는 건 너무 행복한 일일 것 같아요. 작가로서도, 그 작가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도 말이죠.  

책은 5장으로 나뉘어 국화(國畵), 전각, 평면디자인, 선묘, 책과 잡지 디자인에 실린 루쉰의 그림을  보여주고 관련기록과 루쉰(迅自述)의 기록, 그리고 저자의 해설까지 곁들여 그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알게된 것은 루쉰이 정말 다양한 장르에 자신의 그림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루쉰이 번역서들의(체홉이나 고리키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들의 책) 표지나 자신의 책표지도 직접했다는 점이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로부터 문인들은 그림도 잘 그렸다고는 합니다만(그래서 문인화 라는 말이 있나요?) 지금의 작가들과 비교를 하면 루쉰을 비롯하여 예전의 문인들은 진짜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또 루쉰은 책표지 뿐만 아니라 선묘(선으로만 그린 그림)를 보면 좀더 루쉰의 그림솜씨(!)를 알 수 있는데  선묘는 루쉰이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방식이랍니다. 자신이 들어갈 집을 직접 설계,시공 감독하고(서삼조호동 21호 건물 설계도) '이십사효'에 관한 판본을 선묘로 모사하여 조합하기도 하고(조아투강도, 노래자가 부모를 즐겁게 하다, 옥력초전), 자신의 책 『아Q정전』을 번역하는 일본 작가가 '골패 노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자 직접 그림을 그려 답을 하기도 하죠(골패도). 또 평면디자인에서는 식물표본책 안에 들어갈 그림을 직접 그려넣고(불새,부엉이), 해부도도 그렸는가 하면 북경대학교 교휘도 직접 도안을 했답니다. 

이렇듯 다양한 방식의 그림들을 보면서 그동안 몰랐던 루쉰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은 즐거운 일이었어요. 루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저도 놀랍다는 생각을 했는데(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그림들까지) 루쉰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독자라면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 작가에게도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이미 있을 수도 있겠죠. 제가 아는 분 중에 한분도 비슷하게 근대의 작가에 대해 강한 애정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만) 우리의 문인들에 대해 많이 연구하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루쉰이 궁금하다면 얼른 만나보세요. 작가 루쉰이 아닌 그림쟁이, 루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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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누나가 될 거야 다림창작동화 2
김리리 지음, 한지예 그림 / 다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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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누나가 될 거야』는 엄마가 동생을 낳으러 간 사이 집에 남은 슬비가 동생이 생길 테니 멋진 누나가 되기로 결심하고 벌이는 엉뚱한 소동의 모습을 담았다. 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또 혼자서도 이젠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벌이는 슬비의 행동들은 동생에 대한 사랑으로 절절하다. 그 절절함이 그림에 그대로 전달되어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진다. 발랄하고 유쾌하고 신이 난 누나. 그 모습만으로도 분명 제목처럼 멋진 누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데 슬비는 스스로에게 약속까지 한다. 앞으로 동생이 생기니 뭐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을 거며, 공부는 더 열심히 할 것이고, 엄마 아빠 말씀은 잘 들을 것이라고. 또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누나가 되어 동생을 잘 보살펴 줄 거라고 말이다. 

드디어 동생을 만나는 날, 이젠 혼자서도 뭐든지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모가 있지만 스스로 옷도 찾아 입고, 머리도 직접 빗어 묶는다. 작은 옷은 너무 딱 맞아 우스워보이고 빗은 머리는 뭔가 엉성해보이지만 어떠랴! 혼자서 했다는 게 중요하지. 한데 학교에서 급식을 받으려다  엉망진창이 되고 마는데… 과연, 슬비는 스스로 예쁘게 치장한 모습으로, 멋진 누나의 모습을 동생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슬비의 캐릭터가 매우 재밌다. 이전에 나온 『엄마는 거짓말쟁이』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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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 산티아고로 가는 아홉 갈래 길
장 이브 그레그와르 지음, 이재형 옮김 / 소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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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은 자신있다고 마음을 먹은 후에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은 산티아고 길을 걸어보는 일이었다. 몇 년 전 친구가 그곳을 걸어보고 정말 좋았다며 강추를 할 때도, '그래 나도 언젠가는 꼭 걸어보리라' 다짐을 했더랬다. 하지만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도 난 걸어보질 못하고 있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일은 꿈이나 마찬가지라고 누군가 얘길 했는데 그렇다면 난 여전히 꿈만 꾸고 있는 셈이다. 또 재작년부터 유행처럼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다녀오는 제주올레조차 시간이 안 된다는 핑계로 가질 않으니 아무래도 내 욕망은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내게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다룬 책들은 늘 이루지 못한 욕망(혹은 꿈?)의 해소인 셈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조차도 붐이 일듯이 유행처럼 한 권 두 권 쏟아져나오기 시작하자 별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다들 산티아고를 다녀오긴 했으나 자신의 정신적 치유나 사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하여 몇 권 읽고 나니 흥미가 사라지고 만 것.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부엔 까미노』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른 산티아고 관련 책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자신의 치유나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티아고를 걷고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풀어낸 책이 아니라, 산티아고의 길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방면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나 걸어가는 한 갈래 길의 산티아고 길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산티아고로 가는 아홉 갈래의 길을 알려준다. 그런 과정은 십여 년 동안 이 모든 길을 다닌 저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책인 셈이다. 이 책의 장점은 그 길, 순례길에 대한 문화와 역사적인 이야기들이다. 그곳의 풍경과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책은 봤지만 역사를 다룬 책은 보질 못했다. 그런 탓에 이 책을 읽어보면 그 순례길들이 얼마나 중요하며 아홉 갈래의 길들이 본질적으론 다르지만 왜들 그토록 순례길을 걸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길이 알려지면서 종교나 인종, 나라와는 상관없이 증가하는 순례자(!)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순례열풍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 점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 번째 밀레니엄으로의 이행은 대재앙이나 세상의 종말가 무관했도, 산티아고 순례길의 매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일이 단순히 운동을 겸한 긴 산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례길에 도전한다는 것은 자기자신과 대면 훨씬 이상의 것입니다. 몇 주일 동안이나 계속 걸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다가 비합리적인 자연에 대한(혹은 선입견에 근거한) 두려움이 덧붙여지니까요.

열풍이든 순수한(!) 순례든간에 이 책은 잠시 주춤하며 잠들어 있던 내 욕망을 일깨워주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산티아고를 가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만 있으면 어쩜지 용기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길을 걸으면서 내 자신을 대면하고 진정한 나를 찾는 일임에는 틀림없어 보이니 말이다. 어쨋든『부엔 까미노』, 지금 산티아고 길을 계획하고 있다면 꼭 한 번 읽어보라며 권하고 싶다.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만일 여행의 목적이 타인들과의 만남뿐 아니라 자신과 만나 관계를 더 심화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가장 중요한 건 느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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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6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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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구름은 아주 잠시 피었을 뿐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벌써 바람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띠지에 적힌 조금은 자극적인 문구, "열아홉 살 소년과 여교사의 짧지만 강렬한 사랑, 그리고 이별의 문법", "그녀가 죽었다. 순간, 우리 두 사람을 둘러싼 모든 시간이 입을 다물었다."는 책을 처음 보는 순간 호기심을 일게 만든다. 하긴 이 문구가 아니었어도 표지에서 살짝 곁눈질을 하며 쳐다보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하기도 했겠지만 저 띠지의 문구가 확실하게 열독의 채찍질을 가했다. 

"우리는 눈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 『침묵의 시간』은 여교사와 남학생의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소년의 시점으로, 여교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하게 되고, 그녀와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의 절정의 순간에 죽어버린 여교사를 추억하며 중간중간 소년의 독백을 곁들여 들려준다. "렌츠는 결코 흥분하지 않는다. 다만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길 뿐이다." 언론의 찬사처럼, 현대 독일문학의 거장이라는 지크프리트 렌츠는 담담하지만 절제된 문장을 통해 '사랑'의 결론을 내놓는다. 

전반적인 내용을 봐서는 사제간의 금지된 사랑을 들려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것뿐이었다면, '현대 독일문학의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옮긴이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까지 인용하며 사랑의 부질없음을 내보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금지된 사랑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다. 

그 어떤 사람도 사랑의 영원성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사랑이 지속되길, 또 그대와 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길 바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시간'이 지나면 그 아무리 열열했던 사랑도 식어버린다. 죽을 것처럼 아팠던 사랑도 세월이 약이었다. 그런데 교사와 학생의 관계 같은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 지속된다면 비난받을 게 뻔한 사랑인데 말이다. 그럴 때 누구나 한번쯤은 '시간'이 멈춰지길 바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행복, 이대로, 영원히!!!

책을 다 읽고 나니 뜬금없이, 지난 주에 끝난 <지붕 뚫고 하이킥>이 생각났다. 세경이 공항으로 가던 길에 마침내 지훈에게 고백을 하고 꺼낸 말,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책에서 소년은 추모객들이 물 위로 던지는 꽃다발을 풀어 한 송이씩 뱃전 옆으로 떨어뜨리는 장면을 보며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 

저기 떠가는 꽃들이 내 젊음의 영원한 비극으로 기억되는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보듬는 크나큰 위안이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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