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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지나간다
구효서 지음, 김홍희 사진 / 마음산책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순전히 사진가 김홍희 때문이다. 김홍희 때문에 그의 흔적이 있는, 숨결이 녹아 든 사진이 담겨 있다는 이유, 그것만으로도 무작정 책을 구하기에 충분했다. 인터넷 헌책방에서 마침맞게 한 권을 구해서 사진만 연신 훑었다. 책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나는 조금이나마 그 흔적을 벗겨내려고 박박하게(?) 굴었다. 어리석은 짓이었지! 제목을 보라! ‘인생은 지나간다’가 아니던가! 때론 지나간 시간을 오롯이 간직할 줄 아는 지혜는 책에 깃든 세월과 소소한 흔적들 그리고 콧구멍으로 들이켜 마셔도 죽지 않을 만큼의 먼지를 음미하고, 감상하고, 털어내지 않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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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지나간다』는 우리 곁에 늘 있고 익숙하다 못해 시시하게 느끼는 모든 사물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야기란 ‘옛’이야기이며 현재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통로’라는 소임을 다하고 있는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사물이란 때론 지금은 보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고 지금도 역시 흔하디흔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에 산재한 많은 사물들 혹은 이젠 우리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물들 모두가 나름의 의미를 넘어서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일지라.
우리 곁에 널려 있는, 많은 사소한 사물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중층적 정보들로 가득차 있을뿐더러, 생명과 존재가 연출하는 ‘삶’의 충실한 반영자며 증거물이다.(p11)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많이도 만만하게 사소한 사물들을 등한시 하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그렇다. 사물이란 어쩌면 단지 도구로써의 역사적 증거물이기보다 한 인간 아니 인류 전체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인류 생활사의 단면이요, 인류의 삶의 패턴을 읽어낼 수 있는 정보로 가득 찬 삶의 지질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사물의 변천사는 곧 인간의, 인류의 변천사를 대변하는 게 아닐까. 과거를 지나 현재 그리고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이 산재해 있다는 걸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나 있나 모르겠다.
하나의 사물. 그 존재와 인간을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이 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쓰임을 바꿔가면서 선명한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볼품없이 버려졌다가도 어느 누군가를 통해 새로운 쓰임과 의미와 해석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묵묵히 인간보다 더 충실하게 삶을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인간의 기억 속에서 혹은 그날그날의 계획의 범주로부터 배제되는 그 순간에도 도처에 널린 많은 사물들은 역사성을 갖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간은 역사라는 광대한 흐름 속에서 늘 ‘과거’ 아니면 ‘미래’에 속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현재’라는 이 시점이란 인간에게는 영원한 딜레마일 수밖에 없지만, 사물은 언제나 이 흐름 속에서 늘 ‘현재’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역사의 증거로 존재하는 건 아닐는지.
이 책은 어휘의 풍부함을 맛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내가 워낙 어휘력이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다. 늘 어려운 책은 거들떠보지 않는 내 고약한 독서습관 혹은 그런 편식에 익숙했는데 이 책을 통해 어휘의 풍부함이 선사하는 ‘글맛’ 혹은 ‘문장맛(?)’을 느낄 수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자동차」와「주전자」를 주제로 한 이야기가 특히나 재미있었다. 짧은 삶을 살은 내게 페이지마다 꽤나 소중하고 흐뭇한 추억이 많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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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nsante님 작업실에서 ‘사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게 생각난다. 그때 오갔던 대화중에 모든 사물은 우리네 기억과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물을 작은 여유를 가지고 5분 동안이라도 응시하고 마주하게 될 때면 까맣게 잊고 살다시피 한 나도 모르는 옛 추억과 조우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런 추억과의 조우를 틈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기억하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가는 사진을 찍는지도 모른다 등등의 대화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국 어떤 기억도 추억도 인간의 의식의 한 형태로서 존재하기에 끊임없는 창조의 밑거름이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쩌면, 사물은 기억을 틈타 추억 속으로 흐르고 추억은 다시 기억으로 저장된다, 저장된 추억은 내 속에 들끓는 어떤 열정 혹은 의지와 맞물려 의식화되고 어떤 행위를 낳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 행위란 아마도 창조적 행위, 작은 몸짓에 불과할지언정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그런 행위가 아닐까. 삶이라는 미완의 징검다리를 끊임없이 잇고 기어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 그 시발점에 사물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인생이란 지나가고 지나오는 건지도 모를 하나둘 엮인 징검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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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핸드백 속에 누구나 손거울 하나쯤은 갖고 다닌다. 아예 거울이 파운데이션 케이스에 부착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것은 무엇일까. 누구일까.(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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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그렇게, 하나씩 없어지는 걸 겪는 것이다.(p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