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무역, 희망무역 - 아시아의 여성 공정무역을 중심으로
김정희 엮음 / 동연출판사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대학교 3학년 어느 때, 뜬금없이 물음 하나가 나를 옭아맸다. ‘나는 통상학을 전공해서 뭘 하려는가?’ 이 물음은 말하기는 쉬워도 생각보다 골이 깊은 문제였다. 그저 수능성적에 맞춰 대학과 전공을 선택했고 말 그대로 ‘그냥’ 학교를 다니고 ‘그냥’ 전공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강의시간에는 무역법률, 무역계약론, 결제론, 운송론, 보험론, 소비자 마케팅, 금융론, 외환론 등등 오로지 상행위에 적법한 사고를 요구하고 여태 다져진 일련의 ‘룰’을 따르는 수동적인 자세만이 강조되었다. 이런 것에 대해 깨닫기 전까지 나는 ‘그냥’ 졸업해서 ‘대충’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가 ‘그저 그런’ 끌려가는 삶을 너무 일찍 허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 시작된 물음은 꼬리가 길다. 강의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말이 인간이 하는 상행위이지 기계적인 사고와 마인드를 주입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통상학을 가르치는 모든 학교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물며 현장에서 직접 무역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모두 인간미도 없고 기계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폄하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우리학교’에서 내가 접한 통상학 강의란 것이 지극히 ‘통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물음은 의문의 탈을 쓰면서 ‘인간이 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오직 기술적인 부분만 주입하는가?’에 머물렀다. 오직 ‘거래행위자’로서 수동적인 ‘나 아닌 나’가 되어가는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 오더라는.  


어쨌든 간에, 나는 무책임하게도 전공을 버렸다(?). 최소이수학점만을 ‘안전빵’으로 수강하고 다른 전공을 전전(?)했다. 경영학과, 사회복지학과, 문예창장학과, 사회학과, 사학과 등등을 무차별적으로 들락날락거렸다. 그 중 하나가 걸렸는데, 결국 부전공을 하게 된 사학과가 그것이었다. 특별히 역사의식이 투철한 것도 아닌 내가, 역사에 관해 흥미를 느끼고 있었던 것도 아닌 내가 사학과 수업을 들었던 이유를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했던 것 같다. 첫째가 교수와 학생 간에 ‘말이 통한다!’는 것(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하고 토론하는 분위기?)이었고 둘째가 시험문제가 주관식 서술형이라는 것(시험공부 안 해도 될 것 같아서), 셋째는 강의실 분위기가 아주 조용하고 엄숙(?)했다는 것.  


사학과 첫 강의는 ‘한국사회경제사’라는 과목이었다. 만약, 이 과목에서 ‘공정무역’이라는 부분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라면, 굳이 사학과 수업을 계속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대학생 둘이 세계여행을 하던 도중에 공정무역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Veja’라는 운동화 브랜드를 만들어, 원재료를 공급하는 원주민들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진국의 ‘윤리적 소비자층’의 욕구와 만족감을 충족시키고 원료를 공급하는 원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시스템을 구축한 이 두 젊은 청년의 예를 통해 내가 전공수업에서 강의해주길 바랐던 게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무역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도 공정무역에 관해 개설된 강좌도 없었고, 그것에 대해 진중하게 언급하는 교수도 없었다는 것! 그것이 내 골 깊은 물음의 실체였던 것이다.  


*

너무 에둘러 왔다.『공정무역 희망무역』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공정무역에 대한 연구와 일본과 한국, 크게는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공정무역의 현황을 담은 희망보고서이다. 이 책에 담긴 글은 논문과 이미 다른 곳을 통해 기고된 글을 수정한 것, 대담과 인터뷰, 인용자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소 딱딱한 맛이 없지 않지만, 간간이 삽입된 사진과 공정무역이 ‘살맛나는 무역’이고 ‘희망무역’임을 알아감으로써 상쇄된다.  


이 책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페미니즘적인 성격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네팔이나 인도 등지에서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수공업 제품을 생산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여성임을 알게 된다면, 오해하지 않은 채 공정무역의 한 예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공정무역 대상자인 여성들에게서 희망무역이 싹트는 이유를 꼽자면, 대체로 이 지구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이를 가족에게 투자한다. 아이를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며 집을 가꾸거나 장만하는 등의 생산적인 부분에 소득의 일부분 혹은 전체를 쏟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공정무역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큰 것이 아닐까. 어떤 부의 창출로써 삶의 질이 나아진다는 것 이상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봤을 때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본의 ‘네팔리 바자로’와 한국의 ‘두레생협연합회’, ‘페어트레이드 코리아’의 역할과 모색하고 있는 방향, 어려움과 보람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설립자와 동참하는 많은 이들(이들 모두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사람들이다)의 입을 통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하고 공정무역의 기틀을 잡아가는 아시아 중심의 이 단체들은 정말이지 대단하거니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다는 의미를 넘어 여성과 가난한 이들의 인권, 아이들이 꿈을 갖고 웃으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계 전체를 기획해나가는 그들의 노력은 정말이지 가슴 찡한 무엇이다.  


**

자본주의의 한계니 새로운 돌파구는 무엇무엇이니 하는 탁상공론에 진절머리가 날 때가 많다. 그네들의 말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현실에 아무런 도움도, 감동도 주지 못한다. 이론과 견해 · 주장들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의 결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실질적으로 발로 뛰면서 작으나마 현실을 그려나가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은 저명한 학자들이나 기득권층의 ‘구상’에 그치는 주장에 비해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가!  


나는 지적 오만을 아주 부정적인 것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때론 지적 오만이 의식적으로나마 스스로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타인에게 상처 혹은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충분히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본다. 다만, 그것이 변화가 없는 ‘오만’ 혹은 ‘태만’에 그친다면, 더군다나 이런 행태가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계층의 전유물처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남용된다고 한다면 이는 부정적이 아니라 ‘사회악’ 그 자체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리는 곰곰 해봐야 하지 않을까. 입과 머리로만 ‘명품 시스템’을 끊임없이 생산 · 재생산하고 있는 치들을 우러러 볼 것인가, 아니면 작으나마 실질적으로 행동하고 징검돌을 놓듯이 하나하나 세계를 직접 그려나가는 이들의 땀방울을 우러러 볼 것인지를 말이다.  


수도가 없던 시절, 펌프에서 물을 퍼 올리기 위해서 한바가지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마중물을 한바가지 붓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생명수처럼 물이 콸콸 올라온다는 것을 아직 어린 나이지만 나 역시 경험해보았다. 공정무역 · 희망무역을 외치며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 마중물과 같지 않을까 싶다. 징검돌을 조용히 날라다 놓고 또 놓으며 전 세계에 희망수· 생명수를 나르는 그런 물장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들의 한바가지 마중물이 세계 곳곳에 희망과 생명을 퍼뜨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각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작으나마 응원을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세상을 훔치다 - 우리시대 프로메테우스 18인의 행복한 책 이야기
반칠환 지음, 홍승진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몇 번의 북로그 모임을 통해 느낀 점이 있다. 그 중 가장 값진 것, ‘확실하게’ 느낀 것을 꼽자면, ‘누군가’와 책에 대해서,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종일토록 책에 대한 이야기며 그에 얽힌 각자의 경험담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지루하지도, 그럴 틈조차 없다. 많은 독서관련 책에서 책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벗’을 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왜 이 점을 강조하는지 직접 경험해보니 입이 닳도록 침이 마르도록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물론 온라인상의 교류 역시 아주 값진 경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애석하게도 북로그를 하기 전까지, 물론 지금도 내 친구들 중에는 북로그 이웃님들이나 직접 모임을 통해 만나는 분들처럼 ‘확실한 독서 벗’이 없다. 아니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을 듯.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책도 선물해보고 꼬드겨보기도 했다. 아예 ‘수다’를 시작하면서부터 책이야기만 주구장창해보기도 하지만 역부족이다. 웬만해선 내게 대거리를 하거나 반항(?)하지 않는 녀석들이지만, 책이야기 앞에서만큼은 마치 철옹성의 커다랗고 탄탄한 성벽처럼 완벽한 방어태세를 유지한다. 녀석들이 참으로 얄밉다.  


 *

『책, 세상을 훔치다』『책, 세상을 탐하다』와 유사한 구성과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열여덟 명의 ‘프로메테우스’들이 책에 대한 감상과 자신들의 최근 생활, 독서를 시작하게끔 해준 책 혹은 최근에 기억에 남는 책,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책 등등에 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덧붙여, 여기 실린 글들은『사람과 책』2004년 7월부터 2006년 1월까지 연재한「나의 서가 이야기」를 엮은 책이기도 하다. 책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교보문고에서『사람과 책』과월호를 열람하는 방식으로도 책 내용을 접하실 수 있으니 참조하시길.  


이 책에는 내가 좋아하거나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이 나온다. 가장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故 장영희 교수의 사진을 보면서 가슴 한 켠이 많이 아리고 아팠다. 이 인터뷰 당시『문학의 숲을 거닐다』가 베스트셀러에 올라 많이 유명해졌다고, 앞으로는 좀 안 유명해졌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장영희 교수를 만나니 더더욱 그리움이 짙게 깔렸다.

다음으로는 요즘 들어 많이 좋아하게 된 사진작가 김홍희이다. 그 특유의 입담과 세상에 관한 철학이 어디에 기인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가장 인상 깊게 본 책들은 죄다 여행기나 표류기였다. 그의 방랑벽의 기원을 알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밖에도 아침편지를 배달하는 고도원, 가수 김창완, 화가 김점선, 시인 장석주, 바람의 딸 한비야, 번역가 김난주, 프리랜서 백지연, 작가 유용주 등등 내 관심 안의 분들이 참 많아서 읽어나가는데 더없이 신나고 의미 있는 독서였다.

덧붙여 인터뷰 연재를 담당했던 시인 반칠환의 글은 아주 감칠맛난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고 문장마다의 표현력은 물론 자연을 벗 삼아 놀아본(?) 적 없는 사람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하고 푸근한 맛이 인상 깊다.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해보진 못했지만 좋은 느낌과 인상으로 깊이 각인된 것이 부수입으로는 꽤나 짭짤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본다.  


**

책이 세상을 탐한다는 것, 세상을 훔친다는 것은 사람의 손과 입, 그런 행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책은 스스로 힘을 갖지 못하며 절대 빛을 발할 수도 없는 것이다. 누군가 책 속에 담긴 내용을 읽어내는 즐거움 혹은 수고로움이 없이는 그저 그 옛날 뒷간에서 볼 일을 보고 마구 비벼서 용무를 마무리(?)하던 신문‘지’만도 못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결국 사람의 손을 타야만 책은 비로소 ‘책’으로 명을 이어갈 수 있으며, 유용한 쓰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독서라는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 삼박자가 갖춰져야 한다면, 나는 이 삼박자가 ‘책’과 ‘사람’ 그리고 ‘벗’이 아닐까하고 생각해본다. 세상을 훔치려면 적어도 마음이 맞는 공범(?)이 좀 있으면 수월할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림셀러
아우구스토 쿠리 지음, 박원복 옮김 / 시작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대구 북로거모임을 했던 때, 똥집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술 한 잔 했던 그때,『드림셀러』가 출간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마침 모임에 참석한 분 중 binsante님도 계시기에 화가 박항률의 그림이 들어간 책이 나왔더라고 말씀 드린 기억이 난다. 누군가와 새롭게, 처음 만난다는 것, 어떤 좋은 기운을 북돋워주는 그런 관계를 맺는다는 건 생각보다 흥미로움을 넘어서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듯하다. binsante님을 뵈면서 화가 박항률을 알게 되었고, 일반적으로 ‘꿈’이라는 단어가 갖는 추상적인 베일을 조금이나마 벗어던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꿈을 이룬, 다시금 그 꿈을 일구고 가꿔가는 사람을 나는 만났던 것이다.  

언젠가 쥐뿔도 없고 모른 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어쩌면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이 되려는 사명을 갖고 태어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좋게 말해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제대로 말해 이 얼마나 오만하고 부끄러운 생각인가! 나는 그런 환상에 젖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저 바람처럼 어떤 책임도 지지 않기 위한 변명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관계란 이처럼 내 어리석음을 하나씩 벗기는, 서서히 알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주술이 아닌가 싶다.

*

『드림셀러』는 여태껏 내가 생각해온 소설이라는 세계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나로선 아주 생경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우화 같기도 한 이 소설이 갖는 맛이란 마치 잘 익어 달콤한 귤인 줄 알고 한입 베어 물었는데 아주 시큼한 레몬이더라는. 시큼한 이 레몬즙에는 의식에 대한, 삶에 대한, 꿈에 대한, 우리 내면의 세계에 대한 것들이 담겨 흐른다. 이야기는 장황한 설명과 철학적인 대사들로 조금은 팍팍(?)하게 흐르지만 아예 신 맛으로만 된 것도, 그렇다고 아예 우중충하게 무거운 것도 아니다. 시큼하긴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매력적인 레몬 같은 이야기랄까.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사람에게는 쉼표 하나, 그저 쉼표 하나를 팔고 있소.”(p48)

‘스승’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는 스스로를 ‘꿈을 파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살소동을 벌인 주인공에게 다가가 ‘쉼표’ 하나를 팔게 된다. 그 쉼표란 가령 삶을 포기하려는 자에게 어떤 누구의 말보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 그렇게 ‘스승’은 한 사람의 생명 혹은 고통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는 한 영혼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양각색의 빛깔로 반짝이는 고귀한 ‘삶’을 하나씩 되살려낸다. ‘스승’은 마치 삶을 되살리는 순례길에 오른 사람처럼 보인다.  


“이 사회에는 수많은 하이에나와 독수리가 있다네. 하지만 덩치 큰 동물에게서는 많은 것을 바랄 수 없지. 그들은 약한 자를 이해하기보다, 비난을 일삼으며 병적으로 권력을 지향할 뿐이니까. 내가 그대들을 부른 것은 위대한 영웅이 되거나 역사의 장에 훌륭한 업적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야. 그대들은 묵묵히 이 사회를 돌아다니며 모르는 자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작은 제비가 되었으면 하네. 자신의 날개에 걸맞은 존재가 되길 바라네. 의미 있는 일은 작은 일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p111)

어느덧 꺼져가는 삶의 불씨를 되살린 사람들은 ‘스승’의 제자가 되어 그 순례길에 동행하게 된다. 불씨를 되살렸을 뿐, 아직까지 각자 완전한 삶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들이 다시금 오르기엔 이 사회의 시선이나 편견이 쟁쟁했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스승’은 용기를 북돋우고 의지를 불태우도록 격려하고 저마다 삶의 제 궤도를 찾아가도록 힘쓴다. 스스로가 가진 역량만큼의 날개를 갖게 하고 그걸 인정하도록 함으로써 용기는 스스로 피어나고 의지는 스스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걸 일깨워준다.

아무튼(?) ‘스승’과 그의 제자들은 현대사회에 만연한 부조리함을 몸으로 느끼고 체험해나간다. 그렇게 내적으로 성숙하고 영적으로 충만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변화되어 가는 자신을, 내면의 세계를 제대로 보는 눈을 갖게 된다. 예수의 삶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또한 그의 열두 제자들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들의 발자취에서 예수의 삶과 열두 제자가 떠올랐다. 그네들의 발자취는 현대판 영적 순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이 소설은 우화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다 분량도 생각보다 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꿈을 파는 사람’ 즉 ‘스승’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화자 역시 시시각각 자신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과 ‘스승’이 일으키는 기적(?)을 통해 심적 변화를 고백하고 그를 믿고 따르면서도 늘 ‘스승’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에 목이 탄다. 그 목마름이 해소되는 순간! 화자는 격심한 혼란을 경험한다. 아마도 ‘스승’의 정체가 밝혀지는 종반부는 정말이지 드라마틱하면서도 허무한, 장엄하면서도 김빠지는 듯하지만, 어쨌거나 가장 인상적이고 느낀 게 많은 장면이 아닌가 싶다.  


하나를 더 들자면, 화자의 심리변화가 우화적인 이야기에 걸맞지 않게(?) 아주 더디다는 것일지라. 말인즉슨, 순차적으로 화자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긴 하지만 여느 우화에서처럼 모든 상황을 수긍하면서 혹은 단번에 확!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랄까, 생각보다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아주 충실했다고나 할까. 순식간에 모든 삶, 생각이 변화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물들어가듯, 그 과정 속에는 여전히 불신과 의심이 내재되어 있는 채로 변화한다고 할까.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고 궁금증을 양산하면서도 영적 가르침을 따라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변화하는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 화자의 시선은 인간 본연의 모습, 그런 심적 상태에 충실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끝으로, 몽환적이면서도 선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한 박항률의 그림이 책 중간 중간에 독립된 작은 페이지로 삽입되어 있다.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이야기의 내용과 분량 사이를 그림이 적절하게 조율함으로써 중간 중간 쉬어갈 수 있는 ‘쉼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야기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표지와 삽화라고 생각했었지만, 전체적으로 참 괜찮은 조합이다 싶었다. 박항률의 그림을 적절하게 조합한 기획과 편집이 책을 다 읽은 후 참으로 인상 깊게 남는다.   

 

 

***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곳은 어떤 곳인가. 어떤 의미를 갖는 세계인가.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는 세계의 모습과 현재는 얼마나 닮았는가. 우리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우리는 ‘정상인’인가 ‘비정상인’인가. 우리가 손가락질 하는, 그런 질타와 소외를 한 몸에 받으며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째서 ‘비정상인’이라고 부르는가. 어쩌면 ‘스승’이 말했듯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아주 거대한 ‘정신병동’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 정신병동에서 정상인처럼 행동하는 ‘비정상인’에 불과한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경쟁, 불신, 다툼, 선긋기 등도 불필요한 이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정상이라고, 정상인이라고 발악하면서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정상이 뭔지 비정상이 뭔지도 모른 채 이기심 하나를 위안 삼아 정상인 척 하는 ‘비정상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곳은 정녕 어디이고 무엇이며, 어떤 곳인가.

‡‡‡‡‡‡‡‡‡‡‡‡‡‡‡‡‡‡‡‡‡‡‡‡‡‡‡‡‡‡¨¨주워 담기¨¨‡‡‡‡‡‡‡‡‡‡‡‡‡‡‡‡‡‡‡‡‡‡‡‡‡‡‡‡‡‡

 

“이름 없는 청소부와 할리우드 배우 중에 누가 더 갈채를 많이 받을 자격이 있는가? 정신세계가 더 복잡한 사람은 누굴까? 역사적으로 볼 때 누구의 정신세계를 해독하기가 더 어렵겠나? 사실 아무 차이가 없다네. 둘 다 똑같아. 하지만 ‘정상인’은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지.”(p62)

========================================================================

나는 주위를 돌아보며 사회체제 때문에 우리 모두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고 사는지 깨닫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은 사회가 원하는 소비를 하면서 자동화기계나 로봇 같은 삶을 살고 있다.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삶이다. 마치 생각은 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는 데에만 익숙한 전문가들처럼 살고 있다. 그야말로 정신적인 혼란을 가중시킬 뿐인 삶이다.(p75)
======================================================================== 

 

“젊음과 늙음 사이의 시간적인 차이는 생각보다 짧다네. 나이 든 사람들의 세계를 탐구하지 않는 젊은이는 청춘을 즐길 자격이 없지. 인간은 심장이 멈출 때 죽는 게 아니라,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마음을 잃어버릴 때 죽는 법이라네.”(p167)
========================================================================

사회는 가장 음흉하고 치명적인 함정을 준비했다. 여자들의 현명함과 삶의 훌륭한 감각을 찬양하는 대신 여자의 몸을 찬양하는 데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자의 몸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겉보기에 여자들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것 같지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p214)
=======================================================================

 

오늘날의 사회체제는 새로운 노예들을 양산하고 있다. 그들 뒤에는 자식과 아내, 친구와 꿈이 남겨졌고, 그들 앞에는 변화무쌍하고 불확실한 미래와 치열한 경쟁, 강제적인 정신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과거의 노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높은 임금과 복지 혜택들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꿈을 파는 사람’이 우리에게 말했듯 역사는 돌고 있는 셈이다.(p289)

======================================================================== 
 

우리는 추상적인 진리로 과학을 배신했으며, 학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그들을 배신했다. 또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배신했다. 그리고 사람을 유대인, 팔레스타인인, 아메리카인, 유럽인, 동양인, 백인, 흑인,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등으로 나누며 인류를 배신했다. 결국 우리는 필연적으로 꿈을 살 수밖에 없는 배신자들이다.(p319~p320)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샬롯 2009-10-05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YES24도 하는데..ㅋㅋ 거긴 안하시죠?? (사실 북카페도 하고..ㅋㅋ혼자 뭐 많이 하는 스타일이에요.ㅋㅋ) 거기에선가 드림셀러 독서감상문 행사했는데....^^ 아꿉다. 이 글 지원했음 바로 당첨인데...제가 원래 안 읽은 책 리뷰 안 읽는 것 아시죠.ㅋ 그러나 특별히 읽어준다...ㅋㅋ 뭐야. 쟤 싶으시죠..ㅋㅋ

ragpickEr 2009-10-22 22:20   좋아요 0 | URL
예스24..그 동네는 아직 안하는데요..아마도 조만간 만들 것 같아요..^^*;
이벤트로 받은 책이 하나 있는데 그 동네에도 리뷰를 좀 올려달라고 해서..;;ㅋ 여기 저기 많이 하시나봐요~^^* 으흐흐~

아깝긴요..;; 이런 낙서를 어따 써요..;; ㅋㅋ

고마워요~^^*; 읽어주셔서~헤헤..

에샬롯 2009-10-0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쉼표 팔고 싶으네요.^^

ragpickEr 2009-10-22 22:20   좋아요 0 | URL
쉼표..^^*

충분히 많은 분들께 쉼표를 공짜로 나눠주고 계신 거 다 알아요~후훗..
복받으실 거예요~헤헤..

늘 건강하셔요~^^*
 
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죽음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다.

무엇이 어찌될지 모르고, 어디에 캠프를 쳐야 할지,
거기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죽어 가는 과정에 관해 썼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죽어 가는 이를 어떻게 보살펴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은,
곧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고 언제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인생을 배우는 일이다.
버텨 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이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계속될지 모른 채로 살아가는 일이다.

나는 원래의 내 방식과는 다르게,
그 익숙하지 못한 낯선 삶의 조류에 대항해 헤엄쳐 나가기보다는 그저 떠내려가듯 살았다.
..  


∥..본문 中..∥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난 후 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힌 이유 때문도, 절망의 한 켠에 그대로 방치된 것 같은 이유 때문도 아닌데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가 이렇게 어렵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그저 멍한 상태가 되었다고 하는 게 조금은 솔직하고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담긴 어떤 절망과 고뇌, 아픔과 슬픔이 나를 옥죄는 덫으로 작용한 게 아니라 이 모든 감정선을 훌쩍 뛰어 넘어 마치 넋이 나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라고 한다면, 나만 이해하는 표현에 불과한 것일까. 

 

『어머니를 돌보며』는 파킨슨 병에 걸린 어머니를 돌본 7년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절절한 모녀간의 사랑과 보살핌이라는 내용으로 가득한 책이 아닐까, 하고 읽기 전에 생각했었다. 만약 내 예상이 적중했다면,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가 꽤나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그 이상의 것이라기보다 7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삶과 죽음, 인간이라는 존재, 이성과 감성, 육체와 의식, 시 · 공간에 대한 성찰이 담담하고 빼곡하게 담겨 있다.

밤낮없이 환시에 시달리고, 시간과 공간을 인지하는 능력을 상실해가는 저자의 어머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존재마저 인식하지 못하고 표현능력까지 상실해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저자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누구나가 말하듯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며, 어느 누가 ‘아름다운 희생’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자식된 당연한 도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당사자의 문제이다. 그리고 주변 이웃들 친지들이 너무나도 쉽게 내뱉는 말들조차도 당사자에겐 크나큰 고통의 한 조각일 뿐이다. 하기 좋은 말, 응당 그렇게 해왔던 말이 당사자에겐 어떤 현실적인 도움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어느 날 불현듯 불어 닥친 이 고난의 시간을 담담하고 현명하게, 때론 지혜롭게 해결해 나간다. 파킨슨 병에 관한 의학 자료를 수집하고, 시간에 맞춰 약을 챙긴다. 하루에도 몇 군데씩 병원을 예약하고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 수 있는 곳은 부지런하게 찾아 검진을 받는다. 결국 심장병 수술을 받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돌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노인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보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손쉽게 내린 결정만은 아니었다. 한없이 밀려드는 자괴감과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크나큰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결코 자신의 선택을 최선이었다고, 항변하거나 변명하지 않는다. 다만 선택은 삶에서 불가피한 것이며 오직 선택 그 자체의 중요성만이 아니라 그 선택으로 인해 앞으로 어떤 미래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노인 요양원으로 부모를 보내고는 일 년에 한 번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리 매일 같이 어머니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어머니가 최대한 편리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힘쓴다. 어머니의 성격을 고려해 부분 부분이나마 생활 패턴을 조율하고 건의하는 모습은 우리가 ‘희생’이라는 단어나 ‘사랑’ 혹은 ‘헌신’이라는 단어로 쉽게 치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저자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 아주 인간적인 모습 그대로를 스스럼없이 써내려간다. 화가 날 때도 있었으며 어머니를 원망할 때도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저 거짓 없이 모든 속내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내보이면서 좀 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이끌어 냈다는 것이다. 어머니나 아버지, 자신, 남편이 한 인간으로써 겪는 고통에 대해, 한 인간으로써 감내해야하는 존재의식과 존재이유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해나간다. 어쩌면 꾸밈이 없다는 것으로부터, 가장 솔직한 인간의 속내로부터 이러한 성찰은 가능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통을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니까, 자신된 도리로써 당연한 것이니까, 헌신이나 희생이니까 하는 자기부정이 아니라 ‘인정’을 통해서였기에 고난의 시간이 성찰의 시간으로 빛을 발한 게 아닌가 싶다.

 

*

덧붙여, 저자와 어머니를 통해 안타까운 현실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노년의 삶이란 병들고 쇠약하기 마련이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노년의 삶은 무수히 많은 병원을 전전하고 갖가지 약과 처방으로 점철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아프고 안타깝게 다가왔다. 하루에도 몇 군데씩 혹은 몇 십 군데씩 병원을 예약하고 진료를 받으며 거기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하고 의료혜택을 염두에 두어야하는 노년의 삶이란 얼마나 불행한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서도 평온하지 못하고 더욱더 치열하게만 느껴지는 노년의 삶을 보면서 나는 소름이 돋을 만큼 치가 떨렸다.

죽음이란 과연 두려운 것에 불과한 것일까. 두렵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떤 ‘축제’의 한 형태처럼 특별한 무엇일까. 특별하지 않다, 라면 과연 죽음이란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일까.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단순하게 죽음은 삶 속에 있으며 자연스러운 것일 뿐이다, 라고 쉽게 말하고 생각해온 나를 질책하게 된 것은 저자가 보여준 끝없는 자기갈등과 고통 속에서 어렵사리 길어 올린 삶과 죽음, 인간의 존재 등에 대한 성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스스로 나름의 정의를 내리는 그 과정이 얼마나 치열하고 힘든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나의 손쉬움과 가벼움이 어리석게만 보인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샬롯 2009-07-2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은 슬플 것 같아서 보기 싫어요.;; 책 안 읽으려는 핑계죠.^^ㅋ

에샬롯 2009-07-29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을 돌보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 부모의 도움이 없었다면 사람이 되지 않았을 거니까요. 적어도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선 3년은 걸린다잖아요.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삼년상 치르는 거구요. 내가 의지가 없었을 때 나를 돌보아주신 것처럼 부모님이 의지가 없으실 때 돌봐드려야죠. 그래야 사람인 거죠. 부모가 아이에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부모가 아이를 돌보는데 이유가 없었듯 말이죠. 뭐 이 책에선 저자가 어머니 요양소에 보냈나보네요.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른 거니깐 상황에서 최선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어머니의 병에는 전문적인 요양소가 더 적합할 수도 있고요. 어머니에게나 딸에게나...이런 이야긴 마음이 안 좋아서 싫어요. ㅜㅜ;; 사람은 한번은 죽기 마련이지만..ㅜㅜ;; 어머니도 안타깝고 딸도 안타깝고...내게 그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이 싫고..;; 그렇습니다. 부모님께 잘하자는 마음이지만 별로 잘해드린 것도 없는 것 같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샬롯 2009-07-2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셉의 집에요. 노인요양소가 있는데요. 한달에 한번씩 목욕봉사해요. 저 말고 제가 아는 사람이요.^^; 그분이 어떤 할머니 씻어드리는데 할머니가 그러시더래요. 자식들이 서울에 사는데 재산 다 뺏들고 자기를 여기에 보냈다고요. 사람은 누구나 늙고 죽는데...자식분들 늙어서 할머니와 같은 대접 자식에게 받음 어쩌려고...아 저의 스승님께서 그랬어요. 친구 말이죠.자신의 가족에게 잘못하는 친구는 사귀지 말라고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그런데 하물며 남인 친구에겐 어떻겠냐고요. 그건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사람은 배울 점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것이 뭐 뛰어난 점 이런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배울 점이요.^^ 그러고 보면 넝마님껜 배울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가르쳐 주세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조은 지음, 최민식 사진 / 샘터사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언젠가 binsante님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적에, 주제가 사진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다. 그때 작업실 한구석에 높다랗게 쌓인 책 더미 속에서 한 권의 책을 보여주셨다. 이 사람 사진을 참 좋아해요, 하시면서 내게 소개해준 책은 다름 아닌 사진가 최민식의 사진에 시인 조 은이 글을 단『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였다. 마침맞게 최민식의『사진이란 무엇인가』를 야금야금 보고 있던 나로서는 또 한 번 일상의 오묘함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율이란 마치 파울로 코엘료의『연금술사』의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가 순례를 거듭하며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과 닮은 구석이 있다. 나를 찾아가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지혜를 얻으면서 느끼는 일상의 소소한 변화와 그 다채롭고 오묘한 빛깔이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그런 전율! 감히 생각건대, 수없이 오간 binsante님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지금 이 순간 기억을 더듬거리며 찾아낸 것은 영혼이 닮은 이를 위한 응원과 희망의 메시지, 그것이 곧 일상 속 오묘함이고 전율의 전조가 아니었나 싶다.  


*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는 사진가 최민식의 사진에 시인 조 은이 글을 단 작품이다. 이 시대 최고의 리얼리티와 휴머니즘의 대명사라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투철한 정신이 배어있는 그의 사진 위로 세밀하고 탄탄한 시인의 감수성이 은하수처럼 펼쳐진 작품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오버하는 꼴일까. 단언컨대, 결코 내가 오버하는 것 같진 않다. 이처럼 멋진 궁합이, 조합이 어디 있으랴! 하나의 세계를 각기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다른 형태로 표현할 뿐, 이 둘의 오감은 처음부터 같은 것을 느끼고 있으며 마치 영혼의 닮은꼴처럼,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한 방울의 물과 물이 만나 새로움도, 어떤 변화도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이 둘의 이성과 감성의 조합은 엄청난 힘을 표현하고 이끌어낸다.  


냉철한 시각, 하지만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사진가 최민식. 반대로 절대 냉철할 수 없을 것 같은, 한없이 유약한 듯 보이지만 아주 세밀하고 촘촘한 감수성을 가진 시인 조 은. 이 둘이 이끌어낸 것은 무엇일까. 잔잔하면서도 처절한, 확고하면서도 유연한 이 둘은 실로 엄청난 힘을 빚어낸다. 이 둘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끌어내고야 말았던 그 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 힘이란 진부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누구나가 입에 올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른 시각으로 풀어낸대서 찾을 수 있다.

이 둘이 풀어내는 사랑은 충격적이고 색다른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 신선하면서도 아주 익숙한 사랑의 본래 모습일 뿐이다. 사랑, 그 속에 감춰진, 우리가 간과하거나 동정이나 연민 따위로 이름 붙인 또 다른 하나의 사랑을 그저 들춰내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자문하게 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골 깊은 관념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정녕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현실적이고 주변을 둘러보게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이것이 이 책이 주는 감동이고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이 둘은 책이 출판되기 전까지, 물론 그 이전에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뿐더러 전혀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고 한다. 출간 직전 책 속에 들어갈 사진 촬영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 만났다고 한다. 서로 알지도 못한 채 단 한 번 보지도 못한 이 둘의 세밀한 교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서로 각기 다른 시공간 속에서 다른 시대와 삶을 걸어온 이 둘은 닮은 영혼, 적어도 영혼의 민감성이 긴밀하게 잇닿아 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책 속을 흐르는 이 둘의 교감은 정말이지 미스터리에 가깝다고 할 만큼 긴밀하면서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시인 조 은은 인간의 불행을 악성바이러스라고 말한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악성바이러스가 다시금 불행을 이기는 항체 역할을 하고 기필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진가 최민식이 가난과 불행을 온 몸으로 떠안은 체 기필코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사진에 담았더라면, 그의 사진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저 불행의 한 단면, 악성바이러스로만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진은 물론 작가에게도 지난한 작업에 불과했을 것이며, 생명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최민식의 사진을 통해 불행이라는 악성바이러스를 만난다. 또한 그것을 이기는 항체 역시 만나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인 일이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사진이 철저한 리얼리즘을 통해 얻은 사진의 생명성과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삶의 진정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그저 불행의 한 단면, 그 순간을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이 둘의 철학과 메시지 그리고 인간 대 인간을 뛰어넘는 영혼의 교감을 엿보고 들으며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늦은 밤 나는 생각한다. 진정으로 이 세계에 만연한 불행의 씨앗들이 궁극적으로 피워 올려야 할 것은 무관심과 이기주의를 살포시 보기 좋게 덮어 체면을 차리는 연민이나 동정이라는 악성바이러스가 아니라 관심과 사랑이라는 ‘끌어안음’의 인간적인 항체가 아닐까 싶다. 어둠과 추위와 폭풍우 속에서 하나의 희망이라는 초를 켜 올리기 위해서는 기필코 우리는 살포시 끌어안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주워 담기¨¨‡‡‡‡‡‡‡‡‡‡‡‡‡‡‡‡‡‡‡‡‡‡‡‡‡‡‡‡‡‡ 

 

가족이라는, 이웃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만이 어둠을 역전시킵니다.(p124)
====================================================================  


구불구불한 길에 뒤덮인 저 육체!
산다는 것은 제 몸속에 길을 내는 것입니다.(p1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