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상인이 지배하는가 - 권력의 역사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
데이비드 프리스틀랜드 지음, 이유영 옮김 / 원더박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가치, 이해관계 그리고 직업

논의에 앞서 역사적 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 마르크스와 후쿠야마는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다. 마르크스는역사 변화의 원동력이 경제적 이익집단 또는 ‘계급‘이라고 봤으나, 후쿠야마는 근대를 끌고 온 원동력이 상이한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이라고 봤다" - P12

하지만 가치 체계와 경제적 이해관계를 싹둑 잘라 나누는 접근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가 양자 모두로부터 동기를 부여받으며, 우리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가치는 직업이라는 일상의 메커니즘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 P13

 투자은행 분야에 종사하며 사회주의자가 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지역 사회복지 부서에서 일하며 자유시장주의자가 되기는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와 잘 지내고 승진의 사다리를 타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란다면 종사하고 있는 일터의 기본적 가치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테면 일터의 관습과 행동양식, 또는 프랑스 사상가 피에르 부르디외가 명명한 ‘아비튀스(habitus)‘ 같은 것들이기본적 가치들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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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거란전쟁과 대장경

전쟁의 와중에서도 고려가 이처럼 대규모 사업을 벌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고려는 이미 한 차례 대장경을 판각한 일이 있었다. 바로 1010년 거란과의 제2차 전쟁 때였다. 당시 임금과 신하가 판각을 맹세하자 개경까지 들어왔던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이때 만든 대장경을 부인사에 보관했는데, 1232년(고종 19년) 2차 몽고 침입 때 불타버렸다. 그래서 새롭게 대장경을 만들면 다시 부처의 도움으로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gdVnuH88LEBQwqC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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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 10조 중 8조

왕건은 전라도 나주 지역의 호족 오다련의 딸 장화왕후에게서 낳은 혜종을 후계자로 삼았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AS9kiWbA9fMXJcxJ7

「훈요 10조」가 후세의 위작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거란의 침략 때 불타 없어졌던 「훈요 10조」가 다시 등장하게 된 과정도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 원본이 불타버렸다던 「훈요 10조」는 우연히 경주 출신 최항의 집에서 발견되어 현종에게 바쳐졌다. 현종은 신라계를 외가로 하고, 지지기반 역시 신라 계열의 신하들이었던 왕이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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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화백회의와 로마 원로원의 공통점


신라에서는 왕이 간절히 바랐던 불교가 왜 이렇게도 힘들게 공인됐을까?

그 이유는 우선 신라가 왕권국가로서의 틀을 갖추지 못하고 귀족들의 권력이 막강했던 데 있다. 12개 소국의 연합국가였던 신라는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에서 주요 국사를 결정하고, 골품제라는 신분제를 두어 지배층의 지분을 나눠줘야 할 정도로 귀족의 권한이 막강했다. ........
귀족들의 하층민 지배 근거는 바로 자신들이 하늘신의 자손이라는 ‘무속적’ 성격에 있었던 것이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G9k3WfaXEB1t5A7TA



신라는 남녀차별이 거의 없을 만큼 여성의 지위가 어느 시대보다 높았다. 여자도 상속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권도 쥐고 있었다.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절에 시주를 한 기록도 나온다. 또한 혼인을 하더라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편의 지위와는 별도로 계속해서 보장되었다. 신라는 고대 모계사회의 전통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오랫동안 남아 있었는데, 이는 두 나라보다 늦게 유교문화를 수용한 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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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의 성씨는 고, 신라는 박,석,김. 그럼 백제는?


- 부여씨.
- 부여 왕의 성씨는 해. 해부루,해모수의 해는 성씨.
- 온조와 비류의 성씨는 왜 고씨가 아닐까?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졸본부여로 온 주몽의 아들이다. 졸본부여왕은 아들이 없어 주몽을 둘째사위로 삼고 왕위를 물려주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가 비류고 둘째가 온조다. 그런데 주몽은 북부여에 두고 온 부인이 낳은 아들이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이에 자신들의 안위가 걱정된 온조와 비류는 열 명의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 한강 유역으로 떠났다. 온조는 한강 유역에 도읍을 정하자는 신하의 말에 따라 정착해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했다...... 백성들은 온조에게 다시 합류했다. 그 후 백성이 즐겨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mAdQfc3KVQ2PGJ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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