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시 30분 기상.
어제 사다놓은 김밥과 미역국으로 아침을 먹고, 씻고, 가방챙겨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숙박비 6만원).
오늘의 첫번째 행선지인 안동으로 향하는 길. 길에 안개가 자욱하다. 안동시를 가로질러 빠져나가니 드디어 단풍도 보이고 제법 여행떠난 기분이 난다. 30분쯤 달려 하회마을에 도착했다. 입구에 흉물스러운 모텔과 음식점들이 눈을 찌푸리게 한다. 어딜가나 피할 수는 없는건지. 왜 그렇게 장사를 하는건지. 답답하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을 방한한 것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입구에 서 있다. 들어가보니 여러 행사에 참여한 사진과 그녀에게 증정된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왕이란 존재가 새삼스레 크게 느껴진다. 근데, 대체 왜 받은 선물을 두고 간 걸까? 또 여기까지 헬기로 왔을까, 차타고 왔을까?
표를 끊고 들어선 하회마을. 양반댁도 있고, 서민들의 초가집도 섞여 있는데, 남산 한옥마을과는 달리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 훨씬 생동감이 느껴진다. 자기가 사는 마을에 맨날 사람들이 구경오는 것은 또 어떤 기분일지. 낮은 담벼락 사이로 아담한 골목길을 걷는 기분이 따뜻하다.
하회마을이란 마을을 둘러 강이 돌아나간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회마을의 절경은 바로 이 돌아나가는 강가에 있다. 마을을 둘러싼 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런 강을 뒤에 두고 사는 기분은 어떤 것일지. 우리 조상들은 진짜 자연의 멋을 알고, 즐기며 살았구나, 정말 사람답게 살았구나 싶다.
하회마을의 전경을 보기 위해 마을 아저씨가 노를 젓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 강건너편 산위로 올라갔다. 고소공포증이 있는지라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겨우 올라간 그곳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정말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우리 조상들은 저런 아름다운 곳에 살았는데. 지금의 우린 왜 그런 미적감각을 잃어버렸는지.
하회마을을 나오는 길에 공짜로 공연하는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았다. 전문적인 공연자들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해학적인 내용이 재미있었다. 중간부터 보기 시작하여 끝까지 공연을 다 보고 하회마을을 떠났다.
금강산도 식후경! 오늘이야 말로 안동 향토음식을 먹어보리라 기대하고 안동시내 음식점 거리로 갔으나 향토음식은 간데없고 또 고깃집만 무성하다. 이럴수가! 배는 고프고 아무거나 먹기는 싫고. 아무래도 관광지근처로 가야 향토음식을 먹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서 근처 안동댐으로 향했다.

안동댐에 가니 댐근처에 향토음식점들이 몇군데 있다. 그중에 괜찮아 보이는 곳으로 가서 헛제사밥이란 걸 시켰다. 헛제사밥이란 예전에 선비들이 제사음식이 먹고 싶어서 제사날도 아닌데 만들어 먹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온 음식을 보니 과연 제사음식들의 모듬이다. 경상도 지방에서만 제사상에 오르는 상어고기도 있었다. 음식맛은 그냥 제사음식 맛이었지만, 그래도 뭔가 안동다운 음식을 먹었다 싶어 만족스러웠다. 남편이 맛이나 보라고 안동식혜를 시켜주었는데, 고추가루가 풀린 시큼한 식혜는 입에 맛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도산서원으로 출발. 퇴계 이황이 세운 사액서원으로 교과서에서 줄기차게 배우고, 천원짜리 지폐에서도 맨날 구경한 곳이지만, 직접 찾아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산을 넘어 가는 길부터 단풍이 아름답다. 도착하여 보니 역시 산을 뒤에, 물을 앞에 두고 절경속에 고요히 자리잡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진짜 뭔가 안다니까. 공부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
일단 들어서서 천원짜리 지폐를 펼쳐들고 비교해본다. 흠, 저 우물이 여기고, 저 건물이 요거고. 재미있다. 생각보다 아주 아담하고 소박하다. 언덕에 자리잡은 가옥들을 하나하나 훓어보았다. 요렇게 작은 방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남자들끼리 모여 하루하루 공부하며 살았을까. 그네들의 꿈, 그네들의 삶의 기쁨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의 일정은 도산서원으로 마무리 되었는데, 어째 시간이 어정쩡하다. 남은 시간을 그냥 숙소에서 보낼 수도 없고. 약간 무리이긴 했지만 영주로 사과를 따러 가기로 했다. 도산서원에서 영주까지는 1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 국도를 달려달려 산속 시골마을을 지나지나 꼭 일년전 찾았던 영주에 도착.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사과따는 농장에 손님이 우리뿐이다. 아저씨는 올해는 살충제를 전혀 쓰지 않았다며 kg당 5000원이라 한다. 그리고, 벌레 먹은 사과가 많으니 잘 보고 따라고. 일단 맛있어 보이는 놈을 따서 성큼 베어물었다. 그곳에서 따 먹는 사과는 무조건 공짜이니 부지런히 먹어야지. 사과향이 진하고 과육은 단단하고 맛은 달콤하다. 입속에 퍼지는 사과향을 즐기며 벌레먹지 않은 사과를 골라 사과따기를 시작했다. 크고 잘생긴 놈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나 볼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사과도 골라땄다. 올해는 언니네 것도 따가야 하니 남편과 나 한바구니씩 맡아 들었다. 다 따고 무게를 재니 사과값이 7만 5천원. 결코 싼 값은 아니다. 아저씨는 자기 사과 먹으면 다른 사과 못 먹을 거라고 큰 소리다. 가는 길에 먹으라며 별레먹은 사과 몇 개도 싸주셨다.
사과를 따고 영주를 떠나 다시 집으로 향했다. 처음엔 2박 3일로 계획하고 떠났으나 부석사에서 하루 머루르기도 그렇고, 딱히 갈만한 곳이 없어서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얼마나 떠나고 싶은 집이었는데, 겨우 하루만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뱃속이 근질거릴 정도로 좋다. 한비야가 집으로 돌아가는 기쁨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다.
그러나 고속도로 사정은 집을 떠나 올때보다 더 나빠졌다. 아니 아예 기어간다. 중앙고속도로에서는 신나게 달려왔으나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드니 강원도로 놀러갔던 사람들이 합쳐지면서 앞으로 끝없이 차들이 밀려서 있다. 엉덩이에 쥐도 나고, 피곤하고 아주 죽겠다.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싶다. 토요일오후에 떠나 일요일 밤에 집으로 돌아오니 이건 예고된 재난이다.
길바닥에서 5시간 보내고 드디어 집에 도착.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잠 자고, 엉터리 국밥도 먹고, 강변도로에서 잘못 빠져나가 다시 에둘러서 힘겹게 힙겹게 집에 왔다. 어렵게 와서 그런지 집이 더 좋다. 포근하고 편안한 침대에 푹 쓰러지는 것으로 올해 가을 여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