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뜰에도 상사화가 피고 진다 - 세상 바깥에 은둔한 한 예술가의 세상에 대한 ‘한 소식’
김양수 글.그림 / 바움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가는 사람
오는 사람도 없다.
내가 저 길을 따라 나서지 못함은
저 길을 따라 걸어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음이다.

가지 위에 참새 한 마리 머물다 간다.
『외로움(p48)』


저자는 그렇게, 그 ‘누군가’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에서 말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답고 경탄할만한 병풍을 두르고서, 어리숙하고 때가 잔뜩 묻은 도시빈민인 내게 제일 먼저 편안함을 선물했다. 비포장도로를 터벅터벅 걸어 그에게로 가는 길에 흙먼지가 폴폴 날렸지만, 도시의 먼지와 공해보다 훨씬 좋은 맛이었다.

달과 별
새와 고요를 긴 팔로 껴안은
따뜻한 그림 한 폭.
『겨울나무(p42)』


그 아름다운 병풍 속에서 자연스레 발화한 것만 같은, 꼭 그런 느낌으로 충만한 게 그의 작품이다. 꾸밈없고 편안하며, 내가 늘 가보지도 못한 먼 어느 곳을 동경하며 거짓으로 그려 놓은, 훌륭하다고 그저 생각만한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름다운 그 병풍 속에 그려진 모든 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의 작품이며, 폴폴 날리는 흙먼지며 길가에 지려놓은 오줌자국까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느꼈다고나 할까.

귀뚜라미 달 갉아 먹는 소리인 듯
창문 열었더니
둥근 달이 간 곡 없고
반달 홀로 나무 위에 걸려 있네.
『반달(p64)』


세상에 만연한 이기심들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선한 생각과 꿈을 갉아먹고 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귀뚜라미나 매미의 울음소리는 늘 성가신 것으로 생각하며 진정한 아름다운 화폭을 우리는 멀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소한 아름다움조차 알지 못하면서 진정한 미(美)의 가치를 논하느라 ‘귀뚜라미 달 갉아 먹’듯 허허로운 시간이 우리를 갉아 먹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건 아닐는지.

안개 속에
점 하나 찍었다.

살아서 움직인다.
『새(p74)』


저자의 감수성은 이렇듯 세밀하다. 나는 늘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그 안개 너머로부터 불안을 떠안은 채 오로지 그 너머의 것만을 보려고 애쓰고 지레짐작하기에 급급하다. 나와 안개가 함께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는 등잔 밑이 어두운 격이다. 구태여 그 너머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를 불안이나 환희에 연연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떨어진 감은
나비들의 몫이고

달려 있는 감은
까치들의 몫이다.

생의 한 길가에 선
나는 누구의 몫인가.
『감(p68)』


한참을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무방비 상태로 그저 노니는 즐거움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러다 툭하고 떨어진 채 으깨진 ‘감’과 맞닥뜨렸다. 그리곤 아직도 세월 모르고 달려 있는 ‘까치들의 몫’을 올려다보았다. ‘생의 한 길가에’서 마주친 그 ‘감’은 화두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보다 더 근원적이고 겸손한 화두였다. 진정 ‘나는 누구의 몫인가.’

잎도 나무를 떠나고
열매도 가지를 떠나고
철새들도 떠날 채비 서두르는 길.

진초록의 강인함도
결실의 풍요로움도
보금자리의 따스함도
털어내는 저 자유로움.

늦은 가을
늦깎이로 홀로 서서
세월을 주워 담는다.
『늦은 가을(p76)』


가을은 늘 내게 풍요로움과 때마침 아름다운 그런 계절이었다. 모든 걸 비워내고 털어내는 ‘자유로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종종 늦가을이 주는 을씨년스러움과 허무함과 같은 감정은 만나보았지만, 이처럼 자유로움으로 가득한 늦가을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떤 세월, 어떻게 그 세월을 주워 담느냐는 것으로부터 내 봄은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꽃도 사람인 양
봄이면 잎이 올라와
님을 기다리지만

꽃도 사람인 양
여름이면 꽃이 피어
님을 기다리지만

꽃도 사람인 양
목 놓아 흐느끼다 지쳐 잠드니
바람도 멈춰서서 울고 가는 밤.
『상사화(p131)』


나는 도시에 살면서 이 도시라는 경계 너머에 있을, 아니 저 멀리 밀려나버린 땅을 종종 그려본다. 도시에 비한다면 그 처량한 땅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다. 내가 그 땅을 처량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불손한 생각일지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 숭고한 땅으로 갈 용기가 없음에 나는 감히 ‘처량한 땅’이라는 연민을 품으며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에 불과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그 처량한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인연을 따라 산다는 것은
순리를 따라 산다는 것과 같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것은 거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때
인연은 우리에게 옵니다.

무엇을 사랑한다고 이름 짓지 않고
무엇이 내 것이다 집 지어놓지 않고
무엇이 옳다 그르다 시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인연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그 어떤 것들도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스치는 바람, 발밑에 뒹구는 낙엽까지도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인연입니다.
『인연(p158)』


인연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혹은 인연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삶이라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인연의 꼬리를 쫓아 그것을 쥐려했던, 지금도 그렇게 어리석은 헛수고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감히 그 인연이라는 것을 탄탄한 내 마음 속 어딘가에 가둬두고 빗장을 단단히 채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거리삼아 내비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늘 내 관심 속으로 파고드는 것과 내가 익히 알고 충분히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 이외의 것들은 나와 ‘인연’이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만을 한 채로 말이다. ‘스치는 바람, 발밑에 뒹구는 낙엽까지도/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인연’임을 몰랐던 것이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도시라는 화려하지만 도를 지나친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소리를 덮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네가 내게로 오는 소리 외에는······.
『비 오던 날(p161)』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눈과 비가 외진 이 곳에서 비는 내 님이요, 그립다 지쳐버려도 맹렬히 사랑할 존재랄까. 내 마음속에 핀 상사화는 비를 향한 내 그리움을 양분으로 피고 진다. ‘모든 소리를 덮’고 ‘내게로 오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 내 마음속 상사화는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내 님을 맞는다. 오롯이 내 님과 단 둘만의 시간까지 허락되는 날이면, 나는 정신줄을 놓고 흠뻑 취하고 또 젖어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내 님은 맑아오는 날 속으로 다시 사라진다. 다시금 내 마음속 상사화는 그 오롯했던 만남을 양분으로 다음을 기약한 채 여전히 촉촉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바람 끝에 향기가 난다.
오시려나, 내 고운 님.
『예감(p192)』


어떤 예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비’일수도 있고 어느 계절일수도 있다. 하물며 내가 기다리는 버스일수도 있고, 아련한 첫사랑과의 조우를 예감할 수도 있다. 어떤 예감이건 간에 그 속에는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엉뚱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늘 혹은 종종 어떠한 예감에 사로잡힌다면, 굳이 현실화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현실에 투영될 것이다.

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가장 진솔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진실로 바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도, 예감할 수도 없는 게 아닐는지. 바라고 바라는 그 마음속에는 사랑과 더불어 고마움도 있을 것이다. 그 이외의 모든 감정들이 잠재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알 수 없는 그 오묘한 예감 속에는 우리들의 모든 감정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잠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의 작품 속은 단아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전혀 꾸밈도 가식도 없는, 때론 거친 보리밥을 씹는 듯했지만 그만큼 정겹고도 아련한 감정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책장을 덮으며 나는 쾨쾨한 도시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병풍을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어쩌면 꼭 만나리라는 열망의 씨앗이 심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씨앗이 내 마음속에 뿌려졌다면, 아마도 그것은 ‘상사화’가 될 운명의 씨앗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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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췌~말이지~~본 글보다 레인님의 사유가 더 멋지니, 이런 리뷰는 추천받아 마땅해!!!!!!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 - 한쪽 가슴만으로도 행복한 여자
곽정란 지음 / GenBook(젠북)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여름의 일이다. 일곱 난장이 중 한 녀석의 어머님이 병원으로부터 유방암 판정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방절제수술을 받으셨다. 그때 그 친구네는 ‘남산골’이라는 곰탕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장 일손이 부족해 부랴부랴 친구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와 친구는 아버님을 도와 가게에서 바쁜 일손을 거들었고, 저녁이면 병원을 방문했다. 그렇게 친구네 집에서 두 달여 동안 살았다. 집-가게-병원을 오가며 여름방학을 꼬박 보냈다.

친구 어머님은 퇴원을 하셨고, 예전과 다름없이 쾌활하게 생활하셨다. 언제 내가 아팠냐는 듯이 말이다. 그때는 유방암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 때라 그저 유방절제수술을 받고 나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으로 착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시는 친구 어머님을 뵈었기에 별로 심각한 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던 것 같다.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를 읽고서, 친구 어머님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어느 날, 천청벽력 같은 유방암 진단을 받고서 얼마나 충격이 크셨을까, 내심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친구와 아버님, 여동생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유방절제수술을 받고서 하나의 유방이 아니라 세상을 다 잃은 듯 한 그 상실감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등등의 생각들이 이미 흘러간 그 시간을 다시금 불러냈다.

엄마로서도 아닌, 여자로서, 한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한 순간에 잃어버린 그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이제 젖먹일 아이도 없고, 살아가는데 지장도 없으니 하나쯤 없은들 무슨 상관이냐고 너스레를 떨어볼 용기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으리라.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떨어진 저자의 가슴 아픈 절규와 고백은 내 친구 어머님과 오버랩 되면서 더더욱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재발에 대한 걱정, 아니 그것은 저자가 말하듯 거의 공포에 가깝다. 저자와 내 친구 어머님은 발병으로부터 좌절하고, 수술로 통해 생명은 살렸으되 자신의 존재감의 상실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언제고 재발할지도 모를 공포와 몇 년을 싸웠던 것이다.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재깍재깍 들려오는 죽음이라는 공포의 시간들과 늘 싸우며, 다시금 평온함을 찾는 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내 안의 두려움아,
난 이제 너와 이별하려고 한다.
내 안의 새로움과
만나기 위해!

『본문 中..』


저자는 기필코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겨내야만 했고, 결국 이겨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격려와 위로가 그녀에게 살아야할 이유를 알려주었고, 종교에 귀의해 모진 시간을 이겨냈다. 또한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시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봉사하는 삶, 유방암을 앓고 힘들어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희망을 전달해주는 공연을 기획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는 바로 유방암환자들을 위해서 그녀가 기획한 공연의 제목이다. 숨은 자아와도 같은 여성성의 상실로 인해 움츠려들고 희망과 용기를 잃어가는, 살아 숨 쉬면서도 늘 절망에 빠진 채 죽음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고, 그녀가 경험하고 이겨낸 바를 바탕으로 진심어린 동반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유방암환자들과 함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감, 상실감, 좌절감, 무력감, 공포심 등등을 떨쳐내기 위해 희망과 축복을 노래한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여성성의 상실이라는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고, 그 치부를 진심어린 자기애로 감싼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가 되고, 암 판정을 받은 후로 방치한 채 돌보지 않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고귀한 생명을 갖고 태어난 존재로서의 자신을 당당하게, 다시금 사랑하는 법을 배워간다.

그녀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남자들도 어렵다는 암벽등반에 도전하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난다. 또 마라톤에 도전하는 것도 모자라 그 힘들다는 사막마라톤까지.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위해 ‘도전’이라는 선물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게 삶의 보람을 느끼며 이전과는 다른 삶, 늘 일에 쫓기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주며, 진정 자신은 돌보지 않은 채 무심하게 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보람찬 삶을 가꾸어 나간다.

가장 흥미로웠던 그녀의 도전은 사막마라톤이었다. 내가 갓 전역을 하고서 인터넷을 통해 사막마라톤에 대해 접한 적이 있다. 꽤나 매력적인 스포츠(?)라는 인상을 받았기에, 나름 도전해볼 요량으로 검색을 해봤었다. 코스도 힘들뿐더러 그 비용도 만만치 않은 터라 지레 겁을 먹고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경기관련 동영상을 보면서 나름 체력도 좋고 자신감도 있던 나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사막마라톤을 그녀는 참가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 그 이상의 결과를 맛본다. 40대 여성 참가자들 중에서 1등을 한 것이다.

이처럼 《숨은 꽃, 꽃술을 터뜨리다》는 눈물과 감동 그리고 시련을 딛고 일어서 새로운 삶을 위한 끊임없는 도전으로 가득 담긴 책이다. 저자가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영원한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알곡 같은 ‘대서사시’가 아닐까 싶다. 오래간만에 가슴 찡한 감동과 눈물 그리고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도전이라는 비행을 한 듯해서 뿌듯하고 가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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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1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고 아름다운 도전 뒤엔 그런 고난과 역경의 극복의 스토리가 꼭 있더라구요.
 
숲의 가족
아모스 오즈 지음, 박미영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서 꾸벅씨(?)가 된 채로 지내고 있다. 네모난 상자 안에 꼬박 하루를 밀어 넣은 채 졸음과 싸우는 학생들 틈바구니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공부가 될 리 없다. 주위를 둘러봐도 죄다 네모난 것들뿐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앞 다투어 네모난 모습으로 존재하는 곳, 도서관. 그곳에서 네모난 책 속에 잠자고 있는 ‘숲’을 만났다. 비밀로 가득한 숲을.

스타카토. 《숲의 가족》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스타카토’와 같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길게 연주되는 스토리가 아닌, 딱딱 끊기는 전개방식이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내 손에는 퍼즐조각이 하나씩 생긴다. 서로 닮은 구석도 별로 없는 그런 퍼즐조각을 얻으면서 결정적인 퍼즐조각을 얻을 때까지, 그렇게 스타카토.

어느 마을, 동물들이 없다. 사라진 건지 죄다 죽은 건지 알 수 없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마치 저주받은 마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학교에서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을 뿐이고, 마을의 어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쉬쉬하는 듯한 모습이다. 간혹 학교 선생님처럼 참다못해(?) 동물 울음소리를 흉내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몹쓸 행동을 한 것 마냥 금방 함구해버린다.

『이것은 마을에서 오랜만에 처음 보는 생물이었다. 그날 밤 산귀신 네히가 모든 생물을 데려간 뒤로 마을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물, 말이나 비둘기, 쥐, 양, 수소 등의 생물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부모들 중에는 동물에 대한 주체 할 수 없는 그리움이나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나머지 동물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고서 아이들에게 동물 소리를 흉내 내어 들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닭이나 하마의 울음, 소가 음매 하고 우는 소리, 숲 속의 늑대가 짖는 소리, 비둘기가 구구하는 소리,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 거위가 꽉꽉거리는 소리, 개구리가 개굴개굴 하는 소리, 올빼미와 수리부엉이가 우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은 자신의 슬픔을 부인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단지 재미있는 소리를 내본 것뿐이라고 했다. 그게 전부라고. 또 동물들의 소리는 현실 세계의 것이 아니라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따라해 본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략·····)
“그건 그냥 전래동화란다.”
“그 이야기는 농담이야.”
전래동화나 농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p50~p51)』


어둠이 깔리면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어둠 속에 잠식당한 것처럼. 집집마다 커튼을 치고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다. 어떤 두려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산귀신 네히에 대한 공포를 아이들에게 심어준다. 어둠이 깔리면 절대 밖을 나가서는 안 되며, 숲 근처로는 절대 가서도, 궁금해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할 뿐이다. 별 시답잖은 이야기라고 말할 뿐, 마을 사람들은 그 ‘시답잖은 이야기’에 대해 언제나 쉬쉬할 뿐이다.

마티와 마야. 이 용감한 두 녀석들이 사고(?)를 치고 만다. 금기를 깨고 숲으로 모험을 떠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진실’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함께 어떤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모험을 말이다.

『“어떻게 너는 숲을 무서워하지 않니? 네히가 무섭지 않니?”
니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나도 무서워. 나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 특히 밤이 무서워. 네히는 무섭지 않아. 사실은 동굴에 있을 때보다 나를 미워하는 아이들 속에 있을 때, 그 아이들이 내게 소리를 지르고 돌과 기왓장을 던질 때가 더 무서워. 어른들이 내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좀 봐, 저기 소리지르는 병에 걸린 불쌍한 아이가 오네, 정말 안됐어, 하고 말하면서 항상 어린 아이들에게 내 곁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 난 그게 두렵고 무서워.”(p70~p71)』


마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으며, 몹쓸 병에 걸린 아이 취급을 받는 니미를 만나면서 마야와 마티는 자신들을 둘러치고 있는 울타리의 습성을 알게 된다. 미움과 시기, 다수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멸시와 경멸, 조롱하는 마을이라는 울타리의 습성을 말이다. 어른들은 이렇게 아이들을 유리시키고 진실을 은폐하며, 금기라는 것으로 경계를 만든다. 그렇게 세뇌를 시킨 채, 아이들을 유린하는 것이다.

소통의 부재. 두려움이란 진실체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것으로부터 파생된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혀 진실체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나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나와는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 나보다 우월할 것만 같은 사람들을 오직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고 그들에 대한 왜곡된 정보들을 자기가 속한 집단 속에 퍼뜨린다. 그렇게 사람들은 상대를 격리시킨다는 착각 속에 빠져, 각자 제 스스로 자신이 속한 집단 전체를 고립시키고 외부와 단절시켜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숲의 끝자락에 도착하자 어렴풋이 마을의 집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네히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제 밤이야. 저기서는 벌써 걱정들을 하고 있을 거야. 이제 둘 다 집으로 돌아가.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땐 산에 있는 숨겨진 우리 집으로 와. 해기 지기 전까지 몇시간 동안은 함께 있을 수 있을 거야. 너희만 괜찮다면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좋고 더 있어도 돼. 다시 만날 때까지 너희도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조롱하고 놀리는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 귀찮게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그 아이들에게 말해. 화나게 하거나 약을 올리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에게 말하는 거야. 신경쓰지 말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거야. 괴롭히지 말라고, 그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싫다고 말하는 거야. (····중략····)
자, 이제 너희는 가서 평화롭게 지내. 그리고 잊지마. 너희가 커서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서도 잊지마. 마야, 마티, 잘가. 안녕.”(p136~p137)』

마야와 마티의 험난한 여정을 통해 만난 진실, 온갖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진실을 싸고 있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 등을 벗겨내는 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 그렇게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세상을 바꿔나갈 사명과 힘을 지닌 존재는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이며, 아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이 아닐까싶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진실들을 쉬쉬하며 살아가는가. 얼마나 그릇되고 왜곡된 정보들을 가르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단 1%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진실에 대해서 99%의 왜곡된, 자기합리적인, 그릇된 거짓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가. 시시각각 불쑥 찾아드는 진실에 대한 갈망 앞에서 얼마나 초연하고 태연할 수 있는가. 늘 두려움에 떨면서도 쉬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가치관과 중심은 지배나 종속됨 없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인가.

책을 덮으며 퍼즐조각은 다 찾았지만 퍼즐은 완성하지 못한 기분이다.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나를 조롱하듯 그런 퍼즐이 내 앞에 있는 것 같다. 하나씩 찾아낸 그 퍼즐조각들에 대해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은 채, 그냥 당연히 퍼즐을 맞춰나간 결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내게 주어지는 모든 퍼즐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듬으며, 때를 벗겨내는 작업을 시작해야할는지도 모른다. 마치, 조각모음을 시작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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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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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있어 낭만시대의 탄생에 영향을 준 게 문학에서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일명 ‘질풍노도의 시기’였다고 할까. 베르테르가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그 이전까지의 인간이 가진 ‘공통된 감정표현’이라는 한계를 비로소 뛰어 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중심의 중세를 거치면서 억눌려있던 인간 내면의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찬란한 청춘의 절정을 맞은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 속 깊이 꽁꽁 묶어둔 슬픔, 분노, 공허, 절망, 허무 등을 과감히 표출한 것이다. 방황, 추방, 고립, 은둔, 상실, 자살 등 여러 모습으로 말이다. 찬란하기만 할 줄 알았던 청춘은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광풍을 동반한 암흑의 세계를 비로소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속에 내재된 그 ‘암흑의 세계’는 여전히 존재하며, 찬란한 빛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 청춘을 잃어버린 청춘이랄까. 그런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해 알랭 드 보통은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을 내놓은 게 아닐까 싶다. 즉, 잃어가는 길과 빛을 되찾아주기 위해, 광풍을 동반한 암흑의 세계에 더 이상 무방비상태로 전락한 채 방황하는 일을 멎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보통은 이 중차대한 프로젝트(?)의 첨병으로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내세운다.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에는 소크라테스를, ‘충분한 돈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위안’에는 에피쿠로스를, ‘좌절에 대한 위안’에 세네카를, ‘부적절한 존재에 대한 위안’에 몽테뉴를, ‘상심한 마음을 위한 위안’에 쇼펜하우어를, 끝으로 ‘곤경에 대한 위안’에 니체를 첨병으로 내세우고 짧지만 긴 여정을 시작한다.

『만약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일을 삼간다면-기후나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규모 따위는 제쳐둔다해도-그 주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 있는 것들을 옳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p28)』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곧잘 해답을 이끌어 낸다. 이것은 단순히 어떠한 현상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선택을 함으로써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선택과 판단이 갖는 특수성이랄까)에서는 대체로 옳은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늘 우리에게 당연하게 제공되는 많은 것들 즉 우리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접하는 소위 일반적이라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면서 그리 깊게 의구심을 품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이미 다수들이 향유하고 있는 체제 혹은 문화, 사회시스템, 제도 등을 응당 옳은 것으로, 그래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말의 의구심조차 갖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다수’ 혹은 ‘절대다수’라는 잣대가 어느덧 ‘옳은 것’ 혹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해버렸기 때문에 때문일지라. 그와 반대되는 입장들은 ‘그릇된 것’ 혹은 ‘일탈’이라 규정해버림으로써 우리가 의구심을 일으킬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끊임없이 치고나가는 의구심들 앞에 우리는 용기를 내 움켜 쥐어야한다. 내 주변에 있는, 도처에 깔린 다수의 간섭과 통제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그것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젊음이라는 영혼을 가진 세대들은 더 이상 눈이 먼 채로 다수의 물결에 휩쓸려서는 안 될 것이다. 낭만시대의 베르테르가 자신에게 총구를 겨냥했다면, 이젠 이 세상 속의 부조리라는 감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총구를 겨냥하고 과감하게 방아쇠를 당겨야하지 않을까 싶다.

고로, 우리는 ‘상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기필코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한다.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 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p96~p97)』

우리는 늘 불안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지만 정녕 그런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불안은 늘 우리로 하여금 시야를 좁게 만들고 집중을 ‘집착’으로 변질시킨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좀먹는다. 사고의 폭을 좁혀 어깨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용기와 의지를 구석진 곳에 처박아버린다. 더 나아가 불안에 떠느라 신경은 예민해지고 걱정과 불안은 날로 눈 덩이처럼 불어나게 한다. 결국, 우리는 해결을 위한 노력도 쉽사리 포기할 수 있는 선택권도 잃은 채 그렇게 허약해져만 가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불안을 다스리는 법은 과감하게 절망(?)하는 것이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며 최악의 결과로부터 추측된 걱정의 단편이다. 그렇다면 미리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는 시간을 좀먹으면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절망에 빠진다는 게 아니라 현재 내 불안의 위치를 결과를 기다리는 시점에서 이미 결과로써의 불안으로 바꾸는 것이다.

최악의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롯이 불안에 잠식되느니 차라리 그 불안을 ‘이미 절망’이라는 상태로 바꿈으로써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헤어날 궁리에 힘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움도 없는 상태로 불안을 옮김으로써 우리는 불안을 잠식시키고 좀더 이성적인 올바른 판단과 노력에 힘 쏟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는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사색이라는 처방전에 다름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기꺼이 교육의 부조리라는 주제로 돌아가겠다. 우리의 교육의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뭔가를 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이라면 성공한 셈이다. 교육은 우리들에게 미덕을 추구하고 지혜를 포옹하도록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기원이나 어원 같은 것들을 우리의 뇌에 각인시켰다.(p241)』

예나 지금이나 교육에 있어서의 부조리는 존재했나보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도 대학에 대한 낭만과 환상을 품고서 우여곡절 끝에 발을 들여놓지만, 방대한 지식들을 쉼 없이 노트에 빼곡하고 베끼는 작업에만 열중한 채 우리의 가슴이 아닌 머리를 그저 지식을 담는 그릇정도로 전락시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분명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인가를 담긴 담아야 한다.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말이다. 지식도 분명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하고도 고차원적인 지식을 아무리 많이 담고 있다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잘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관이 없다면 쉬이 변질될 우려가 있지 않을까.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이끌어내고 선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유용하게 활용할 때만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며, 그간의 수고로움(시간적·정신적인)을 모두 보상받는 길이 아닐까싶다.

문제는 아주 값비싼 그릇에 담긴 구정물이냐, 아니면 질그릇이지만 값진 옥수(玉水)냐는 게 아닐는지.

『완성이란 고통을 피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역할을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었다.(p333)』

어떤 목표를 달성, 어떤 성취나 성공은 큰 의미에서 완성의 범위에 포함된다. 그 과정에는 탄탄대로만 있는 것도 아니며 진구렁이나 습지 혹은 고달픈 비탈길이나 비포장도로도 있을 것이다. 이를 대체로 고난이나 시련 그리고 고통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무엇’으로 만들어 내가 계획한 ‘완성’에 도달하기 위한 좋은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서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써 인정하는 것.

어떤 고통도 없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얻어지는 것은 없다. 설령, 내가 편하게 얻은 게 있다고 한들 이는 곧 누군가의 고통이면 피땀서린 고통의 한 조각일 것이다. 고통은 값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이에 부딪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중심을 잃기 십상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만족이라는 교훈을 실천함으로써 고통을 더 이상 고통이 아닌 완성을 위한 값진 과정 혹은 중추적인 요소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철학은 결국 인간 잠재력에 대한 극단적인 믿음(위대한 소설을 집필하는 일이 그렇듯, 인간 완성도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다)과 극단적인 고통(우리는 첫 번째 책을 쓰느라 10여 년을 비참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의 묘한 혼합으로 귀착되었다.
니체가 산을 이야기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도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정당성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p343)』


내일에 대한, 내 미래에 달성될 어떤 목표에 대한 막연하리만치 자신감에 찬 믿음과 그 과정에서 겪는 무수히 많은 고통의 쓴 맛이 자연스레 어우러짐으로써, 특히나 고통이 주는 메시지를 올바른 태도로 받아들임으로써 좀더 나은 내일을, 꿀맛 같은 성취(완성)를 맛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걸을 수밖에 없다. 험준한 산세에 아찔해져도 우리는 걸어야한다. 발이 부르트고 비 오듯 오는 땀 때문에 탈진을 하게 되더라도 잠시 쉬어갈 뿐 절대 포기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고통의 정당성이란 결코 심오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내가 겪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은 불평등 불공평이 아닌, 정상에 대한 갈증과 소망으로부터 내려지는 가혹하지만 분명 정당한 고통, 그런 정당방위일 뿐일지 모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목표한 것을 포기하거나 버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완성으로 향하는 최고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이정표일지 모른다. 이 이정표에 익숙해질 때쯤, 우리는 성취, 성공, 완성이라는 단물을 보람차게 마시게 되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진화’ 한다고 느끼게 되는 그 찰나의 순간, 그 최고의 희열을 맛 볼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슬픔’을 당당하게 ‘기쁨’으로 대치시켜 슬픔으로써 정체된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해나가는 그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 과정과 과정을 잇고 유지하는 건 바로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순수하고 강인한 의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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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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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그를 처음 접했던 건 내가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그 무렵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얹어 놓고 수업을 들었으며, 종종 이 책에 대해 잘 안다고(?)하는 녀석들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었다. 또한 선생님들 중에서도 내게 그런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분이 계셨던 것 같다. 충분히 곱지 않은 그런 시선이랄까.  


그때 당시 나는 헌책방이라는 곳에 눈을 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들고 다니면서 도무지 내 능력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메시지들에 대한 뜻 모를 집착에 휩싸였던 것 같다. <실락원>이나 <설국> 역시 내게는 버거운 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책을 들고 다닌다는 바로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뭔가 의미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통해 느낀 점이랄까. 그것은 철저한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 물론 줄거리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지금이지만, 분명 그것은 상실이었던 것 같다. 이해 능력이 부족했던 내가 그 상실의 무게를 이겨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얘기일지도 모른다. 또한 읽고 나서 도무지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는지조차 가물가물 한 것 역시 그의 책이 상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전에 인간의 존재 이유를 테마로 한 짧은 소설을 쓰려고 했던 적이 있다. 결국 소설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동안 줄곧 인간의 ‘레종 데트르’에 대해서 생각했고, 덕분에 기묘한 버릇이 생기게 되었다. 모든 사물을 수치로 바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버릇이었다. 약 여덟 달 동안 나는 그런 충동에 시달렸다. 전철에 타자마자 승객 수를 헤아리고, 계단 수를 전부 세고, 시간만 나면 맥박 수를 셌다. ······(중략)······ 그때 나는 그런 식으로 모든 걸 수치로 바꿔놓음으로써 타인에게 뭔가를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에게 전할 뭔가가 있는 한, 나는 확실히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피운 담배 개비의 수나 올라간 계단의 수나 내 페니스의 크기에 대해서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는 자신의 레종 데트르를 상실하고 외톨이가 되었다.(p90~p91)』 

 

그렇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주인공처럼,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내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어떤 확신이랄까, 어떤 이미지를 타인들에게 각인시키고자했던, 어쩌면 너무나도 무모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꽤나 진지하고 나 자신에 대한 어떤 정당한 행위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집보다 소설책이 더 좋았던 그 때. 더군다나 <상실의 시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실락원>, <설국> 등을 오직 ‘들고만’ 다니면서 아마도 그것을 죄다 이해하는 척, 적어도 문제집이나 풀고 있는 너네와는 다른 ‘나’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난 너희와 같이 그런 구속적인 일상을 살진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아주 조금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내가 뭔가를 전하려고 일탈적인 행동(일명 고답적으로까지 보이는 책들과 야자시간에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드는 행동 등)을 서슴지 않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콧방귀를 뀌듯, 그렇게 제 할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난 진실로 관심 받았다기보다, 한낱 소란쟁이로서 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것, 그 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내 ‘존재 이유’를 상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면, 아직도 나는 내 존재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상실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말 자체가 상실의 한 자락일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외톨이가 되었다는 생각, 종종 하긴 한다. 하지만 ‘군중속의 고독’이라 했던가. 그렇게 따지면 우리 모두는 외톨이가 아닐까 싶다.  


무엇을 상실해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엇인가를 상실해가는 것 같다는 알 수 없는 그 상실감에 빠져, 군중들 속에서 마치 전혀 고독하지 않은 것처럼, 전혀 문제없다는 그런 얼굴로 살아가는 나, 우리, 사람들. 어쩌면 ‘바람의 노래’란 상실에 대한 메시지라기보다 ‘나’의 존재에 대한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가 세 번째로 잤던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죽은 여자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죽었기에, 그들은 영원히 젊기 때문이다.  

반면에 살아남은 우리는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나이를 먹어간다. 때때로 나 자신은 한 시간마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든다. 그리고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p94)』  


릴케와 이상 그리고 기형도는 영원히 젊은, 그런 산소(?)같은 시인이 아닐까. 이 시인들이 멋진 이유는 그들의 시를 읽은 후, 되물어 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인과 그 시를 애독하는 독자들 사이의 단절이랄까. 때론 이런 단절은 이처럼 멋진 것, 영원히 젊을 수 없는 우리를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젊은 애독자로 정체시켜 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위로받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여. 전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어. 자네는 다정하지만 뭐랄까, 모든 걸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뭐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니야.”(p105)』

김영하의 <퀴즈쇼>의 민수가 그랬고, 이 책의 주인공 ‘나’ 역시 그랬다. ‘달관한 것 같은 분위기’말이다. 나 역시 누군가 꼬집어 말하진 않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런 시선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니 똥 굵다는 표정으로, 애송이 같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조금 삐뚤어지게 생각해보자면, 그들은 내게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비밀을 너무 빨리 알려고 덤벼드는 그런 애송이, 젊은 피라서. 그렇게 생각하고픈 나 자신이 때론 너무나도 재수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썩소 한 방 날리고 여유로운 윙크 살짝 보태며 애써 당당한 척,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모든 건 스쳐 지나간다. 누구도 그걸 붙잡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p143)』  


우리는 순간을 살아가는 것, 그 뿐인지도 모른다. 순간이란 눈 깜짝할 그런 순간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순간 혹은 그 순간순간을 붙잡을 수도 거기에 매달릴 수도 없다. 거기엔 어떤 손잡이도 없기 때문이다. 스치듯 지나는 그 순간을 우리는 애써 기억하는 척, 붙잡고 있는 척 그런 착각 속에서 보낸다. 우리는 순간을 기억하고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상실 한 조각을 물고 있을 따름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늘 상실의 안은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청춘이든 노년이든 간에 어느 시절에나 내가 존재하는 순간, 내가 존재하는 한 이러한 상실의 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상실이라는 도착지로 향하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스치듯 그렇게 지나치는 상실의 조각들을 자신도 모른 채 수집하며 살아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상실을 채워가는 게 삶의 여정이라면 그 끝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도착하게 될 그곳을 뭐라 불러야 할까. 어쩌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런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며, 생에 처음으로 가장 마음이 편안한, 그런 상태가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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