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고 사본을 많이 만들어두면 더 이상 인간과 신의 법전을 중재하는 기관이 필요 없을 터였다. 그리하여 어떤 랍비의 의견을 포함하고 어떤 랍비의 의견을 무시할지 다시 한번 옥신각신한 끝에,서기 3세기에 새로운 거룩한 책 《미시나>가 정경화되었다. 32《미시나>가 <성경>의 일반 텍스트보다 더 권위를 가지게 되면서유대인들은 《미시나>를 인간이 만들었을 리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미시나》도 여호와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성했거나 무오류의 신이직접 작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날 많은 정통파 유대인은 여호와가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직접 《미시나≫를 전달했으며 그것이세대를 건너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서기 3세기에 기록되었다고 굳게 믿는다. 33하나 이 일을 어쩌나! 《미시나》가 정경화되어 사본이 만들어지자마자 유대인들은 《미시나의 올바른 해석을 두고 논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시나의 해석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5, 6세기에세 번째 거룩한 책 《탈무드>로 정경화되었지만, 유대인들은 또한《탈무드≫의 해석에 동의하지 못했다. 34오류 있는 인간의 제도를 거룩한 책의 기술을 통해 우회하려던꿈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랍비 제도의 힘만 커졌을 뿐이다. ˝무오류의 책을 신뢰하라˝는 특명은 ˝책을해석하는 인간을 신뢰하라˝로 바뀌었다. 유대교는 <성경>보다 《탈무드》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고, 《탈무드> 자체보다 《탈무드≫해석에 대한 랍비들의 주장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35세상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미시나》와
이 거룩한 책은 필연적으로 수많은 해석을 낳았고, 이는 책 자체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성경>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활발해짐에 따라 랍비들의 권세가 높아졌다. 고대사제들의 힘을 제한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했지만, 그 결정은 결과적으로 랍비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랍비들은 기술자주의(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기술자에게 정치권력을 맡기면 이상 사회가 실현된다는 주장옮긴이)를 표방하는 엘리트로 떠올랐고, 수년간의철학 토론과 법적 논쟁을 통해 논리와 수사 기술을 키웠다. 새로운정보 기술에 의존해 오류가 있는 인간의 기관을 우회하려던 시도는거룩한 책을 해석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낳는 엉뚱한 결과를 불렀다.랍비들이 마침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들은 오류를 범하는 인간의 기관을 다시 한번 없앨 수 있는 기회를 보았다. 합의된 해석을 새로운 거룩한 책에 - P139
기록하고 사본을 많이 만들어두면 더 이상 인간과 신의 법전을 중재하는 기관이 필요 없을 터였다. 그리하여 어떤 랍비의 의견을 포함하고 어떤 랍비의 의견을 무시할지 다시 한번 옥신각신한 끝에,서기 3세기에 새로운 거룩한 책 《미시나>가 정경화되었다. 32《미시나>가 <성경>의 일반 텍스트보다 더 권위를 가지게 되면서유대인들은 《미시나>를 인간이 만들었을 리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미시나》도 여호와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성했거나 무오류의 신이직접 작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날 많은 정통파 유대인은 여호와가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직접 《미시나≫를 전달했으며 그것이세대를 건너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서기 3세기에 기록되었다고 굳게 믿는다. 33하나 이 일을 어쩌나! 《미시나》가 정경화되어 사본이 만들어지자마자 유대인들은 《미시나》의 올바른 해석을 두고 논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시나》의 해석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5, 6세기에세 번째 거룩한 책 《탈무드>로 정경화되었지만, 유대인들은 또다시《탈무드≫의 해석에 동의하지 못했다. 34오류 있는 인간의 제도를 거룩한 책의 기술을 통해 우회하려던꿈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랍비 제도의 힘만 커졌을 뿐이다. "무오류의 책을 신뢰하라"는 특명은 "책을해석하는 인간을 신뢰하라"로 바뀌었다. 유대교는 <성경>보다 《탈무드》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았고, 《탈무드> 자체보다 《탈무드≫해석에 대한 랍비들의 주장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35세상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한 일이다. 《미시나》와 - P140
연방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덫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것은 애팔래치아인들이었다. 그들이 일으킨 가장 큰 반란은 ‘위스키 반란’이라는 다소 조롱 섞인 이름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나라에 봉급을 떼어 먹힌 참전 용사들이 세금 때문에 정부 차용증을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탐욕에 눈먼 냉혈한들이 남의 불행을 악용해 5000퍼센트에 달하는 차익을 가져갈 수 있도록 무거운 세금까지 내야 하는 현실 앞에 강하게 저항한 사건이다. 정부는 세금을 금이나 은으로 내라고 했지만, 산악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금과 은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세금을 낼 수 없게 되자 이들의 농장과 재산은 강제 처분됐고 이는 모리스와 해밀턴, 그의 투기꾼 친구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었다.4 국경지대인들은 자신들의 농장과 신에게 부여받은 주권을 싸우지도 않고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연방정부가 세금을 징수하고 재산을 압류하려 하자, 이들은 연방에서 탈퇴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 <분열하는 제국>, 콜린 우다드(지은이) / 정유진(옮긴이) - 밀리의 서재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395059cef44c66
힘겨운 독립 전쟁 시절, 재정이 바닥난 대륙 의회는 군인들에게 월급을 지급할 수도 없고, 식량과 가축을 징발한 농부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할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의회는 돈 대신 정부 차용증을 써줬다. 이러한 관행은 은행가 로버트 모리스가 대륙 의회의 재정 관리자가 되기 전까지 여러 해에 걸쳐 계속됐다. 모리스는 비윤리적이기로 악명 높은 금융가였다.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는 그의 지시하에 앞으로는 차용증을 세금 납부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돈이 없는 산악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차용증을 내다 팔 수밖에 없었다. 부유한 투기꾼들은 차용증을 액면가의 6분의 1에서 40분의 1에 불과한 가격으로 사들였고, 곧 펜실베이니아 전쟁 채권의 96퍼센트가 400여 명의 손에 집중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절반가량은 로버트 모리스의 친구 혹은 사업 파트너 28명이 독점하고 있었다. 연방 재정을 장악하게 된 모리스와 그의 제자 알렉산더 해밀턴은 사심 가득한 정책을 새로 마련해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종잇조각과 다를 바 없던 전쟁 채권을 은이나 금으로 교환해주기 시작했다. 모리스와 해밀턴의 지휘 아래 연방정부는 채권 액면가 전액에 6퍼센트의 이자까지 쳐서 이를 귀한 금속으로 바꿔줬다.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차용증의 원래 소유자인 서민층에게 불리하도록 설계된 새 조세 제도를 통해 거둬들인 수입으로 충당했다. - <분열하는 제국>, 콜린 우다드(지은이) / 정유진(옮긴이) - 밀리의 서재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395059cef44c66
1600년대 초, 영국을 지배한 것은 귀족이었다. 귀족들은 가문의 영지나 인근 소도시에서 개인 가정교사를 고용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정체성, 악센트, 관심사 등에 있어 지방색이 강했다. 그러나 1763년 영국을 지배한 신흥 계급은 특권 엘리트층만 모아놓은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제국 엘리트 집단의 일원으로 여겼다. - <분열하는 제국>, 콜린 우다드(지은이) / 정유진(옮긴이) - 밀리의서재https://millie.page.link/vvgPvqgGWXn4rVLf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