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희 몽골방랑 -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김홍희 지음 / 예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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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홍희와 떠나는 방랑길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설레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면서 그렇다고 스릴이 잔뜩 담긴 것도 아닌, 꼬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그와 함께 떠돌이 방랑객이 된다는 건 늘 기분 좋은 무엇으로 가득하다. 정처 없이 떠나고 기약 없이 발걸음을, 대책 없이 젖어들고 스며드는 그만의 흔적들은 정말이지 하나하나가 놓치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것일지라.  


『김홍희 몽골방랑: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제목 그대로 몽골을 휘젓고 다닌 그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말을 타고 몽골의 초원을 멋진 자태로 뽐내면서 흔적을 새겨나가는 게 아니라, 고물 지프차를 타고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건조한 사막에 길을 내며 몽골 너머의 몽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길’이라는 근원적인 물음과 시 · 공간 그리고 ‘나’ 혹은 ‘너’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철학을 몽골 방랑길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에서 김홍희에 대해 또 하나 알게 된 게 있다면, 그는 지극히 낭만적이면서도 시쳇말로 ‘산통 다 깬다!’고 할만치 솔직하다는 점이다. 가령, 입에 맞지 않는 기름기가 둥둥 떠다니는 몽골식 국수를 ‘이해’라는 소화기관을 통해 섭취하기보다 차라리 생라면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생수 한 병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낫다는 식의 솔직함을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이 ‘솔직함’이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부족’이라는 설익은 여행자의 자질도, 방랑객의 고집스러움도, 맹목적인 배타성도 아니다. 그는 단지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강요할 수도 없는 문화의 상대성을 ‘존중’하기에 솔직할 수 있었고, 선택에 있어 지극히 솔직한 하나의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워하지 않고 그리워해본 적조차 없다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감성과 감각과 이성을 넘어 태초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포기한 것이다.(p12)  


그리워하지도, 그런 적조차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에게 그리움이란 가슴앓이 혹은 열병과도 같다고 종종 느낀다. 마치 가슴이 녹아내리고 미어지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그런 서글픈 쾌락이랄까. 가령 누군가를, 어떤 존재에 대한 통제할 수 없고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들곤 한다. 단순한 그리움으로 시작한 이 감정은 그리움의 ‘형태’에서 그 ‘정체’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간다.  


조금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나는 스스로를 그리워한다는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자신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그리움이 어느 곳, 어떤 외부에서 밀려들어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지만, 그리움은 이미 내 속에서부터 뻗쳐 나와 내가 인식하는 모든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막상 내 주변에 흩어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듯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확인, 나라는 존재가 그리움에 휩싸여 있는 이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 그리워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 대한 그리움인 것이다.  


바깥에는 내 생에 한유했던 어떤 비밀의 오후가 멈추려 했다. 나는 얼른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의 셔터는 깜박이는 눈과 같다. 어떤 것을 보는 순간은 뜬 눈이지만, 메모리가 되는 시간은 눈을 깜박이는 탄지의 순간이다. 그러니 실제로 촬영되는 어떤 광경이란 실제로는 사진가가 보지 못하는 순간이다. 그것이 카메라의 숙명이자, 사진가의 운명이다.(p20~p21)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부제에 대한 의문이 순식간에 풀리는 구절이다. 왜 김홍희는 실컷 잘보고 기록으로 남기고 했으면서도 무엇도 본 게 없다고 하나 싶었다. 카메라의 숙명이자 사진가의 운명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정말이지 전혀 의심하지도 않았던, 어쩌면 김홍희가 아니었다면 평생을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그래 나는 이 사진 속에 있는 것들을 보았지! 하는 착각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사진이 찍히는 그 순간,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셔터가 끊어지는 순간, 우리의 디지털 카메라 LCD 혹은 여타의 뷰파인더는 우리 눈에 무엇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잠시잠깐 까만 어둠을 선사할 뿐이고 우리는 그 어둠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지 못한다. 그 어둠의 순간 너머의 영역은 오직 카메라의 렌즈만이 관할하는 하는 영역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짧은 어둠의 순간과 오롯이 마주하고 있을 때, 정작 내가 분명하게 봤고 찍기까지 했다고 착각한 그 결과물은 사실상 내 눈이 아닌 카메라의 눈만이 선명하게 보고 기억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일상에서의 일탈로 구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를 굳건히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일상 속에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고 일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삶. 그것이 진정한 자유다. 일상을 버린 존재 확인도 없고, 일상을 버린 자유도 없다. 일상 속에서 일상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다.(162~p163)

일상을 벗어나는 것, 소위 ‘일탈’이라고 부르는 그 어느 곳이든 자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자유란 구질구질하고 단조롭기 그지없어 지루하고 밍밍하기까지 한 일상이라는 굴레 속에는 절대로 자리 잡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방랑자의 발걸음은 일상과는 전혀 다른 이상향이라는 구름 위를 산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김홍희 역시 자신의 일상과는 다른 풍경 속에서, 그것도 방랑객으로써 내딛는 그 흔적들이기에 자유를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자유란 그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자그마한 내 방에도 자유가 있고 심지어 학교나 군대에도 자유란 존재한다. 다만,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때 자유란 어디든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가 아닐까.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란 불가능하니까. 결국 관계란 것은 일상이라는 시 · 공간을 배제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숨 쉬고 사유하고 인식하는 ‘나’라는 존재의 참모습을 확인시키고, 그 곳에 자유를 흩뿌리는 씨앗과 같은 게 아닐까.  

 

*

햇귀님께서 선물해주신 영화『NEVER CRY WOLF』에서 주인공이 벌거벗은 채로 광활한 대지를 가득 메운 카리부 떼 속을 미친 듯이 휘젓고 달리는 명장면이 나온다. 대자연이 선사하는 꾸밈없고 자연 그 자체의 신비로움이 가져다주는 감흥에 젖어 태곳적 인간이라도 된 양 질주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감동 그 이상이었다. 김홍희 역시 몽골의 광활한 대지에서 메뚜기 떼를 온몸으로 받으며 내달렸다. 한 올 한 올 벗어던지기 시작한 옷들, 몽골의 대자연이 주는 감흥에 빠진 그에게 옷은 거추장스러운 부장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껏 벗어던지고는 몽골의 초원을, 사막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친 듯 내달린 김홍희의 흔적은 정말이지 인상 깊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친구 녀석이 가진 소위 ‘발로 찍어도 예술작품이 된다!’는 최신 카메라를 부러워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카메라를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그네들이 담아내는 결과물을 볼 때마다 시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발로 찍어도 심지어 애완견이 실수로 셔터를 눌러도 예술작품처럼 결과물을 쏟아내는 카메라보다 김홍희처럼 미소만 살짝 지어도 스스로가 예술작품의 한 풍경이 되는 그런 방랑자를 더욱 흠모하게 되었다. 내딛는 발걸음들이 불어오고 가는 바람결에 그 흔적이 사라져버린대도 그 속에 녹아들어 스며든 방랑객이라는 존재를 더욱 동경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이 책 말미에 인용된 몽골의 시가 인상 깊게 남는다. 문학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나는 왜 여태 깨닫지 못했을까. 몽골에 시인이 있다는 게 어떻게 이리도 생경하게 느껴졌을까.『몽골현대시선집』에 수록된 몇몇 인용된 시를 보면서 김홍희가 절절하게 느꼈던, 말하고 싶어 했던 생각이나 철학을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오랜만에 김홍희와 함께 한 방랑길, 끝없는 초원과 사막을 내달리는 고물 지프차의 운전수가 되고 싶었다. 생라면을 와그작와그작 부셔 먹는 그를 조수석에서 연신 지켜보고 싶었다. 캑캑거리길 기다렸다가 냉큼 물 한 모금 대령하고 팠다. 꺼내 문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댕겨주고 싶었으며, 가려줄 거라곤 하나 없는 그 광활한 대지 어느 한 점에 나란히 바지를 내리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그곳에 영역표시(?)를 하고 싶었다. 이처럼 그란 사람은 늘 나를 애끓게 한다. 김홍희의 다음 방랑길을 기대하며 애끓는 마음을 추슬러본다.  


‡‡‡‡‡‡‡‡‡‡‡‡‡‡‡‡‡‡‡‡‡‡‡‡‡‡‡‡‡‡¨¨주워 담기¨¨‡‡‡‡‡‡‡‡‡‡‡‡‡‡‡‡‡‡‡‡‡‡‡‡‡‡‡‡‡‡

그때 참바가라브 산을 오르기 전에 찍은 신기루가 나타났다.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구나’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신기루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증명의 사진도 아니었다. 신기루를 보고 황홀경에 빠져 있던 과거 시간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그 순간에 빠진 황홀경의 감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감흥은 더 증폭되어 현재 나에게로 전이 되었다. 눈으로 보는 사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고스란히 찍고 전이시켰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선 짜릿한 교감이었다.(p146)  


몸을 위해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의 평온을 위해 스마일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p181)  

 

=>방랑의 세 가지 조건!

“시장만 있으면 정부는 없어도 좋다.”
삶이 있고 활기가 있고, 나눔이 있고 보탬이 있고, 배려가 있고 여유가 있다면 우리는 통제하는 그 무엇이 꼭 필요하더란 말인가.(p238)

=>방랑이기에 가능한 진정한 자유의 맛이 아닐까? 경계도 허물고 시 · 공을 초월한 자만의 짜릿한 맛!  


인간의 본질을 묻고 본연의 자아를 묻던 이들은 모두 별이 보이는 곳으로 갔다. 이제 도시에서는 별을 볼 수가 없다. 별 대신 반짝이는 것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다. 도시의 인간들은 인간의 본질을 묻고 본연의 자아를 물을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오직 네온사인을 켤 수 있는 돈에만 얽매여 하루하루 생존해나가는 슬픈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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