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지나간다
구효서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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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순전히 사진가 김홍희 때문이다. 김홍희 때문에 그의 흔적이 있는, 숨결이 녹아 든 사진이 담겨 있다는 이유, 그것만으로도 무작정 책을 구하기에 충분했다. 인터넷 헌책방에서 마침맞게 한 권을 구해서 사진만 연신 훑었다. 책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나는 조금이나마 그 흔적을 벗겨내려고 박박하게(?) 굴었다. 어리석은 짓이었지! 제목을 보라! ‘인생은 지나간다’가 아니던가! 때론 지나간 시간을 오롯이 간직할 줄 아는 지혜는 책에 깃든 세월과 소소한 흔적들 그리고 콧구멍으로 들이켜 마셔도 죽지 않을 만큼의 먼지를 음미하고, 감상하고, 털어내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

『인생은 지나간다』는 우리 곁에 늘 있고 익숙하다 못해 시시하게 느끼는 모든 사물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란 ‘옛’이야기이며 현재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통로’라는 소임을 다하고 있는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물이란 때론 지금은 보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고 지금도 역시 흔하디흔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에 산재한 많은 사물들 혹은 이젠 우리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물들 모두가 나름의 의미를 넘어서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일지라. 


우리 곁에 널려 있는, 많은 사소한 사물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중층적 정보들로 가득차 있을뿐더러, 생명과 존재가 연출하는 ‘삶’의 충실한 반영자며 증거물이다.(p11)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많이도 만만하게 사소한 사물들을 등한시 하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그렇다. 사물이란 어쩌면 단지 도구로써의 역사적 증거물이기보다 한 인간 아니 인류 전체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인류 생활사의 단면이요, 인류의 삶의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정보로 가득 찬 삶의 지질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사물의 변천사는 곧 인간의, 인류의 변천사를 대변하는 게 아닐까. 과거를 지나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이 산재해 있다는 걸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나 있나 모르겠다.  


하나의 사물. 그 존재와 인간을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이 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쓰임을 바꿔가면서 선명한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볼품없이 버려졌다가도 어느 누군가를 통해 새로운 쓰임과 의미와 해석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묵묵히 인간보다 더 충실하게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인간의 기억 속에서 혹은 그날그날의 계획의 범주로부터 배제되는 그 순간에도 도처에 널린 많은 사물들은 역사성을 갖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간은 역사라는 광대한 흐름 속에서 늘 ‘과거’ 아니면 ‘미래’에 속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현재’라는 이 시점이란 인간에게는 영원한 딜레마일 수밖에 없지만, 사물은 언제나 이 흐름 속에서 늘 ‘현재’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역사의 증거로 존재하는 건 아닐는지.  


이 책은 어휘의 풍부함을 맛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내가 워낙 어휘력이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늘 어려운 책은 거들떠보지 않는 내 고약한 독서습관 혹은 그런 편식에 익숙했는데 이 책을 통해 어휘의 풍부함이 선사하는 ‘글맛’ 혹은 ‘문장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자동차」「주전자」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특히나 재미있었다. 짧은 삶을 살은 내게 페이지마다 꽤나 소중하고 흐뭇한 추억이 많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

binsante님 작업실에서 ‘사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게 생각난다. 그때 오갔던 대화중에 모든 사물은 우리네 기억과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물을 작은 여유를 가지고 5분 동안이라도 응시하고 마주하게 될 때면 까맣게 잊고 살다시피 한 나도 모르는 옛 추억과 조우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런 추억과의 조우를 틈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가는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등등의 대화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국 어떤 기억도 추억도 인간의 의식의 한 형태로서 존재하기에 끊임없는 창조의 밑거름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사물은 기억을 틈타 추억 속으로 흐르고 추억은 다시 기억으로 저장된다, 저장된 추억은 내 속에 들끓는 어떤 열정 혹은 의지와 맞물려 의식화되고 어떤 행위를 낳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 행위란 아마도 창조적 행위, 작은 몸짓에 불과할지언정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행위가 아닐까. 삶이라는 미완의 징검다리를 끊임없이 잇고 기어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 그 시발점에 사물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인생이란 지나가고 지나오는 건지도 모를 하나둘 엮인 징검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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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핸드백 속에 누구나 손거울 하나쯤은 갖고 다닌다. 아예 거울이 파운데이션 케이스에 부착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일까.(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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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씩 없어지는 걸 겪는 것이다.(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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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가라
조셉 M.마셜 지음, 유향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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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북로그를 시작한지 2년 정도가 지나고 있다. 북로그 세상을 개구쟁이처럼 뛰어다니면서 절실하게 느끼고 깨달은 게 있다면, 이웃하고 있는 모든 분들이 내 삶의 스승이구나! 하는 것일지라. 매일같이 개구쟁이마냥 버릇없이 굴어도 자상하게 너그럽게 어르고 받아주신다. 마치 세상을 다 아는 양 오만한 낙서를 휘갈겨놓아도 ‘그건 아니다!’가 아닌 ‘그건 좀 다른 것 같다’고 나 스스로 잘못 인지한 점을 깨닫도록 이끌어주신다.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염려해주신다. 도움이 될 만한 정보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시고 좋은 기운을 불어 넣어주신다. 정말이지 북로그를 하면서 나는 이웃님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동시에 내 속에 가득 찬 삐뚤어진 생각을 비우게 되는 듯하다.  


북로그 세상의 많은 스승님들 중 개인적으로 ‘적재적소’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 드는 분이 있다. 햇귀님! 햇귀님 앞에서 나는 ‘꼼짝 마라!’다. 내가 부려놓은 생각들, 내가 휘갈겨놓은 낙서들 틈을 파고들어와 지금 내 마음 상태까지 꼬집는 햇귀님 앞에서는 정말이지 ‘꼼짝 마라!’다. 나도 인간이기에 때론 에둘러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고약한 것은 그렇게 애매모호하게 에둘러 놓고는 내 심정을 알아달라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바라고 바란다는 것. 햇귀님은 단칼(!)에 ‘네 속마음을 내가 알지, 요놈아!’하신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정말 북로그 초창기 때는 햇귀님이 무서웠던 게 사실이다(?).  


*

“ ······ 다시 한 번 일어서서 폭풍에 맞서는 행위가
어리석어 보이거나 심지어 자기 파괴적인 거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게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의 마음 어느 구석엔가는 번뜩이는 도전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싶단다.
그것이야말로, 그 도전 정신을 일깨움으로써
폭풍이 우리에게 강해지는 법을 가르치는 방식이 아닐까 싶구나.

얼마나 많이 불어 닥치건 간에 폭풍에 맞서 대항하다 보면,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굳이 폭풍만큼 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단다.
그냥 서 있을 정도로만 강하면 되느니라. 

겁에 질린 채 떨면서 서 있든, 주먹을 휘두르면서 서 있든지 간에
우리가 서 있는 한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  


∥..본문 中..∥  


『그래도 계속 가라』는 마인드맵을 견실히 가꿀 수 있게 해주는 책인 것 같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자기계발서라는 꼬리를 달고 있는 책을 지독시리도(?) 안 보는 편이다. 사실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하다. 내 문제가 무엇인지, 적어도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게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를 확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걸 고백해야 하는 부끄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리뷰가 늘 엉망인 이유가 이와 다르지 않다(아! 지금도 삼천포로 빠져버리지 않았는가!).

마인드맵을 가꿀 수 있게 해준다고 느낀 이유는 삶에 대한 성찰이 주를 이루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실천적 내용도 그런 과제도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하염없이 들은 기분이다. 삶이야말로 인간의 최종 목표이고 목적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삶은 삶일 뿐이고 그냥 ‘있는 것’이라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렇게 ‘있은’ 삶을 어떤 마음으로 인식하고 살았는지 이야기해 줄 뿐이다. 삶은 그냥 그렇게 늘 ‘있는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마음의 길을 잘 다듬으며 그저 ‘살아가는 것’에 충실하고자 ‘마음먹음’으로 인해 길은 자연히 열리고 선명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운명도 숙명도 모두 그 속에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항상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해. 그것이 아무리 하찮고, 더디고,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또 우리가 지닌 것이라고는 그 마지막 한 걸음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행과 우리 자신에게 그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할 빚을 지고 있단다. 마지막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딘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도록 하려무나.(p120~p121)

내 걸음걸음이 너무나도 무겁고 힘겨웠을 적에, 북로그 대문에 ‘체’아저씨의 고뇌에 찬 사진을 내걸고서 엉뚱한 낙서만 매일 같이 해댈 적에, 햇귀님은 단 한 문장으로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걸 기억한다. ‘Hasta la victoria siempre!’ 이 한 문장에 정곡을 찔렸던 것이다. 마치 발가벗겨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한 건 전혀 부끄럽지도 더 이상 걸음이 무겁지도 않았음을 기억한다. 위의 인용한 구절은 햇귀님이 내게 하는 말 같기도 했으며, ‘체’아저씨가 ‘Hasta la victoria siempre!’를 외치며 시작한 멋진 연설문 같기도 했다. ‘단지’ 한 걸음이 아니라 ‘오직’ 한 걸음이라는 걸 가슴에 새기게 된 구절이다.  


**

앞에서 햇귀님과 어울리는 말이 ‘적재적소’라 했던가. 이 책을 선물 받았을 당시, 나는 마치 오줌이 마려워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심정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냥 가라! 어디든 가서 시원하게 오줌보를 비워라! 참아야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꼭 이런 메시지가 담겨져 있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이 책을 보았지만 그 당시에는 책 제목만 만날 쳐다보면서도 위안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런 틈을 파고들어와 어떤 메모도 없이 날아든 이 책. 제목처럼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계속 가라고, 지금은, 아직은, 물론 언제나 그렇게 계속 가야만하는 게 삶이라고. 햇귀님은 그렇게 차분한 인상과 참 어울리는 미소만 지긋하게 짓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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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 몽골방랑 -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김홍희 지음 / 예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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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홍희와 떠나는 방랑길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설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면서 그렇다고 스릴이 잔뜩 담긴 것도 아닌, 꼬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그와 함께 떠돌이 방랑객이 된다는 건 늘 기분 좋은 무엇으로 가득하다. 정처 없이 떠나고 기약 없이 발걸음을, 대책 없이 젖어들고 스며드는 그만의 흔적들은 정말이지 하나하나가 놓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것일지라.  


『김홍희 몽골방랑: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제목 그대로 몽골을 휘젓고 다닌 그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말을 타고 몽골의 초원을 멋진 자태로 뽐내면서 흔적을 새겨나가는 게 아니라, 고물 지프차를 타고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건조한 사막에 길을 내며 몽골 너머의 몽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길’이라는 근원적인 물음과 시 · 공간 그리고 ‘나’ 혹은 ‘너’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철학을 몽골 방랑길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에서 김홍희에 대해 또 하나 알게 된 게 있다면, 그는 지극히 낭만적이면서도 시쳇말로 ‘산통 다 깬다!’고 할만치 솔직하다는 점이다. 가령, 입에 맞지 않는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몽골식 국수를 ‘이해’라는 소화기관을 통해 섭취하기보다 차라리 생라면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생수 한 병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낫다는 식의 솔직함을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이 ‘솔직함’이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부족’이라는 설익은 여행자의 자질도, 방랑객의 고집스러움도, 맹목적인 배타성도 아니다. 그는 단지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강요할 수도 없는 문화의 상대성을 ‘존중’하기에 솔직할 수 있었고, 선택에 있어 지극히 솔직한 하나의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워하지 않고 그리워해본 적조차 없다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감성과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태초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포기한 것이다.(p12)  


그리워하지도, 그런 적조차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에게 그리움이란 가슴앓이 혹은 열병과도 같다고 종종 느낀다. 마치 가슴이 녹아내리고 미어지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그런 서글픈 쾌락이랄까. 가령 누군가를, 어떤 존재에 대한 통제할 수 없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들곤 한다. 단순한 그리움으로 시작한 이 감정은 그리움의 ‘형태’에서 그 ‘정체’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스스로를 그리워한다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자신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그리움이 어느 곳, 어떤 외부에서 밀려들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지만, 그리움은 이미 내 속에서부터 뻗쳐 나와 내가 인식하는 모든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막상 내 주변에 흩어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인, 나라는 존재가 그리움에 휩싸여 있는 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 그리워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 대한 그리움인 것이다.  


바깥에는 내 생에 한유했던 어떤 비밀의 오후가 멈추려 했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의 셔터는 깜박이는 눈과 같다. 어떤 것을 보는 순간은 뜬 눈이지만, 메모리가 되는 시간은 눈을 깜박이는 탄지의 순간이다. 그러니 실제로 촬영되는 어떤 광경이란 실제로는 사진가가 보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것이 카메라의 숙명이자, 사진가의 운명이다.(p20~p21)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부제에 대한 의문이 순식간에 풀리는 구절이다. 왜 김홍희는 실컷 잘보고 기록으로 남기고 했으면서도 무엇도 본 게 없다고 하나 싶었다. 카메라의 숙명이자 사진가의 운명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정말이지 전혀 의심하지도 않았던, 어쩌면 김홍희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래 나는 이 사진 속에 있는 것들을 보았지! 하는 착각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사진이 찍히는 그 순간,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셔터가 끊어지는 순간, 우리의 디지털 카메라 LCD 혹은 여타의 뷰파인더는 우리 눈에 무엇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잠시잠깐 까만 어둠을 선사할 뿐이고 우리는 그 어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그 어둠의 순간 너머의 영역은 오직 카메라의 렌즈만이 관할하는 하는 영역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짧은 어둠의 순간과 오롯이 마주하고 있을 때, 정작 내가 분명하게 봤고 찍기까지 했다고 착각한 그 결과물은 사실상 내 눈이 아닌 카메라의 눈만이 선명하게 보고 기억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일상에서의 일탈로 구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를 굳건히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일상 속에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일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삶.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일상을 버린 존재 확인도 없고, 일상을 버린 자유도 없다. 일상 속에서 일상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162~p163)

일상을 벗어나는 것, 소위 ‘일탈’이라고 부르는 그 어느 곳이든 자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자유란 구질구질하고 단조롭기 그지없어 지루하고 밍밍하기까지 한 일상이라는 굴레 속에는 절대로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방랑자의 발걸음은 일상과는 전혀 다른 이상향이라는 구름 위를 산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김홍희 역시 자신의 일상과는 다른 풍경 속에서, 그것도 방랑객으로써 내딛는 그 흔적들이기에 자유를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자유란 그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자그마한 내 방에도 자유가 있고 심지어 학교나 군대에도 자유란 존재한다. 다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때 자유란 어디든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닐까.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란 불가능하니까. 결국 관계란 것은 일상이라는 시 · 공간을 배제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숨 쉬고 사유하고 인식하는 ‘나’라는 존재의 참모습을 확인시키고, 그 곳에 자유를 흩뿌리는 씨앗과 같은 게 아닐까.  

 

*

햇귀님께서 선물해주신 영화『NEVER CRY WOLF』에서 주인공이 벌거벗은 채로 광활한 대지를 가득 메운 카리부 떼 속을 미친 듯이 휘젓고 달리는 명장면이 나온다. 대자연이 선사하는 꾸밈없고 자연 그 자체의 신비로움이 가져다주는 감흥에 젖어 태곳적 인간이라도 된 양 질주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 그 이상이었다. 김홍희 역시 몽골의 광활한 대지에서 메뚜기 떼를 온몸으로 받으며 내달렸다. 한 올 한 올 벗어던지기 시작한 옷들, 몽골의 대자연이 주는 감흥에 빠진 그에게 옷은 거추장스러운 부장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껏 벗어던지고는 몽골의 초원을, 사막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친 듯 내달린 김홍희의 흔적은 정말이지 인상 깊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친구 녀석이 가진 소위 ‘발로 찍어도 예술작품이 된다!’는 최신 카메라를 부러워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카메라를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그네들이 담아내는 결과물을 볼 때마다 시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발로 찍어도 심지어 애완견이 실수로 셔터를 눌러도 예술작품처럼 결과물을 쏟아내는 카메라보다 김홍희처럼 미소만 살짝 지어도 스스로가 예술작품의 한 풍경이 되는 그런 방랑자를 더욱 흠모하게 되었다. 내딛는 발걸음들이 불어오고 가는 바람결에 그 흔적이 사라져버린대도 그 속에 녹아들어 스며든 방랑객이라는 존재를 더욱 동경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이 책 말미에 인용된 몽골의 시가 인상 깊게 남는다. 문학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나는 왜 여태 깨닫지 못했을까. 몽골에 시인이 있다는 게 어떻게 이리도 생경하게 느껴졌을까.『몽골현대시선집』에 수록된 몇몇 인용된 시를 보면서 김홍희가 절절하게 느꼈던, 말하고 싶어 했던 생각이나 철학을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오랜만에 김홍희와 함께 한 방랑길, 끝없는 초원과 사막을 내달리는 고물 지프차의 운전수가 되고 싶었다. 생라면을 와그작와그작 부셔 먹는 그를 조수석에서 연신 지켜보고 싶었다. 캑캑거리길 기다렸다가 냉큼 물 한 모금 대령하고 팠다. 꺼내 문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댕겨주고 싶었으며, 가려줄 거라곤 하나 없는 그 광활한 대지 어느 한 점에 나란히 바지를 내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그곳에 영역표시(?)를 하고 싶었다. 이처럼 그란 사람은 늘 나를 애끓게 한다. 김홍희의 다음 방랑길을 기대하며 애끓는 마음을 추슬러본다.  


‡‡‡‡‡‡‡‡‡‡‡‡‡‡‡‡‡‡‡‡‡‡‡‡‡‡‡‡‡‡¨¨주워 담기¨¨‡‡‡‡‡‡‡‡‡‡‡‡‡‡‡‡‡‡‡‡‡‡‡‡‡‡‡‡‡‡

그때 참바가라브 산을 오르기 전에 찍은 신기루가 나타났다.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구나’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신기루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증명의 사진도 아니었다. 신기루를 보고 황홀경에 빠져 있던 과거 시간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그 순간에 빠진 황홀경의 감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감흥은 더 증폭되어 현재 나에게로 전이 되었다. 눈으로 보는 사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고스란히 찍고 전이시켰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선 짜릿한 교감이었다.(p146)  


몸을 위해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의 평온을 위해 스마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p181)  

 

=>방랑의 세 가지 조건!

“시장만 있으면 정부는 없어도 좋다.”
삶이 있고 활기가 있고, 나눔이 있고 보탬이 있고, 배려가 있고 여유가 있다면 우리는 통제하는 그 무엇이 꼭 필요하더란 말인가.(p238)

=>방랑이기에 가능한 진정한 자유의 맛이 아닐까? 경계도 허물고 시 · 공을 초월한 자만의 짜릿한 맛!  


인간의 본질을 묻고 본연의 자아를 묻던 이들은 모두 별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 이제 도시에서는 별을 볼 수가 없다. 별 대신 반짝이는 것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다. 도시의 인간들은 인간의 본질을 묻고 본연의 자아를 물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오직 네온사인을 켤 수 있는 돈에만 얽매여 하루하루 생존해나가는 슬픈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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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그레그 S. 레이드 지음, 안진환 옮김 / 해바라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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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른 사람이 너의 한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도록 내버려두지 마라.

긍정적인 태도만 있으면, 우리가 못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단다.

조금 모자란 듯 이룬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대 이상을 해냈다는 데 대해 여전히 긍지를 가질 수 있지.

( ···중략··· )  


만약 모든 사람들이
비관론자들이나 어두운 미래만을 예측하는 사람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일 거다. 

네 신념대로, 네 꿈대로 행동해라.
오직 너 자신만이 네가 성취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아는 거다.”
..  


「..본문 中..」  


 

어제는 종일 날씨가 어둑어둑한 것이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마치 말뚝에 묶인 소 마냥 축 쳐진 기분으로 우울한 맨땅을 이리 돌고 저리 돌고 했다. 한번 가라앉은 이 기분이란 결국 뜻 모를 우울의 언저리를 끊임없이 맴돌 뿐임을 안다. 느닷없이,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밀려드는 온갖 서글픔들은 말로도 꼬집어낼 수 없고 손짓으로도 패대기칠 수 없는 무엇이다. 발짓으로도 날려버릴 수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 그런 무력감으로 나를 짓누르기 십상이다. 형태도 없고 뚜렷하지도 않은 이 감정선 앞에서,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나동그라져버린 어제는 마치 가슴앓이로 열병을 앓고도 남을 만큼 무겁고 혼미하기까지 했다.  


고작 날씨 때문에 그럴까,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중충한 날씨는 내 모든 걸 얼려버린다. 무엇 때문인지도 스스로 파악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된다. 그저 한없이 침몰하는 선상에 멀뚱멀뚱한 채로 자포자기의 심정이랄까. 그렇게 나는 나를 버린다. 내 숨을, 존재를 마음 어느 한 구석에 방기한 채로 오직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한다. 그러고 보면 여태 나는 이런 내 감정선의 몰락을 너무 나 몰라라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은근슬쩍 그 야릇한 쾌감을 즐겨왔는지도 모른다. 것도 아니라면, 분명 나는,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나 아예 외면했던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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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는 자기계발서이다. 몇 안 되지만 여태 내가 접했던『멘토』『마시멜로 이야기』,『It's Work』와 유사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책의 구성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형식,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들이 닮았다. 다른 구석을 꼽자면, 어느 어느 책에서는 체크리스트나 노트를 작성하면서 꿈을 이루는 팁을 주었다면, 이 책에서는 카드의 형식으로 쟁점을 간결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쯤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의 문제점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실천과 실행의 문제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어째서 매번 제자리걸음일까. 늘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구상하고 계획하며 실천한다. 이미 상상 속의 나는 버젓이 꿈을 이룬 채 내가 그리는 단출하지만 나름의 만족하는 삶을 대가로 받기까지 한다. 아니 몇 천 번이고 그런 결과를 이루었다. 결국 나는 ‘완결’이라는 의미를 너무나도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 속, 머릿속에서는 이미 완결에 완결을 거듭하는 시나리오를 탄탄하게 구성한 채 그것에 그저 ‘만족’하고 만 것이다. 결과는 언제나 머릿속 상상의 ‘나’에게만 주어질 뿐이며 결국 ‘소득’은 없는 그런 게으른 삶을 ‘부유하는 삶’이라 합리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어제와 같은 이 기분은 결국 마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부재로 인한 마땅한 결과인 듯하다. 스스로 충분히 다잡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손 놓고 지레 나를 놓아버리는 것에 너무 익숙했던 것이다. 마치 앞서 말한 것처럼 이미 나는 ‘완결에 완결을 거듭하는 시나리오’ 속에서만 이 기분을 탈피했다고 착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던 것이다. 늘 머리로만 몸을 쓰고 실천하는 그런 환시 혹은 망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그것에 너무나도 익숙한 채 시쳇말로 ‘똥인지 된장이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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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추스르지도 못하는 나란 사람은 꿈을 꿀 자격도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다고 꿈을 가질 자격까지 포기할 순 없겠지.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렇게 종잡을 수 없을 만큼 허우적거리는 마음으로는 적어도 꿈을 꿀 준비가 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머릿속으로만 몸을 쓰는 그런 환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실재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머리가 아닌 실행하는 것이 자유로울 때만이 내 꿈은 비로소 첫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여, 이 책을 선물해준 ‘까까’가 부러울 때가 있다면, 닮고 싶은 게 있다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일 게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쾌활함을 넘어서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에너지를 선사해 본 적이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본다. 아닌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조차 낙천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내가 혹시나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말 한마디를 건넸다고 한다면, 그건 ‘짝퉁’에너지거나 적어도 ‘반쪽짜리’에너지에 불과했으리라.  


나를 돌보는 시간, 그런 시간에 익숙해지고 무르익어가기를, 그래서 좀 더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먼저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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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을 하거나
현재 하는 일을 좋아하면
성공은 저절로 따라온다.(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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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 2011-11-22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아 글이 정말 좋아요 인간의 내면을 잘 표현해주고 있어서 제가 반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요리사
KMA 지음 / 원앤원북스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이 거대한 세상이 아주 복잡하다고는 하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할까 싶은 생각을 종종 하는 편이다.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것이 지난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라고 표현하기엔 좀 어색하지만 분명 그러한 관계 속에는 생각보다 값진 보상이 숨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인 듯하다. 새로운 에너지, 일상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일종의 설렘, 지역과 나이 그리고 성별이라는 경계가 비로소 무의미해지는 작지만 깊은 희열감,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울타리에 대한 실감 등을 비롯해 많은 것을 주고받게 된다.  


이처럼 비교적 자유로운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는 서로가 일종의 타협점을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더군다나 서로 공통된 관심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타협점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쉬워지기도 하니까. 만약, 어떤 ‘환경’이라는 요소가 보태진다면, 이야기는 생각보다 더더욱 복잡해지는 것 같다. 아직 직장생활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다소 이야기하기 어려운 부분일지도 모르지만, 원론적인 시각(?)에 비춰보면 어떠한 특정 조직을 이루는 구성원들 간의 관계란 학문적인 차원에서 다룰 만큼 복잡한 것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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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요리사』는 인적자원관리나 조직행동론을 연상케 한다. 조직전체에 위기가 닥쳤을 때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요즘 기업(경영)의 미래는 사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여봐란듯이(?) 광고를 하는 기업을 보면서, 조금은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다, 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아무튼 이 책은 그렇다!(??) 

 

꽤나 흥미롭게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다름 아닌 재미가 있었다(?), 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 기업 내 사원들의 교육목적으로 창작뮤지컬을 만들었는데 기존의 딱딱하고 지루한 프로그램에 비해 아주 반응도 좋았으며, 효과와 만족 역시 아주 높았기 때문에 책으로까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몽블랑’이라는 레스토랑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인물들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는 다른 말이 필요 없을 만큼 그냥, 재미있다! 따뜻하기도 하면서 때론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던, 자기계발서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가 있는 내가 재미나게 읽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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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책으로 옮겨서 그런지 드라마를 보는 것 같기도 한, 연극을 보는 것 같기도 한, 무대를 상상하면서 등장인물들의 제스처도 번번이 떠올려보게 되는 그런 편안하면서도 재미도 있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일련의 우화적이면서도 단조롭다 못해 앞부분만 대충 읽어봐도 뒤에 이어질 스토리가 눈에 훤했던 기존 계발서들의 이야기 구조에 비해 월등하게 낫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문학적인 성향이 좀 더 짙기 때문에 ‘소설처럼’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덧붙여, 마침맞게 다니엘 페나크의『소설처럼』과 번갈아 가면서 읽게 된 이 책은 다니엘 페나크가 강조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가미함으로써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격으로 편식의 대마왕(?) rainlife도 재미나게 읽게 만든다!(?)를 느끼게 한 책인 듯하다. 그 단순한 것이란 이야기를 듣는 것 혹은 듣는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 조성이랄까. 다니엘 페나크가 강조한 ‘무상성’에 충실했다고 봐진다. 어떤 강요나 요구, 교육적인 측면을 우회적으로 이야기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저 즐길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도록 편안함을 제공했다는 것,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비로소 책으로까지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소설처럼’ 부담 없이(?) 즐겁고 후련하고 가뿐한 기분으로 읽은 자기계발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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