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은 왜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평점 :
품절


제목만 봤을 때는 그냥 장화홍련전 쯤으로 생각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같은 소설을 쓴 현대적인 작가가 왠 옛날 이야기를 썼는가 생각했지만, 읽어보니 현대적 작가가 고전 이야기를 쓰면 이렇게 새로운 소설이 등장하는구나 싶어 그저 감탄스러웠다. 소설은 아랑사건의 진실이 파헤쳐지는 과거와 영주와 박이라는 남녀의 관계를 보여주는 현대, 두 축으로 진행되는데, 작가가 이야기 만드는 과정을 독자에게 이야기하듯 전개해 나간다는게 참 특별하다.

가는 아무 설명없이 아랑이 나비가 되었다며 나비이야기로 운을 뗀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큰 흰줄나비. 나비가 어쨌다고 하는 의문이 생기면 억울하게 죽어 나비가 된 후 범인의 머리위에 앉아 진실을 밝혔다는 아랑전설이 소개된다. 이쯤되면 어렴풋이 어렸을 때 읽었던 전례동화가 기억이 나는데, 작가는 아랑전설의 여러 판본들 사이의 불일치를 보여주며 아랑 전설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겠다고 한다.

음, 그냥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숨겨진 뭔가가 있나 싶어 이제 그 이야기의 전개가 사뭇 궁금해지려는 차 느닷없이 역사소설의 서두에 현대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이 소설의 화자가 역사 바깥에 있음을 보여주고 그 시선으로 역사적 사건을 보게 하겠노라며 박과 영주의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이쯤 되면 소설이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랑전설의 진실만으로도 충분히 궁금한데, 게다가 현대의 박과 영주의 이상한 관계까지. 아랑이야기를 읽다보면 영주와 박의 이야기가, 영주와 박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아랑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식으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게다가 소설을 다 읽고나면 아, 이렇게 인물이 설정되고, 이렇게 이야기가 구성되는구나 싶어 이 과정대로만 하면 나도 소설한편 쯤 쓸 수 있을 것 같은 호기까지 생긴다. 그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원한을 새로 부임한 군수가 풀어준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던 옛날 얘기에 숨겨진 김영하 나름의 진실 또한 매우 흥미롭다. 책을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밝힐 수는 없지만, 용감하고 멋진 왕자에 의해 구출되는 미녀 이야기인양 가장하고 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사실은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아이의 성적 호기심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

겉으로 보기엔 권성징악의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전설, 전례동화들 속에 어쩌면 상류계층의 부패를 눈가림하거나 또는 특정계층을 억누르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이야기가 이렇게 악용될 수도 있구나 싶은게 어릴 적 아무 생각없이 읽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생각나 섬뜩해진다.

다만, 아랑이야기와 영주와 박의 이야기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혹시 똑같이 살해당하지만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면에서 아랑이가 영주를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뭐, 이해할 수 있으면 좋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이야기는 여전히 재미있다. 그래도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시면 설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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