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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기온이 내려가 겨울옷을 꺼내려다 서랍 안 구석에 숨어 있던 일기장을 발견했다. 1999년, 십 년 전의 일기였다. 그 일기엔 단 하루의 일기가 적혀 있었고, 십 년 후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순간, 마음 한 구석에서 뭔가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십 년이란 세월은 누군가에겐 인생의 고비를 열두 번도 더 만났을 시간일 테고, 또 다른 이에겐 조금의 변화도 없는 그런 시간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 십 년이라는 시간동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겪고 또 그만큼의 고통과 아픔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아온 남자다. 그리고 두 명의 여자, 트루디와 클레어. 1942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홍콩과 1952년 전쟁 후 아직도 그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홍콩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상류사회에 속하는 트루디와 보잘것없는 외국인 윌의 만남, 진심이 통했기에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결코 지킬 수는 없었던 사랑, 그리고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피아노 교사 클레어와 한 여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처투성이의 남자 윌의 엇갈린 사랑이 십 년이라는 세월을 교차하면서 이어진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살아남은 자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순간의 선택이 사랑하는 연인을 갈라놓고, 권력과 욕망에 무릎을 꿇게 했다. 믿음보다는 배신이 만연했고 그것이 옳은 선택이라 믿게 했다. 그리고 남는 것은 후회뿐. 윌은 말한다. ‘실패한 일 때문에 남은 일생 내내 그걸 풀어야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당신이 아느냐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늘 그렇듯이 여자는 남자를 위해 사랑을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위해 사랑하진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권력에 빌붙은 듯 살아가야만 했던 트루디, 그녀와의 사랑을 진심으로 지켜냈다면 윌은 일생을 실패한 일 때문에 살아가진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의 인생을 망쳐온 것, 그게 바로 후회라구요.’ 라고 말하는 클레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또 다시 찾아온 사랑 역시 그렇게 져버리지는 못했겠지.
『피아노 교사』를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영화가 하나 있었다. 홍콩을 배경으로 했던 <모정>, 초등학교 때 <주말의 명화>에서나 봤던 그 영화가 왜 갑자기 내 머릿속에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아마 이 책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홍콩과 트루디라는 여자가 혼혈이라는 점이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영화와 이 책의 내용은 전혀 달랐지만 머릿속으로 영상이 그려지듯 소설은 술술 읽혔다.
전쟁의 상처는 나라를 막론하고 시대를 초월한다. 전쟁을 기회 삼아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고, 결코 그 전쟁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전쟁이 끝난 후에 가지는 각자의 상처는 나름의 고통들이다. 그런 면면의 상처를 작가인 재니스 리는 섬세하고 치밀하게 표현해주었다. 비록 윌과 트루디, 클레어라는 큰 테두리가 존재하지만 그 안에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 도미닉과 에드위나, 빅터 첸과 에밀리 그리고 앤젤린 등등 작은 역할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까지 그 개성이 드러나는 재니스 리의 이야기에 누구나 빠지면 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내게 십 년의 세월은 정말 하루 같았다. 변한 것이라곤 배경이 되는 주변의 상황들뿐이다. 하지만 윌의 십 년은 그 누구보다도 긴 시간이었겠지. 트루디와의 황홀했던 시간들, 그리고 찾아온 암흑 같은 세월. 클레어의 말처럼 윌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렸을지 모르나 어쩐지 나는 윌이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