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중인 夢中人 - 사진, 내가 버릴 수 없는 이야기
이홍석 지음 / 바우하우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요즘 내가 생각해도 사진집을 많이 보는 것 같다. 보통 도서관에 가면 세 권의 책을 빌려오는데 그 중 많게는 두 권 정도가 사진집이니 말이다. 예전에는 죽어라(?) 안 보던 사진집을 요즘은 아예 코를 박고 사는 것 같다. 우리 집과 가까운 성서캠퍼스에는 사진집이 적어서 대명동캠퍼스(예술대학이 있는)까지 발품을 팔아야 할 때도 있지만, 그 귀찮은 것까지 감수하면서 사진집을 탐하는 요즘, 내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완전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夢中人』은 제목에서 먼저 끌렸고,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사진가 이홍석의 포스(?)에 매료되어 접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깜짝깜짝 놀란 점이 있다. 먼저 사진가 이홍석의 나이에 놀랐다. 불혹을 넘긴 나이라니! 분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그 멋진 포스를 봐서는 전혀 마흔을 넘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책을 반 가까이 읽고 나서 알게 된 이 충격적인(?) 사실이 이 책에 더욱더 빠져들도록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다음으로는 그의 사진과 글에서 풍기는 ‘데자부(?)’ 현상이랄까. 처음부터 나열된 사진들은 참으로 낯이 익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예전에 읽었던 조병준 시인의『따뜻한 슬픔』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피사체가 동일한 것도 있고 그 구도까지도 흡사해서 ‘이거 내가 이미 본 책이던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한 사진이 한둘이 아니었다.  


글에서 역시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사진가 김홍희의『방랑』,『나는 사진이다』에 녹아 있는 삶과 사진, 여행에 대한 철학과 잇닿은 느낌이랄까. 특히나 여행을 ‘자아를 방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홍석의 여행철학과 ‘어쩌면 나는 사진과 방랑을 통하여 나의 절대적인 善을 이루려 하는 구도자인지도 모른다.’는 삶에 관한 성찰적인 모습에서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우리 모두는 삶이라 불리는 각자의 길,
그 끝없이 이어진 여정 위에 서있는 외로운 여행자들이다.
너 나 없이 우리는 그렇게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안식처를 찾고,
또 아침이면 다시 길을 떠나야 하는 외로운 여행자들인 것이다.(p16)  


그와 함께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 그는 이렇게 단정해버린다. 우리는 모두 ‘외로운 여행자’라고 단정함으로써 빼도 박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와 함께 여행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는 이처럼 영특한 듯, 조금은 간사하게 자신의 발걸음에 ‘우리’를 꼬리처럼 달고 여행을 시작한다. 이렇게 그와의 방랑은 하릴없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날이 있다.
무언가를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머리가 더 텅텅 비어가는 그런 날이었기에 나는 내게 작은 휴식을 선물로 주기로 했다.
오늘은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무위도식을 즐기자!(p97)  


불혹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책임한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그 힘과 용기는 대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무위도식을 즐’기자니! 그렇다. 어쩌면 나는 여태껏 여행과 방랑이라는 이 두 단어를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대책 없음’까지도 삶의 여유로,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화끈함! 오직 방랑의 길을 택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무모함이 아닐까. 온갖 것으로부터 사랑의 빛을 받아본 자만이, 그 의미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스치는 모든 것들에게 우연이란 없는 것이다.
길 위에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 그리고 흔들리는 잎사귀 밑에서 우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결코 우연한 스침은 없는 것이다!(p196)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사건(?)을 차근차근 줄여나간다면, 우연이 아닌 작디작은 모든 것들의 바람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값진 ‘필연’임을 깨달아간다면, 이 세상 속에서 나는 어떤 삶 속에 위치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우연이 줄고 필연을 늘여가는 것, 그것을 깨달아가는 것이 삶에 있어서 나 스스로가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게 아닐까. 내 삶에서 진정한 구도자가 되어가는 그 과정 속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우연의 참모습을 벗겨내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성찰이 아닐까 싶다.  


시인 조병준이 말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들과 그와 유사한 사진들, 그리고 사진가 김홍희와 닮은 방랑에 대한 철학과 확고한 생에 대한 신념. 이 모두를 합쳐 놓은 것만 같은 책이 바로『夢中人』이 아닌가 싶다. 이홍석은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 그치지 않고 역시나 그만의 사랑과 외로움과 방랑의 흔적을 새겨놓았다. 흥미로움으로 시작해 놀라움 속으로 나를 매료시킨 책, 특유의 긍정하는 삶의 원칙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불혹의 나이. 그 흔들림 없는 나이에 단언컨대 그는 불륜을 저질렀다. 아직도 끊임없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리라. 세상과의 간통을 당당하게 낱낱이 적어 내려갔으며, 사진으로 증거까지 남기는 그의 대담함(?). 여전히 그는 세상이라는 ‘만인의 여인’을 탐하고 범하기에 여념이 없음을 안다. 여행자, 그것도 불혹을 넘긴 이 여행자의 방랑은 온통 찬란한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다채로우며 눈물겹기까지 한 몸부림을 닮은 듯하다. 그렇게 아름답고 때때로 쓸쓸하기까지 한 세상과의 떳떳하고 대담한 불륜행각에 과연 어느 누가 그에게 간통죄를 씌울 수 있을는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는 언제나 세상과의 불륜을 즐기며 방랑하는 한줄기 뜨거운 바람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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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사랑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많이 가슴에 품을 수 있고, 더 오래까지 기다려주는 것.
그래야만 비로소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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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들어도 열대의 바다가 빙하로 뒤덮이지 않는 한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은 반짝이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의기소침한 예언 따위와 검은 월요일이 우리의 침대를 눈물로 적시지는 못할 거야!(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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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보톡스는
세월의 주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가득한
미소일 것이다!(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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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中에 가진 것 없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꽃처럼 살고 싶다.
속내 붉은 꽃잎은 붉은 물로 흐르고,
속내 푸른 꽃잎은 푸른 물로 흐르는 솔직함.
가끔은 그런 꽃처럼 살고 싶다!

누군가 어여쁜 이의 손에 '툭' 꺾여서 낡은 화병에 담겨
나른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도 좋을
그런 꽃으로 살고 싶다.(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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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삶도, 허망한 죽음도, 나와 당신의 병약한 가슴속에도 우린 모두 무언가를 묻어두고 산다.
그것이 한때는 찬란했지만 패배해버린 꿈의 잔해든, 사랑의 기억이든······.
미련해 보여도 조금만 더 오래도록 기억해주고 쓰다듬어줄 수 있다면
가슴 헛헛한 날에도 미칠 듯이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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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게 떠나지 않는 자에겐 가슴 시린 만남도 없다!
그리고 망설이는 삶은 언제나 그 자리일 뿐이다.(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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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따라 유연하게 흔들리되
결코 그 뿌리가 뽑히지 않는 지혜로운 파스칼의 갈대처럼
불혹이란 때로 그러해야 한다.(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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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것들은 외로운 것들끼리 서로 기대어 있을 때
세상은 비로소 세상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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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는 사진과 방랑을 통하여 나의 절대적인 善을 이루려 하는 구도자인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구도자라면 외로움쯤은 괜찮다!
세상과 조금 떨어져 고독하여도 괜찮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긍정이어야 하고, 사람에 대한 사랑은 늘 뜨거워야 한다!(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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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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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들 잊혀지고 싶겠는가!
누군들 마지막을 생각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그 봄, 나는 보았다.
너무 조촐하여 초라하기까지 한 꽃잎의 마지막 비행을 바라보며 나의 마지막도 그러하기를 소망한다.(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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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목적지는 단지 형식일 뿐,
진정한 여행이란 내 안에서 숨 쉬고 있는
또 하나의 자아를 방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떠나 왔다고 기뻐할 일도, 돌아갈 곳이 없다 하여 슬퍼할 일도 아닌
여행은 그저 느리게 걸으며 온전히 나를 사색하는 일이다.(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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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울때 너를 그린다
박항률 지음 / 효형출판 / 1997년 7월
평점 :
절판


이웃북로거이신 binsante님의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다. 여태껏 전시회를 손에 꼽을 만큼 밖에는 다니지 못한 나로서는 값진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뭐 하나 준비해간 것 없이 덜렁덜렁 시집 한 권 들고 찾아뵌 게 아직도 부끄럽고 실례를 범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그렇게 처음으로 접한 binsante님의 작품은 경이로웠다.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 있진 않지만 색색의 볼펜들이 꼬불거리며 일궈낸 작품들은 기법적인 면에서는 단연 신선하게 다가왔다.  


마음 깊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래도록 간직해온 또 다른 자신을 나무로 표현해낸 binsante님의 감성은 꼬불꼬불한 선이 전하는 것만큼이나 복잡·미묘하다. 그녀의 그림을 맞대고서 나는 엉뚱하게도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내 생의 원형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을 던졌던 것 같다. 광활한 대지 위에 ‘나’와 또 다른 나의 원형인 ‘나무’ 한 그루, 그것을 이어주는 좁지만 선명하게 뻗은 길 하나. binsante님의 작품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더듬거리게 하는 듯하다.  


그렇게 연이 닿은 binsante님의 부탁으로 박항률의『그리울 때 너를 그린다』를 구하게 되었다. 드리기 전에 먼저 읽어보았는데, 세상에나! 그 속에 새겨진 그림들을 보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그 구불하다 못해 꼬불꼬불한 선들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흡사했다. 그 기법만 놓고 본다면 전문가가 아닌 나처럼 일반적인 감상자들은 서로 다른 화가의 작품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닮았다. 나중에 책을 드리면서 binsante님도 몹시 놀라셨던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이럴 수가!  

 

*

이 책의 표지를 보면 어렴풋한 내 어릴 적 크로키에 대한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미술시간에 사람을 그리라면 졸라맨(?)을 그릴 만큼 미술에 재능이 없었고, 흥미 또한 없었다. 한데, 크로키에는 좀 흥미를 보였던 것 같다. 크로키장을 사서 집에서 스윽스윽 이것저것 그려본 기억이 난다. 윤곽만을 대충 그려내는 크로키에는 세밀한 터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게 나에겐 더없는 위안이 되었을지라.   

 

 

박항률의 그림 속에는 ‘실밥’ 같이 비저 나온 생의 ‘연’이 있다. 무심한 표정과 절망 혹은 회한이 그 슬픈 눈동자 속에서도 생의 ‘연’은 빛나고 빛난다. 실밥이 흘러 풀어져내려 바람에 나부낀들, 그것이 어찌 내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나와 무관한 것이라 어찌 무심할 수 있겠는가! 그는 보이지 않는 생의 ‘연’을 눈에 보이는 실오라기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 크나큰 여백 속에 ‘자유’의 이름으로 풀어놓은 게 아닌가 싶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모든 것은 서로 잇닿아 있으며, 그렇게 잇닿은 모든 것은 서로를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듯 한 기분이랄까. 내가 ‘너’를 바라보고 네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시선은 늘 나 혹은 너에게로 쉴 새 없이 달음질 치고 교차하고 뒤엉킨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 중 중요한 생의 단서가 아닐까. 어쩌면 박항률은 이러한 시선까지도 예의 그 실밥처럼 삐져나온 꼬불꼬불한 선에 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어들을 죄다 길어 올려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오롯하게 전해진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생의 근원적인 물음으로 시작해 그런 걸음걸음마다 채이고 새겨지는 흔적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 그로부터 얻어지는 의미의 조각들, 그렇게 시간 속에 갇혀버릴 것만 같은 어떤 두려움 등등 고뇌와 번민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꿈도 자유도 잃어버렸다.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흘러가는
시간 뿐이다.
생활은 무력해지고
영웅 없는 시대에 소인으로 살고 있다.
내가 욕망을 갖는 시간이란
하루 24시간 중에 단 1분도 없다.  


∥「욕망의 시간」중에서; p75∥

욕망으로부터 초연한, 즉 체념의 상태. 지독한 고독의 상태와 대면함으로써 전정한 예술적 혼을 불태울 수 있는 박항률. 그 속에서 그의 그림은 생명력이 넘치는 꼬부랑 선으로 탄생한다. 그 극단에서 길어 올린 가녀린 선들이 모이고 모여, 그런 무념의 선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일반 사람들의 욕망을 해소하는 듯하다. 욕망의 시간과 무념의 시간의 간극은 한없이 넓디넓지만 때론 이처럼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싶다.  

 

**

그림뿐만 아니라 박항률의 글에서 풍기는 생에 대한 생각들 역시 나와 닮은 것 같다, 고 binsante님이 말씀하셨다. 나이도 비슷하다고. 지금에야 고백하건데, 그림과 글, 생각, 나이까지 비슷하다 못해 흡사한 이 두 분을 보면서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한 몸을 하고 태어난 게 아닌가, 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그걸 지켜보는 나조차 이렇게 오묘하고 신비한 느낌을 받았는데, 당사자인 binsante님의 기분은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언젠가 이 두 분의 대면이 성사되고, 한 전시회에서 만나게 될 날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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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이 발그레하던 시절의 무모한 야망, / 꿈을 먹으리, 꿈을 먹으리. / 백년을 사는 하루살이처럼, / 해를 등지고 별을 잊은 채, / 하물며 뽀얀 갈빛 먼지가 / 머리 속을 송두리째 흐트러 놓은, / 꿈은 허망한 착각. // 나는 누구일까?
∥「나는 누구일까?」중에서; p18∥  


너의 눈은 내 손에서 태어나 / 슬픈 표정으로 날 괴롭히나 / 난 그 분위기에 취해 널 완성하련다.
∥「3월의 시」중에서; p20∥

내가 그를 사랑했었는지 아닌지 / 확실하지가 않다. / 모두가 벽처럼 망각되어진 / 막연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 그것은 /기민하고도 다행한 약혼이다. / 벽과의 거리만큼이나.
∥「전화」중에서; p28∥  


해 거름에 산들거리는 바람은 // 처마 밑에 빗방울, // 흠뻑 머금은 거미줄을 떨구는데, // 달빛 소소한 //  슬레이트 지붕위, // 고염나무 그림자 사이로 // 푸릇푸릇 돋아난,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 // 웅크리고 도사린 내 모습은 알거지.
∥「내 모습은 알거지」중에서; p46∥  


저 들판 위로 부는 가시 바람에 / 눈이 멀어도, 좋아서 / 노래부르며 가야 할 그곳으로 / 흩어지는 꽃잎처럼, / 끝없이 움직여 간다.
∥「나는 가야할 그곳으로 간다」중에서; p51∥  


황무지를 방랑하여, /사랑과 희생에 굶주린 독사들이 / 도사리는 누런 들판을 / 발바닥이 닳아 없어지도록 맴도는 자여!
∥「무상한 시간 속으로」중에서; p59∥  


나는 신의 캔버스에 그려진 초라한 / 물감 덩어리 // 나의 가슴 속에 붉은 피가 흐르고 / 때문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덩어리.
∥「캔버스에 비친 나」중에서; p60∥  


꿈을 사르련다 / 빛바랜 시래기 다발처럼 변해버린 / 가늘게 떨리는 둥지 않에서 / 못내 회생못할 꿈을 // 모질게도 긴 / 밤이 지나가도록 너는 / 별빛으로부터 가슴 깊숙이 전해 받은 / 숨죽인 속삭임을 들으려무나 // 그래 / 너는 활갯짓하며 / 하늘 끝 점이 될 때까지 / 망각 속으로 흐터져 // 갈기갈기 찢기운 마음속 / 상처를 어루만지다가 / 그 푸르디 푸른 회한의 모서리에 / 나를 몰아 세우려느냐?
∥「새벽녘」전문; p62∥  


가장 높은 관념을 매일매일 취하지 않으면 // 흔들리는 자아는 또 죄악을 저지른다. // 평범으로 금의 환향한 인간, // 자신을 뒤쫓던 운명을 뿌리친 후 // 안도하는 인간, 그래도 좋아서, // 아예 억지로 팔자소관을 피해 달아난다.
∥「흔들리는 자아」전문; p73∥  


나는 그녀의 허리에 감겨진 혁대 //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무명 베일 // 그러나 나는 그대로 벌거숭이 // 나는 추워서 파랗게 질린 // 얄팍한 종이 한 장 // 바람에 쉽게 날리는 먼지.
∥「먼지」전문;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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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 - 대학등록금 1000만 원, 청년실업 100만 명,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
조성주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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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무얼 바라 겨우 숨만 쉬고 있나. 나락으로 떨어지고 떨어져도 바닥은 보이지 않는 그런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28년을 함께 살아도 나는 나를 모르고’ 그렇게 살아가는 듯하다.『대한민국 20대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넘어』는 지금 나를 비롯한 20대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무엇이 문제인가, 20대들은 어떻게 이 절망(?)을 극복해나가야 할 것인가 등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책을 읽었다가는 중간부터는 짜증(?)이 폭발하는 듯했다. 끄트머리에 가서는 ‘아, 이게 뭔가요!’라는 생각까지 든, 아무튼 좀 복잡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절망의 트라이앵글’은 대학등록금 1000만 원, 청년실업 100만 명, 사회의 오해와 무관심이다. 대학등록금 문제를 필두로 해서 현재 20대들이 처한 상황을 여러 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청년실업의 궁극적인 원인(?)과 청년실업을 바라보는 세대와 계층 간의 시각차에서 발생하는 오해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치권내 인사(?)들이 바라보는 20대들의 정치적 성향의 편견과 오해, 통일에 있어서 20대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 등에 대해서도 담론을 통해 풀어나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은 내게 그리 신선한 책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볼만한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현재 20대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사회적 시스템, 제도, 정책 등등을 들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선한 책’은 아니라는 것. 나름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는데, ‘그래서, 어쩌자고?’ 저자에게 되물어야 할 정도로 해결책이 참 거시기(?)한 것 같다. 조금 시건방지고 오만하게 말하겠다. ‘당신이 제시한 해결책, 그 말, 나도 할 수 있다!’

저자가 ‘연대’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대 간의 연대와 정치권과 20대의 연대 등을 강조하면서 연대만이 절망의 트라이앵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연대하자는 말이 시덥잖게 들린다기보다 그냥 연대하자고 말하는 게 다라서 멀뚱멀뚱했다고 할까.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는 연대를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이를 힘 있게 받쳐줄 만큼 그가 분석해놓은 문제점(대학등록금, 청년실업, 오해와 무관심)은 너무 식상하고 연대를 강조하기엔 좀 빈약한 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그 20대에 속한 백수다. 내가 뭘 알겠는가. 저자가 나보다는 많이 배웠고 머리도 좋을 테니 그러면 그런 줄 알고 따라야지. 하지만 만약, 저자가 나처럼 찌질한 백수생활에 어느 정도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고, 거의 ‘달관’의 경지까지 이른 처지와 위치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면 어땠을까? 해결책을 ‘연대’로 들고 나가야지 하면서 문제제기를 과연 대학등록금이나 청년실업 등으로 잡았을까? 내 생각에는 아니올시다! 자신도 현재 20대들과 다를 바가 없는 시절을 지냈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하면서도 연대에 대한 접근 방식이 조금은 빗나간 게 아닌가 싶은 게 찌질한 백수인 내 생각이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연대란, 저자처럼 사회적 시스템과 제도·정책적인 병폐의 관점에서 본 ‘한계적 트라이앵글’을 가지고 이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은 성급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해결책을 골몰하는 것에서 그쳤다면, 나름 괜찮은 책이라 할 만하지만,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너무 뜬구름 잡기 식이 아닌가. 연대를 강조하는 여러 학자들이 많다. 예컨대, 강수돌 교수라든지 한홍구 교수, 윤구병 님(?) 등등의 주장을 보면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연대에 대한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들에 비해 이 책의 저자는 좀 성급하고 조금은 빈약하고, 설득력도 조금 떨어지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또 조금 아쉬웠던 점은 너무 쉽게 20대 젊은이들의 성향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말하는 절망의 트라이앵글을 분석해서 얻은 결과를 가지고 20대들의 특성을 도출하고 있는데 조금 위험한 발상이 아닌가 싶다. 달리 보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위치한 20대들의 성향을 잘 분석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깊이는 좀 얕다는 느낌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다.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 또한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절망이란 저자가 말하는 생존 혹은 생활욕구의 불충분만을 가지고 논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물론 인간으로써 기본욕구이자 가장 우선시 되는 욕구가 생존욕구라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것은 단순히 생존욕구의 불충분, 단순한 감정의 패닉상태가 아니다. 이는 현실을 이탈한 의식의 세계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젊은 세대가 앓고 있는 ‘병’의 근원은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의식화한 이상향에 대한 ‘비전 없음’에 대한 좌절인 것이다. 저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가지고 문제를 분석해서 해결책으로 연대를 들고 나왔다. 세대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부족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좀 더 건방지게 달려보자. 진정으로 20대들이 앓는 절망의 근원을 끄집어냈나, 되묻고 싶다. 나는 저자가 다분히 감정에 대한 호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에 대한 호소와 감성을 자극하고 불러일으키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무 말 않고 그저 20대 젊은이들의 고충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문제해결을 위한 첫걸음은 ‘말하기’가 아니라 그저 묵묵히 ‘듣기’로부터 시작된다는 단순한 이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통하자고 했던가? 그럼, 저자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게~~요?

고등학교 때 배구동아리를 했었다. 그때 대회 일정이 잡히고 연습을 하기 위해서 선배들에게 연락해야 할 일이 생겼다. 주장이었던 내가 무턱대로 전화를 넣었는데, 죄다 그냥 끊더라는. 그렇게 몇 번을 하다가 7대 선배(나는 13대) 왈, 절차를 밟아라! 그렇다. 절차를 밟고 수순에 따르라는 것. 내 한 대 위로 연락을 취하고 거기서 또 한 대위로 이어가는 그 과정과 절차를 말했던 것이다. 소통과 연대를 실현하자고 했던가. 그럼 절차를 밟아라! 일단 입 닫고 먼저 들어라, 고 말하고 싶다. 표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 내면의 상처를 먼저 찾아내고 보듬지 않고는 그네들을 움직일 수 없다. 젊은이들의 생각, 가치관, 정체성 그로 인한 혼란을 이해할 수도 잠재울 수도 없다. 하물며 소통과 연대는 오죽하겠는가.

진중권의『레퀴엠』에 보면,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사무라이 존재 미학에 대한 그의 확신은 ‘시대적 착오’에 부딪혀, 즉 변화된 시대가 요구하고 주도세력(젊은이)의 인성을 간파하지 못한 결과 할복이라는 유종의 미(?)를 낳았다는 것. 여기서 인성은 작게는 세대의 특성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세대의 특성 혹은 정체성은 이 인성의 이해노력 여하에 따라 소통의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20대들에게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그들과의 소박하지만 대의를 위한 연대를 원한다면, 젊은이들의 내면에 휘몰아치는 생각과 감정들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겠나.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는’ 20대들에게 함께 고민하면서 젊은이들의 정체성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네들의 인성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는 오늘을 사는 세대다. 미래를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기성세대들과는 조금 다른 성향을 보인다는 말이다.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존에 대한 위협 따위에 쉽게 절망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성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자유에 익숙한 세대이면서 그에 대한 속박은 선전포고와 같다. 묵묵부답의 극단적인, 자폐적으로까지 보이는 성향을 띄는 세대다. 그걸 가지고 냉소주의니 무관심하니 하는 것은 좀 우습지 않나 싶다. 젊은 세대가 갖고 있는 열정, 꿈, 그 힘을 믿고 응원하지는 못하더라도, 너무 쉽게 배제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에 대한 힘겨움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꿈과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뭘 알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세대에 속한 한 사람이다. 내 말이 옳든 그르든 간에 내가 하는 말은 20대들이 하고픈 많은 말의 편린정도는 된다고 본다. 소통과 연대를 이끌어내고 싶은가? 우리를 진정으로 돕고 싶은가? 그렇다면 감정의 호소 따위는 버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가 궁금하다. 즉,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불확신과 불분명으로 앓고 있는 환자나 다름없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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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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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지러운 내 책상 위에 빨간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책 읽는 동네, 즐거운 사회’라는 스티커가 붙은『엄마를 부탁해』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최근 들어 실시하고 있는 ‘독서릴레이’ 프로그램의 책 중 하나라고 엄마가 말씀해주셨다. 읽은 후 이름, 날짜, 연락처, 간단한 느낌 정도를 뒷면에 붙은 ‘독서일지’에 적으면 된다고. 낯선님이 읽는 걸 보고선 읽어봐야지, 읽어봐야 하는데······ 하며 미루고 미루다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걸 보면, 안달한다고 해서 죄다 내 손에 착착 감기는 것만은 아닌 듯 한 오묘함을 느끼게 된다.  

 

엄마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 남편도, 딸들도, 아들들도, 며느리들도, 손자들도, 이 거대한 도시 속 많은 사람들도 엄마를 보지 못했고 모른다고 한다. 전단지를 만들어 돌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보지만 늘 한숨과 함께 회한이 밀려오는 잔인한 형벌의 시간, 그런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게 가족도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지나는 무수한 사람들마저 ‘너’의 엄마는 물론 제 집의 ‘우리’ 엄마를 잊고, 잃어가며, 잃어버린 채 사는 듯했다. 나 역시도.  


『엄마를 부탁해』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들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그 일침은 ‘엄마’라는 절대적인 세계, 내 노력과 관심여하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내 편일 거라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실존체인 ‘엄마’를 앗아감으로써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엄마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하건만, 기어이 그 극점으로 우리들을 내몰아간다. 그리고 납치범처럼, 살인마처럼 섬뜩하게 통보한다. ‘당신의 엄마는 어디 있을까? 알고 싶어? 당신은 절대 엄마를 찾을 수 없을 거야! 영원히!’

 

이 잔인하고도 잔인한 절망의 극점에서 단말마에 그치는 일상적인 뉘우침은 전혀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통렬하고도 처절한 속죄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만 같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절절하게 흘러나오는 후회로 하여금 바꿀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상의 흐름을 시시각각 조각내 버린다. 단순한 강요와 훈계의 차원을 넘어선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 엄마라면 지금의 너처럼 두려움을 피해 이렇게 달아나고 있지 않을 것이다.(p275)  


‘소’처럼 살아가는 엄마. 우리네 엄마는 여지없이 소처럼 묵묵한 일생을 보낸다. 엄마라고 부엌이 좋았을까, 엄마라고 집안일 모든 것이 하고 싶었을까. 당연히 엄마니까 하는 일이지, 라는 우리네 생각이 엄마를 더욱 혹독한 시간 속으로 밀어 넣은 건 아닌가 싶다. 당연하다는 말과 인식, 그것은 엄마에게 멍에를 덧씌운 잔인한 멍에가 아니었을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갖는 게 사람 된 도리가 아닐까.  

 

이 책에서 우리는 ‘엄마’가 아닌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자식들은 당연한 듯 제 삶을, 인생을 중심에 혹은 맨 앞에 놓고 가족을 그 다음으로 놓으며 ‘제일’이라고 능청스럽게 거짓부렁한다. 엄마, 아빠의 삶에 대해 단 한 번도 되돌아볼, 관심도 여유도 혹은 그런 ‘孝’를 찾기란 힘든 게 사실이다. 어미도 아비도 인간이고 사람이다. 숭고한 사랑과 헌신은 제 삶과 인생의 표피에 불과한 것이다. 그 내면에는 우리 누구나가 갖고 겪으며 살아가는 고민·고독·번민 등 감정의 소용돌이가 똑같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다만, 숨죽인 채 울며 참고 있을 뿐임을 안다.  


그렇다고 엄마를 잊고 잃은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죄인취급하고 있지는 않다. 속죄의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할까. 죽은 게 아니라 잊었을 뿐이고, 잠시 잃었던 엄마일 뿐이라고. 단지 잃은 게 ‘구 개월’ 정도가 지났을 뿐이라고. 아직 희망은 있다고. 그런 희망 속에서 엄마를 찾을 때까지만 엄마를 부탁한다고. 세상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들어찬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시간, 어쩌면 그런 ‘착각’의 시간 속에서 마냥 즐거워하고 있을 때, 그런 시간 속을 거닐고 있을 때부터 우리는 소중하고도 중요한 무언가를 조금씩 조금씩 잃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무엇을 잃었고 잃고 있는지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기엔 우리네 ‘착각’은 너무 달콤하고 일상은 너무나도 견고해 전혀 빈틈이 없다는 사실을. 충격! 가령, 이 소설에서처럼 엄마를 잃어버리는 것만큼의 충격이 아니고서는 웬만해선 착각은 균열조차 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아직 늦지 않았다. 벌써부터 후회하고 비탄에 빠져 혹은 그래도 무신경하게 살아가기에는 너무 이르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음을 안다. 시간보다는 마음이, 마음보다는 표현이 더 살갑다. 시간은, 마음은 추억을 되살릴 순 있어도 되돌릴 순 없다. 그래도 우리네 마음을 추스르고 다잡을 순 있다. 그렇게 다잡은 마음으로 우리는 시간을 되새김질 하게 될지도 모른다. 추억은 마음으로부터 되살아나고 흐르는 시간 속에 영롱할 것이며 뒤늦은 후회일지라도 여전히 무관심한 것보다 값지다는 것을 안다.  


아주 유명한 책이라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라서 조금은 ‘선뜻’ 만나기를 꺼렸던 것도 사실이다. 꼭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기보다 그저 ‘웅성웅성’한 틈에 끼여 읽다보면 그네들에게 나 또한 묻혀 버릴 것만 같은, 꼭 그런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금은 진정되고 차분하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 어쩌면 이것 또한 책을 대하는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싶다.  


‡‡‡‡‡‡‡‡‡‡‡‡‡‡‡‡‡‡‡‡‡‡‡‡‡‡‡‡‡‡¨¨주워 담기¨¨‡‡‡‡‡‡‡‡‡‡‡‡‡‡‡‡‡‡‡‡‡‡‡‡‡‡‡‡‡‡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은 생각을 깊이 해보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뜻밖이라고 말하는 일들도 곰곰 생각해보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뜻밖의 일과 자주 마주치는 것은 그 일의 앞뒤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뿐.(p40)

이젠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사실은 모두 여기에 스며들어 있다는데, 느끼지 못할 뿐 옛날 일은 지금 일과 지금 일은 앞의 일과 또 거구로 앞의 일은 옛날 일과 다 섞여 있다는데 이제 이어갈 수 없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지금 일어나는 일은 지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과 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당신은 생각하오? 글쎄, 그럴까? 나는 가끔 내 손자들을 보면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 없이 어딘가에서 그냥 뚝 떨어져나온 아이들 같은디.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 없이 말이오.(p235)  


집이란 참 이상하지. 모든 것은 사람 손을 타면 닳게 되어 있는데 때로 사람 곁에 너무 가까이 가면 사람 독이 전달되어오는 것 같기조차 한데 집은 그러지 않어. 좋은 집도 인기척이 끊기면 빠른 속도로 허물어져내려. 사람이 비비고 눙치고 뭉개야 집은 살아 있는 것 같어.(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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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경숙님 책 읽어보고 싶어요. 넝마님이 읽으셨다니 더욱더 읽고 싶네요.^^

ragpickEr 2009-06-09 11:27   좋아요 0 | URL
^^* 이달이 가기 전에 구입하려구요.. 읽은 책이지만 좋은 책은 갖고 싶기 때문에..혹시 한 권 보내드릴까요? ^^* 후훗..

에샬롯 2009-06-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아닙니다. 보내주셔도 바로 못읽어요. 읽어야할 책들이 줄을 섰어요. 감사합니다.

ragpickEr 2009-06-15 08:10   좋아요 0 | URL
^^* 그러시군요~헤헤.. 전투식량(?)이 빵빵하시군요~^^*

에샬롯 2009-06-15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너무 안 읽어서 그래요.; 그때 끄때 소진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 저의 소원이 책이랑 영화랑 이런 것 마음껏 즐기며 살긴데 쉽지 않네요.

ragpickEr 2009-06-16 12:04   좋아요 0 | URL
무슨 그런 말씀을..^^*; 후훗.. 제가 묵혀 두고 읽기를 즐겨 하는 게으름 사람인데요.. ㅋㅋ 저랑 비슷하네요.. 맘껏 탐하는 삶~! ^^*
언젠가 꼭 이뤄요~!!! ^^* 빠샤!!
 
숲에게 길을 묻다 - 희망 더 아름다운 삶을 찾는 당신을 위한 생태적 자기경영법
김용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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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 나는 얼마나 숲에 가보았을까. 얼마나 숲을 느껴봤을까. 산 속에 우거진 나무들 틈에서 내가 집중한 것은 늘 ‘나’였던 것 같다. 그 속에 숨 쉬고 생동하는 많은 생명의 기운들을 무던히도 무시한 채 숲 아닌 산을, 산 아닌 ‘나’를 거닐었을 뿐임을 안다. 그러면서도 나불거리는 내 터진 입은 숲이 어쩌고저쩌고 생명의 소중함과 그 가치가 이러쿵저러쿵 참으로 빈 마음인 가식덩어리를 표현하고 있었음에 늦게나마, 잠시나마 후회하고 반성해본다.  

 

『숲에게 길을 묻다』는 김양수의『내 속뜰에도 상사화가 피고 진다』와 닮은 듯하다. 책 속에서 싱싱하게 흘러내리는 기운이라는 점에서는 다소나마 차이가 있다하겠지만, 그 속에 녹아있는 자연에 대한 생각은 다분히 감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숲·자연 속에서 생활한 자만이 그려내고 엮어낼 수 있는 기운을 선사한다는 점에서는 그 맥이 통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인간은 태어나고 해를 거듭하며 성장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또한 끊임없는 선택의 순간을 거듭하면서 나름의 노하우로 세상에 정착할 때쯤 ‘떠남’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숙명이다. 이런 생의 과정에는 굴곡과 제약, 그리고 그릇된 선택 등 많은 것들이 어우러져 우리를 힘겹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힘겨움이 어디에 기인하는지에 대해 분석함과 동시에 우리 인생을 어떤 관점에서,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설계해 나갈 것인가를 숲을 관찰함으로써, 그 속에서 얻은 지혜로움과 신비함을 가지고 우리네 인생을 성찰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 의미가 깊다하겠다.  


표지가 참으로 인상적이면서 마음에 쏙 들었다. 싱그러운 대밭의 풍경은 그저 잠시나마 일상의 분주함을 잊게 해준다. 아찔하게 우뚝 솟은 그 높이에 눈이 가다가도 그 아래 사이사이로 난 틈과 틈 사이를 보노라면 그 어울림이 참으로 자연스러워 마음이 동하는 듯하다. 또 바람이 흘겨 놓은 듯 한 글귀가 세로로 흘러내린 모양은 ‘각’의 강박으로 가득한 도시와 도시민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하다. 어슴푸레하면서도 몽환적인 책 표지만으로도 충분한 휴식을 가능케 하리라 본다.  


그 속은 어떤가. 참으로 정성이 많이 들어간 책이 아닌가 싶다. 성실하게 엮은 티가 나고 때론 미련하리만치 여백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소제목들은 우리네 인생의 중요한 시기들을 하나하나 짚어내 시간을 되새김하게끔 나열되어 있으며, 본문에 삽입된 사진들은 소박한 맛과 멋을 지닌다. 내 엄지손톱만한 사진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듯 한 소박한 멋과 아예 한 장을 너르게 사용해 시원한 맛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인상 깊었던 대목은「경쟁」「자식」, 그리고「죽음」이었다. 경쟁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고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는 ‘팔꿈치사회’의 모습이 아니라 그 요체는 상생과 자기성장에 있다는 것. 자식을 길러 세상을 향해 내어놓을 때 그 지극한 사랑과 바른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의 내용을 빌어 감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 끝내 마지막 장인「죽음」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자의 이웃인 할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이 갖는 의미를 감동적으로 전하면서, 죽음이 다분히 생의 ‘끝’이 아니라 다른 생명에 대한 ‘보은’이고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되돌아감’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반가운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여러 전설을 두룬 채 천여 년을 살아내고 있는 은행나무와 천연기념물433호인 정선 두위봉의 천사백년을 살아낸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느림보(?)나무인 주목이 특히나 반가웠다. 강의(숲과 나무) 시간에 잠깐이지만 들어보았으며 쥐똥나무(?)의『나무열전』『어느 인문학자의 나무 세기』를 통해서도 만난 바 있어 친근함이 배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 작은 바람을 덧붙여 본다. 훗날 개정판이 나오게 된다면, 본문 속의 사진들을 생생하게 만나고 싶은 게 바람이다. 다채롭고 형형색색의 보기 좋은 책에 대한 욕심이라기보다 자연이 갖는 본래의 영롱한 빛깔들이 잘 스며있는 사진을 만나고 싶은 본능이랄까. 어쩌면 그 흑백의 사진 속에서 본래의 빛깔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내 어리석음과 가련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런 바람을 갖게 된 것도 같다.  


인생이란 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 가운데 인간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아닐까. 이 드라마에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시놉시스가 없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일 것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는 주인공인 우리 자신의 의지를 반영하겠지만, 전적으로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기도 할 것이고, 선택의 순간순간마다 힘이 되어 주는 또 다른 연출자를 만나게도 될 것이다. 주인공인 인간의 독단적인 의지로 만들어가는 드라마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두가 연계하고 연출하고 만들어가는 드라마,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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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곳이 사막처럼 느껴질지라도 그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숲은 그렇게 이루어져왔습니다. 삶을 수용하지 않고 열 수 있는 하늘은 없고, 시작하지 않고 넘을 수 있는 벽은 없습니다.(p58)

숲의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경쟁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숲은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숲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요, 새로운 영역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핏빛 대지에서 영혼을 고갈시키며 앞을 다투는 경쟁이 아니라, 나만의 푸른빛이 가득한 공간에 서는 것. 감히 추한 욕망이 넘보지 못할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 타자를 파괴하여 내 하늘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낡은 나날을 부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p100~p101)  


==>『존 템플턴의 가치 투자 전략』에서 결여돼 있다고 지적한 부분과 상통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의 이익을 내 쪽으로 더 많이 끌어 온다는 것, 자본주의 시스템이란 이를 기본으로 한다는 것, 고로 누군가는 가능하지만 모두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허망한 욕망이자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또 부자는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으며 몇 안 되는 소수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는 다수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의 손해, 희생을 요구·강요한다는 것. 인식의 변화, 시스템자체의 패러다임의 변화 없이는 욕망을 가장한 ‘가치’라는 이름하에 부자는 늘 소수일 뿐이라는 것.  


지구가 있어 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달이 있어 지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가 있어 서로가 있는 것입니다. 서로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도록 살뜰히 잡아주는 것으로 세상이, 별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잊어가고 있는 이 위대한 법칙을 반드시 되살려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홀로 온전할 수 없었고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p110)  


사막에서도 삶은 태어나고 이어진다.
치이고 치이는 삶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기의 세계를 열고 싶다면
사막과도 같은 땅에 서라. 그곳을 골라 나를 세우는 혁명 전사로 살라!(p121)  


이 숲의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질경이와 생강나무를 비롯한, 수많은 혁명적인 생명들과 매일 마주합니다. 사람의 숲에서도 이따금 질경이나 생강나무를 닮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길을 기꺼워하고, 타성을 쫓기보다는 차라리 창조적 진화를 선택하는 사람. 타인이 닦아놓은 길을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길을 내는 사람. 그 대가인 외로움과 고난과 위험을 삶의 안주로 삼을 줄 아는 사람. 육신은 고달픔을 택할지언정 영혼은 결코 꺾지 않는 사람······ 나는 늘 그들의 삶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p128~p129)

 

사람이건, 사회건 성숙한다는 것은 소통의 그릇이 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꽃들이 이어내는 세상과도 같아지는 것입니다. 꽃들을 보십시오. 꽃은 모두 자기다운 빛깔로 피어납니다. 그러면 이제 자연을 이루는 위대한 생명의 가족들이 그들 각자의 빛깔에 화답합니다. 바람과 물과 나비와 벌과 나방과 새들이 그들을 찾아들고 세상을 수만 갈래의 빛깔로 이어냅니다. 그렇게 자연이 벌이는 소통은 끊이지 않아 이 별이 늘 푸른 것입니다.(p145)  


이 숲에 살고 있는 혼인목과 옆 마을의 자랑거리인 연리목은 이 시대의 사랑을 닮지 않았습니다. 모두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그분들은 사랑의 유효기간이 무엇이고 그것이 몇 년인지도 모른 채 60여 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살고 계십니다. 참빗 한 자루와 숟가락 두 벌, 단칸 초가로 혼인을 치른 인연이지만 그분들의 영혼은 평생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을 이기기 위해 두 분 모두 고단했으나 서로를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난의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 함께 애쓰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고비가 없지 않았으나 그때마다 서로를 더 깊이 아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분들에게 갈등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영역을 존중해가는 과정의 하나였습니다. 부부의 본질이 각자이면서 또한 하나인 것에 있음을 평생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몸과 마음으로 익혀오셨습니다.(p154~p155)  


······ 생명 모두는 일을 하며 살도록 운명 지어졌습니다. 우리 또한 매일같이 일을 하며 살도록 태어났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일이 시시포스의 형벌과도 같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는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징검다리와도 같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나로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일이란 ‘그 자체로서 자신의 목적이 될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활동’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p175)

내 오두막 옆에 잠든 어르신이 보여준 것처럼 죽음은, 우리가 빚을 졌던 이 별로 고요히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들을 위해 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쪽의 삶이 닫히고 저쪽의 새로운 소임이 열립니다.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살고 있으되 살아 있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에 이르러서도 그 죽음에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삶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은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삶과 죽음의 기회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p255~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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