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출생과 더불어 사람이 된다
- 태어날 때 절대적 환대를 받는다

태어난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확대한다는 것은 그 생명이 살 가치가 있는지 더 이상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 철학의 전통에서 사람은 지극히 가치 있는 존재라기보다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존재임을 여기에 부기해두자. 칸트는 가격을 갖는 사물과 존엄성을 갖는 사람을 대립시킨다. 가격을 갖는다는 것은 비교할 수 있으며 대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이기에 가격을 갖지 않는다. 

"존엄성의 가격을 계산하고 비교하는 것은 곧 그것의 신성함을 모독하는 것이다." 타자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을 괄호 안에 넣은 채 그를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가 도덕적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러한 환대를 통해서이다. 타자는 사회 안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우리의 몸짓과 말을 통해 비로소 사람이 되고, 도덕적 주체가 된다(사람이란 법적, 도덕적 주체의 다른 이름이다). - P211

5) 임마누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이원봉 옮김, 책세상, 2002, p. 94. 오렐 다비드는 칸트의 이러한 생각을 법적인 관점에서 더욱 명료하게 진술한다. "순수하게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가치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시스템들 속에서만 나타나며, 따라서 사람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가치는 사물들의 속성으로 여겨진다. 모든 사물은 평가될 수 있지만, 사람 자체는 가치를 갖지 않으며 평가될 수 없다. 가치의 관념은 물건에 대한 법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예를 들어 쌍무계약은 재화나 서비스를 동등한 가치로 교환하는 것이다(서비스는 물질이 아니지만 사람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사람에 관한 법ㅡ 신원, 이름, 혼인, 친자 확인, 양자 등등 - 에는 가치의 관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람을 팔거나, 주거나, 저당 잡히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은 가치나 평가에 관한 일체의 관념 바깥에 머문다. 경우에 따라 잠정적으로 거래에서 제외되는 사물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팔 수 없으며, 평가할 수 없다" (Aurel David, 같은 책, p. 29).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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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에 대한 폴라니와 벤느의 논의가 놓치고 있는 것은 증여가 내포하는 인정의 차원 - 증여가 인정을 추구하며, 인정을 통해서 비로소 구성된다는 사실 - 이다. 

국가가 세금을 걷어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와 자선단체가 모금을 하여 같은 일을 할 때, 물질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 형편이 넉넉한 사람에게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로 부가 흘러간다. 그래서 폴라니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재분배에 포함시킨다. 

하지만 행위자들의 입장에서 그 둘은 결코 같지 않다.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것은 의무이지만, 모금에 참여하는 것은 자발적인 선택이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실업수당이나 생활보조금을 수령하는 것은 권리이지만, 자선단체의 도움을받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고마워한다는 것은 도움받은 사실을 잊지않는다는 뜻이다. 

기부자는 익명으로 기부를 한 경우에도 자신의 행동이ㅡ"이름 모를 사람의 작은 선행으로나마 ,- 기억되기를 원한다. 이점에서 기부는 개인적 관계를 추구하는 선물, 벤느가 엄밀한 의미의 증여라고 생각했던 것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다. 

순수한 의도에서건 이해관계에 따라서건, 답례를 바라건 바라지 않건, 선물을 할 때 우리는 받는 사람의 마음에 기억을 남기려 한다. 이는 복지국가가 수행하는 재분배와 대조를 이룬다. 국가가 납세자의 돈을 복지수급자의 통장으로 옮길 때, 돈을 낸 사람은 어떤 인정도 기대하지 않으며, 받는 사람은 어떤 기억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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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1987년 현대중공업 파업 과정에서(현대중공업은 노동자대투쟁을 주도한 대표적 사업장이다) 터져 나온 여러 요구 가운데 맨 앞에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두발 자율화‘와 ‘복장 자율화‘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발 자율화나 복장 자율화는 체벌 금지와 더불어 학생인권운동의 단골 이슈이다. 노동자들이 이런 이슈를 제기했다는 것은 그들이 그때까지 사회적으로 미성년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원영미에 의하면 당시 "노동자들은 정문에서 건장한 체구의 경비로부터 사실상 ‘검문‘을 당하고 복장 및 두발 상태를 점검받았다. [・・・・・・] 경비들은 노동자의 두발 상태가 ‘불량한‘ 경우 경고를 하거나 ‘바리캉‘이라는 이발기구로 현장에서 즉석 이발을 강행하기도 하였다. 정문에서 이러한 통제는군대의 규율과 같았고 그런 만큼 노동자들은 정문 통과를 큰 부담으로 생각했으며 특별한 지적을 당할 경우 큰 수모감을 느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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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의 역설
- 전근대사회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모욕하는 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개새끼야. ‘나는 개새끼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복창해. 이제 개처럼 엎드려서 내 발을 핥아).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모욕의 역설은 전근대적인 신분 질서가 배제와 낙인, 그리고 조건부의 통합에 의해 유지되었음을 암시한다. 모욕이 의례적 질서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때, 즉 의례 코드 자체가 비대칭성을 띨 때(한쪽은 다른 쪽을 모욕할 수 있지만, 그 역은 불가능한 경우) 이는 그 사회에 신분 차별이 존재한다는 표시로 해석될 수 있다. 이때 차별당하는 집단은 이러한 차별을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 사회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성원권은 조건부로 주어지며, 이는 의례적 불평등성 속에서 일상적으로 확인된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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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에서 한국 보수까지

패터슨은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 - 플라톤을 따라 그가 타이모크라시 timocracy라고 부른 것 -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월해지려는 욕망, 권위에 대한 복종, 관직에 대한 야망, 군인다움에 대한 숭상, 금전에 대한 집착 등이 플라톤이 생각했던 타이모크라틱한 인간형의 특징이었다. 대규모의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어김없이 타이모크라틱한 문화와 인간형이 발달한다.  - P61

플라톤이 이 단어어를 사용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스파르타였지만,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의 문화에서도 이 명칭에 부합하는 특징들이 나타난다. 명예와 자존심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남자다움에 대한 칭송, 여성의 이상화와 격리, 한마디로 얼마간 시대착오적인 기사도 정신. 노예제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들이 명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과 노예의 차이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몰락하고 명예를 잃은 인간은 노예와 비슷해진다. 노예의 굴욕을 날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노예와 비슷해지는 것만큼 큰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정투쟁의 장 외부를 구성하는 노예의 존재는 이 투쟁을 생사를 건 싸움 life-and-death struggle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 - P62

4) Orlando Patterson, 같은 책, p. 386, note 14. 우월해지려는 욕망, 권위에 대한 복종, 관직에 대한 야망...... 이런 묘사를 읽다보면 나의 머릿속에는 막연하게 어떤 초상화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 초상화는 고대 그리스인이 아니라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경상도 출신이고 강남에 거주하며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60대 남자. 한국의 경상도는 미국 남부만큼이나 타이모크라틱한 것 같다. 사나이다움‘에 대한 자부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경상도는 ‘양반 문화‘가 뿌리 깊은 곳이다. 한국이 노예제 사회였다는 제임스 팔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양반 노릇을 하려면 종이 있어야하고, 양반 의식이란 ‘아랫것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태도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미국 남부의 타이모크라틱한 정서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KKK단의 결성으로 표출된 바 있다. 경상도가 언제나 한나라당.
지금은 새누리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어떤 이름으로 바뀔지 모르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광주학살을 주도했고 또 은폐했던 세력에 몰표를 주는 데에는 ‘지역감정‘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좀더 깊은 정치인류학적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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