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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의 포로들 - 세계의 패권 싸움은 지정학의 문제다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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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친스크 조약

청이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에 진출한 1644년, 현재 중국의 신장성 지역에서 몽골계인 오이라트 부족이 다시 흥기해, 중가르라는 새로운 세력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몽골 지역 유목세력의 제위인 칸으로 올라선 중가르 지도자 갈단은 동몽골고원, 남티베트고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청은 포위되는 형국이 됐다.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mgJ4AavEpgbRePdK9

청의 중가르 정벌은 고대 이래 전통적인 유라시아 대륙세력인 초원 유목세력의 종말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던 초원 유목세력의 기마병력은 총포를 동원한 청의 우세한 화력 앞에서 종언을 고했다.

여기에는 더 큰 요인이 있다. 청이 중가르를 정벌할 때 서쪽에서는 새로운 대륙세력이 동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bo6QCwKd9SsvJbYw5

청은 베이징으로 입성하기 전인 1639년부터 현재의 중-러 국경지대인 아무르강 유역에서 러시아와 충돌을 시작했다. 청은 조선의 병력까지 동원해, 동진하는 러시아를 막으려는 나선정벌도 벌였다. 양국은 강희제가 중가르 정벌을 하던 1689년 동시베리아의 네르친스크에서 서로의 영역을 정하는 국경조약을 맺었다. 아무르강과 와이싱안링(스타노보이)산맥을 경계로 두 제국의 국경은 정해졌다. 이는 초원 유목세력의 배후지가 중국과 러시아에 점령됐음을 의미했다.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whjE3SbUAci4qqvC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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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의 포로들 - 세계의 패권 싸움은 지정학의 문제다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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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원정과 토목의 변

홍무제와 3대 황제 영락제는 서북 방면의 초원 유목세력을 제어하는 데는 공을 들였다. 특히 영락제는 수도를 양쯔강 유역에 있는 난징에서 자신의 근거지였던 북방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서북 방면의 안보를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영락제는 북방 초원지대로 축출된 원의 잔여세력인 북원 등 초원 유목세력들을 몇 차례 원정을 통해 약화시키고 명의 통제하에 넣었다.

서북 방면의 안보위협이 관리되자, 영락제는 해금령 해제를 단행했다. 그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정화의 대원정이었다. 대원정의 주목적은 동남 연안지대를 관리할 해상력 정비와 확장이었다.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3wAqgUQXvs2PCAQj6


정화의 함대는 동아시아 교역의 사활적인 병목 지역인 말라카해협을 위협하던 한족 해적세력 소탕에 먼저 주력했다. 인도양에서 남중국해까지 주요 해로들의 안전과 정비가 주 목적이었다. 이를 통해 명의 제해권이 인도양 전역까지 확립됐다.

명대 정화의 대원정은 송 이후 중국의 새로운 중심이 된 강남과 그 경제력, 이와 연관된 해상력을 보여줬다.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z4onnmhnUi7AYHBE7


정화의 원정이 완전히 중단되던 즈음, 북방의 새로운 강자 몽골의 오이라트가 흥기했다. 정화의 대원정이 중단된 다음해인 1434년 오이라트의 지도자 토곤이 몽골 부족들을 통일했다. 몽골 초원을 제패하는 세력으로 성장해, 다시 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토곤을 이은 아들 에센이 1449년 조공무역을 놓고 벌인 분쟁으로 명을 침공해, 토목보(하북성 회래현) 전투에서 명의 황제 정통제를 포로로 생포했다.

명으로서는 전통적인 안보위협 지역인 내륙의 서북 방면을 내버려두고 한가롭게 동남 해안을 통해 바깥 세계로 진출할 현실적 여건이 아니었다. 서북 방면 초원 유목세력의 위협이 황제를 생포할 정도로 거세지는데, 먼 나라의 진기한 문물이나 가져오는 데 국력을 소모하는 것으로 보인 정화의 대원정을 지속하기는 힘들었다.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R8yg3E5Bhm4ohe8Q7

정화의 함대가 철수하자, 유럽이 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하다

정화 함대 대원정의 폐기로 명이 바다에 등을 돌린 지 60여 년 만에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서 아시아로 진출하는 문을 열었다. 그 후 유럽 해양세력들은 인도양과 동·남중국해까지 교역로와 해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말라카해협을 점령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은 태평양을 건너서 필리핀을 점령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가 차례로 동아시아까지 진출했다. - <지정학의 포로들>, 정의길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tt3tsXEV3Pr7Uq7v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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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문명 붕괴를 기뻐하라



왜 ‘붕괴‘를 개탄해야 하는가? 붕괴가 그려내는 상황이 보통 억압적이고 연약한 복합체인 국가가 더 작고 탈중심화된 파편들로 분해되는 것이라면, 국가의 붕괴를 한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국가의 붕괴를개탄하는 단순하면서도 전적으로 피상적인 이유 하나는, 고대 문명들에 관한 자료를 모아 정리해야 하는 사명을 띤 모든 학자와 전문가가필요로 하는 가공되지 않은 1차 자료들이 국가의 붕괴 탓에 사라지기때문이다. 국가의 붕괴로 고고학자들에게 중요한 발굴 장소도 줄어들고, 역사학자들에게 중요한 기록과 문헌도 줄어들며, 박물관 전시실을채울 크고 작은 장신구들도 줄어드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집트 고왕국, 기원전 제3천년기 중반의 우루크에 대한 멋지고 유익한 자료들은 많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그리스 ‘암흑기‘, 이집트 ‘제1중간기‘, 아카드제국 아래에서 진행된 우루크 쇠락기 자료들은 찾아봐야 헛수고다. 

그러나 이 ‘텅 빈 시기들이 짧으나마 수많은 국민이 자유를 만끽한시기이며 인류 복지가 개선된 시기였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다. - P266

인구 집단의 안녕을 궁정이나 국가 중심의 권력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초기 국가의 국민이 세금, 징병, 전염병, 압제를 피하기 위해 농경과 도시 중심을 모두 버리고 떠난 경우는 드물지 않다. 

한 가지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채집이나 목축과 같이 더 기초적인 형태의 생계 방식으로 퇴보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더 폭넓다고 생각하는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부역과 세금을 면했고, 전염병을 피했고, 억압적 구속에서 벗어나 더 큰 자유와 물리적 이동성을 확보했고, 어쩌면 전쟁터에서의 죽음을 모면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우에 국가를 버리고 떠난 일은 해방으로 경험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 관점이 국가 밖에서의 삶이 다른 종류의 위험과 폭력으로 특징지어지는 경우도 많음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도시 중심을 포기하는 것 그 자체가 폭력과 만행으로 몰락하는 일이라고 상정할 확실한 근거는 전혀 없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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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
- 1000천년의 메소포타미아 전원화
- 400년의 그리스 암흑기



정착생활이나 정착생활에 완전히 의존하는 국가 건설 모두 한 번에 이루어진 성과는 아니었다. 커다란 인구 집단이 사라져버리고 정착생활 자체가 그 이전 정착생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축소된 길고 긴 시기들이 있었다. 대략 기원전 1800년에서 700년까지 -1000년이 넘는 동안-메소포타미아의 정착지들은 그 이전의 4분의 1도 되지않았고, 도시 정착지들은 그 이전의 16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따른 결과는 그 일대 전체에 끼칠 정도였고, 그래서 그 결과를 가혹한 통치자라든가, 지역적 전쟁, 특별한 흉작 같은 순전히 국지적인 우발 사건들하고만 결부시킬 수는 없다.  - P244

완전하게 합의된 의견이 없는 것 같지만, 우르 제3왕조의 몰락 이후 1000년이 넘는 동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도시화보다는 전원화ruralization 가 지배적이었으며, 이는 대체로 갑작스러운 유목민의 침입때문이라고 하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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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2 - 근세부터 현대까지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2
최진기 지음 / 이지퍼블리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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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가하라, 고니시, 가토

1600년, 결국 이시다 미쓰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전쟁이 바로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1600, 일본 역사에서 도쿠가와 가의 패권이 확립된 전투)입니다. 오사카 성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언덕에서 일본군 30만 명이 격돌하는 일본 최대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시다 미쓰나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서군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는 사람들이 동군이죠. -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2>, 최진기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sF9K5rRZYMmfbZT8

이시다 미쓰나리에겐 여러 결점이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충신으로 꼽히던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나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악수로 작용합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 대립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을 듭니다. 이것은 나중에 서군의 패전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나빴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당연히 이시다 미쓰나리 편에 섭니다. -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2>, 최진기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481Kdu5Ai9ZFKzrr7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도착한 일본군은 1군부터 10군까지 군대를 나눠서 진격합니다. 1군은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선봉을 맡아 한양에 제일 먼저 입성한 무장)가 이끌고, 2군은 가토 기요마사(1562~1611, 일본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에 걸쳐 활동한 무장)가 이끌고 올라오죠. -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2>, 최진기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PsKuXPYCjMnPtG98A

일본은 순천에서부터 울산까지 23개의 성을 쌓고 버팁니다. 하지만 전세는 점점 더 조명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결국 일본군이 지키고 있던 울산성 마저 포위되고 맙니다.
일본군이 농성전을 펼치던 23개의 성 가운데 순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울산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으로 서로 라이벌 관계였습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상인 출신에 크리스찬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2>, 최진기 지음 -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DuAHUXv28HKVVH8G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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