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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사회 갈등의 사익적 요소들을 억압하지 않고 정당을 통해 복수의 공익적 대안으로 발전시켜 경쟁을 통해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결정구조를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여러 갈등의 이슈를 공동체가 지향할 공익적 차원의 대안으로 발전시켜 통합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갈등의 축과 동맹의 축을 명료하게 만드는 정당의 역할이 존재해야 하고 이들 정당은 서로 다른 집단과 이해에 기반을 둔 경쟁적 대안을 발전시켜야 한다.(최장집, 2002,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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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찮게 뉴스를 통해 미국의 부호가 얼마를 기부했다는 얘길 듣는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니 하면서 미국의 기부문화를 칭송하는 얘기가 국내 신문과 포탈 사이트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유럽의 부호가 기부했다는 얘긴 별로 듣지 못했다. 이러한 느낌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전한 뉴스에 따르면 2003년 기준으로 1인당 모금액을 국제적으로 비교하면 미국, 캐나다, 싱가폴이 1, 2, 3위를 차지하고 홍콩이 6위 한국이 7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유럽의 선진국은 순위권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과 유럽의 사회보장시스템의 차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유럽과 달리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해 있지 않다. 정부지출을 통해 사회보장이 이루어지므로 정부재정의 규모는 사회보장제도의 척도가 될 수 있다. 2002년 미국의 조세부담률은 17.7%이다. 이에 비해 EU 15개국 평균은 29.1%이다. 조세에 사회보장부담금을 더한 국민부담률은 미국이 24.8%인데 비해 EU 15개국은 40.5%이다.

 

유럽의 부호는 세금을 통해 충분히 기부를 하고 있지만 미국의 부호는 유럽 기준으로 볼 때 세금을 많이 내지 않는다. 유럽의 부호는 세금을 많이 내고 그 세금이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굳이 더 기부를 할 마음이 없지만, 미국의 부호가 기부를 활발히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눈에 밟혀서 기부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도덕의 잣대로 미국의 시스템을 높이 평가한다. 유럽의 시스템은 강제로 부자로부터 돈을 뺏어서 빈자에게 나눠주는 것이니 부자에게는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는 분노만 남기고 빈자는 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제공받으므로 감사함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시스템은 도덕적이다. 부자는 자신의 양심의 결단으로 자선을 베풀고 빈자는 부자의 선의에 감동하며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유럽의 시스템은 사후적 형평이란 관점에서 결과가 좀더 도덕적일진 몰라도 내부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비도덕적으로 만든다. 이에 비해 미국의 시스템은 부자의 기부를 통해 형평에 접근하면서 사람의 심성과 인간관계를 도덕적이게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철학자 와써스트롬이 1960년대 초반의 미국 흑인의 민권운동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논변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남부 백인들은 자신들이 흑인들의 복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주 주장했다. 마치 현재 미국의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를 기부금의 형태로 표현하듯이 말이다. 와써스트롬은 이에 대해 “이런 방식의 사태 파악은 대부분 흑인으로 하여금 권리의 문제로서 자기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인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그들이 취급받는 방식에 대해 저항할 수 있게하는 신분을 부정한다. 만일 남부의 백인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와 그의 양심 사이의 문제이다"라고 지적했다.

 

의무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타인의 권리주장에서 유래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선심, 자비심, 높은 신분 등과 관련된 도덕적 의무이다. 남부 백인들은 도덕적 의무를 주장하는 전략을 통해 흑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양심 사이의 문제인 도덕적 의무에는 지대한 관심을 갖지만 흑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놓지 않고 머뭇거리는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부자들이 기부와 자선의 도덕적 의무를 주장하고 가난한 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전략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가난한 이가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단지 가난한 이의 복리가 증진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공리주의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풍부한 도덕적 의미를 갖고 있다. 권리 담지자로서의 자아 개념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의 중요한 부분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을 권리의 소유자로 보는 것은 인격체를 목적으로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생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의 철학자 파인버그는 "권리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발로 서게 해주고 타인에게 떳떳하게 대하고 어떤 근본적인 방식으로 모두의 평등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을 권리의 담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도한 긍지가 아니라 적절한 긍지를 갖는 것이며, 타인의 사랑과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자존감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만큼 풍부한 도덕적 함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상에서 미국의 기부문화와 유럽의 복지제도를 비교하면서 어떤 사회가 더 도덕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해보고자 했다. 가난한 이의 문제가 부자의 양심의 문제로만 존재하는 사회보다 가난한 이가 권리의 담지자로서 긍지와 자존감을 갖는 사회가 더 도덕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나라는 1998년 기존의 생활보호법 대신에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여 사회복지제도를 정비한 바 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 생활보장을 받는 이들을 수급권자라고 부르는데 비해 과거의 생활보호법에서는 이들을 생활보호대상자라고 불렀다. 두 호칭의 배후에 있는 철학적 견해의 차이가 이 글을 통해 널리, 특히 경제학자들에게, 인식될 수 있으면 좋겠다. 경제적 영역에서 권리라고는 소유권 이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경제학자들은 기부와 사회보장, 양심과 가난한 이의 권리에 대해, 잠시 경제학의 효율성 대 평등이라는 논변을 잊고, 권리와 의무라는 정치철학적 시각을 통해 곰곰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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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뜨거운 감자) 지난 2005년 4월 4일 스크린쿼터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는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의 발언은 다시 한번 스크린쿼터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만들었다. 스크린쿼터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문제는 한국의 영화가 주목을 받고 한국 영화시장이 성장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논쟁은 스크린쿼터 자체의 폐지 아니면 온존의 질적인 판단을 둘러싼 논란의 형태를 띠기도 하고 어떨 때는 쿼터 비율의 확대와 축소라는 양적인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2. (질문의 변경) 이 글에서는 시각을 달리하여 국내산업의 보호, 수입제한, 수입대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스크린쿼터가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수입대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스크린쿼터 이외에도 관세부과, 보조금지급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수단과 비교할 때 스크린쿼터는 열등한 수단인지 아니면 우월한 수단인지를 검토하자는 것이다. 질문을 바꾸는 이유는 영화가 보호가 필요한 특별한 재화 또는 산업인지에 대해서 그간 관계 전문가의 논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데 더 보탤 것이 없으며 새로운 질문을 통해 새로운 측면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논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관세부과) 영화와 관련하여 세가지 정책수단 중에서 관세부과의 방식은 실제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영화는 배급의 단위비용이 거의 미미하기 때문이다. 생산의 비용은 엄청나게 높지만 복사하여 배포하여 상영하는데는 그다지 돈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관세를 아무리 매기더라도 해외생산자와 배급자는 싸게 가격을 매김으로써 관세의 효과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4. (프랑스와 한국) 수입대체를 위한 정책수단은 국내 영화계에 대한 보조금 지급의 대안과 배급시장에서 강제로 1년에 몇 일을 의무상영하도록 하는 스크린쿼터의 대안 두개가 남게된다. 보조금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프랑스였다. 이에 비해 쿼터제의 대안을 적극 활용한 것은 한국이다. 국내 영화계의 성장을 지원한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두 개의 수단이 귀결한 것은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영화의 점유율의 하락과 헐리우드 영화의 득세인데 비해 한국의 경우 한국 영화의 점유율의 상승으로 완전히 상반된 결과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5. (보조금과 예술영화) 보조금 지급의 문제의 경우 누가 보조금을 받을지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바로 부딪힌다. 이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미술대회에서 심사위원이 미술전문가인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의 경우 바로 이렇게 보조금 수혜자를 결정했다. 유명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로 구성된 심의위원회에서 보조금 수혜자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 결정과정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대중의 영화취향을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고 고급스러운 영화취향을 나홀로 추구하는 악명 높은 영화평론가들과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추구하는 거장으로서 이윤을 추구하는 제작사 사장과 갈등을 빚는 영화감독이 모여서 결정한 수혜자는 그들의 취향에 맞는 감독의 영화이지 대중이 원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전문가들이 높이 평가하는 예술영화와 작가주의 영화들이 정부 세금의 지원과 함께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프랑스에서의 프랑스 영화의 점유율은 계속 떨어져갔다.

6. (스크린쿼터와 경쟁) 스크린쿼터 제도는 누가 일종의 보조금을 받을 것인지를 전적으로 대중에게 맡기는 시스템이다. 마치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듯이 사람들은 7~8천원의 돈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에 투표를 한다. 스크린쿼터에서는 정부의 세금이 필요없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제작자에게 보조금과 비슷한 이윤이라는 상금을 안겨다 준다. 스크린쿼터 제도는 단지 한국 영화 전체에게 안정적인 시장을 제공할 뿐 특정 감독에게 안정적인 시장을 주진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한국 영화 내의 제작자, 감독, 배우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야기되고 경쟁의 결과는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본 것과 같다. 스크린쿼터 제도의 성공이 경쟁에 대한 경제학의 일반적 원리를 바꾸도록 강요하는 증거이지는 않다. 경제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경쟁이 뛰어난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이지 경쟁 속에 반드시 해외경쟁이 포함되어야만 뛰어난 성과가 귀결된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7. (상업주의 편향) 한국 영화에 대해 양적인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지만 특정 장르 영화에 편중되어 있다거나 코미디와 같은 상업적 성격이 농후한 영화만이 다량 생산된다는 식의 비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대중문화, 상업문화 전반의 문제이기 스크린쿼터 제도의 책임은 아니다. 스크린쿼터와 보조금 지급을 두고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스크린쿼터 제도는 어떤 특정 영화에 대한 편향적 지원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조금 제도는 앞서 언급한 프랑스와 같이 운영될 경우 예술영화, 작가주의 영화를 지원하는 편향을 가진 제도이다. 이에 비해 스크린쿼터 제도에서는 대중이 결정할 뿐 제도 자체의 편향성은 없다.  

8. (민주화와 영화) 한국 영화의 성공을 스크린쿼터 제도에 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주장이고 필자 역시 전혀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다. 스크린쿼터 제도는 한국 영화가 뜨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제도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의 성공을 스크린쿼터에 한정하는 논변은 무너진다. 이전부터 스크린쿼터가 있었는데 성공한 시점은 왜 그 시기였느냐라고 묻는다면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로 인한 소재와 주제의 다양화이다. 유신과 그 뒤를 이은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다수의 사람과 거액의 돈이 상상력을 통해 결합되는 영화라는 장르 또는 산업은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것이다. 추가적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가 스크린쿼터 제도 없이 성공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필자는 동의한다.

9. (헐리우드의 음모?) 국내 영화의 지원, 수입대체의 목적을 달성하는 여러 정책수단 중에서 스크린쿼터 제도는 다른 정책수단들보다 국내 영화 점유율의 잣대를 기준으로 할 때 우월하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비가격적 규제방식보다는 가격규제방식이 우월하다는 선입감 또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실제 정책수단 중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스크린쿼터가 그 하나의 예이다.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두고 제3세계에서 채택할 수 있는 성공모델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고 최근 프랑스에서 한국 영화의 성공을 보고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도입해보자는 논의가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미국이 그리고 헐리우드가 한국의 스크린쿼터를 약화 또는 폐지시키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단순히 한국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크린쿼터 제도의 세계적 확산의 위험성 때문이라면 약간 오버한 상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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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자선이 갖는 의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변을 앞서 말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는 Wasserstrom에 의해 피력된 바 있다. Wasserstrom은 1960년대 초반의 흑인의 민권운동에 대해 남부 백인들의 주장을 평가한 바 있다. 남부 백인들은 자신들이 흑인들의 복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고 자주 주장했다고 한다. 마치 현재 미국의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를 기부금의 형태로 표현하듯이 말이다. 이에 대해 Wasserstrom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방식의 사태 파악은 대부분 흑인으로 하여금 권리의 문제로서 자기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인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그들이 취급받는 방식에 대해 저항할 수 있게하는 신분을 부정한다. 만일 남부의 백인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와 그의 양심 사이의 문제이다"(Simon and Bowie, p. 72)

의무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타인의 권리주장에서 유래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선심, 자비심, 높은 신분 등에 첨부되는 도덕적 의무이다. 남부 백인들은 도덕적 의무를 주장하는 전략을 통해 흑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자신과 자신의 양심 사이의 문제인 도덕적 의무에는 지대한 관심을 갖지만 흑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놓지 않고 머뭇거리는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부자들이 기부와 자선의 도덕적 의무를 주장하는 전략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가난한 이가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첫째, 권리는 의무를 함축한다. 만일 누가 무엇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면 어떤 다른 사람들은 그 권리를 충족시키거나 최소한 권리를 가진 자가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과 자신 사이의 도덕적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로부터 유래하는 의무이다. 양심은 자신 내부의 문제이므로 어떨 때는 지켜도 되고 어떨 때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권리로부터 유래하는 의무는 상대방이 지켜보고 있으므로 지켜야하는 사회적 압력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가난한 이의 복리가 증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둘째, 가난한 이가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단순히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공리주의적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풍부한 도덕적 의미를 갖고 있다. 권리 담지자로서의 자아 개념을 갖지 못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의 중요한 부분을 갖지 못하는 것이며 인간을 권리의 소유자로 보는 것은 인격체를 목적으로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생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만큼 풍부한 도덕적 함의는 있을 수 있겠는가?  Feinberg는 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권리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발로 서게 해주고 타인에게 떳떳하게 대하고 어떤 근본적인 방식으로 모두의 평등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인 도덕 상품이라고 말하겠다. 자신을 권리의 담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도한 긍지가 아니라 적절한 긍지를 갖는 것이며, 타인의 사랑과 존중을 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자존감을 가지는 것이다." (Simon and Bowie, p. 97 재인용)

이상에서 나는 미국식 기부문화와 서유럽식 복지제도의 비교를 통해 어느 사회가 도덕적이냐는 질문에 대해 답해보고자 했다. 나는 가난한 이의 문제가 부자의 양심의 문제로만 존재하는 사회보다 가난한 이가 권리의 담지자로서 긍지와 자존감을 갖는 사회가 더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결론에 대해 반론의 여지는 존재한다. 아마도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 문제에 대한 나의 논변(또는 Simon and Bowie의 논변)을 받아들이더라도 권리의 범위를 생존이나 복지로까지 확장하는 것은 반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Simon and Bowie의 책의 상당부분은 소극적 권리를 넘어선 복지와 같은 적극적 권리가 옹호되어야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다. 그들의 논의의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극적 권리에 한정되어서는 실질적으로 곤란하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며 이에 대해 나 자신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1998년 제정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 생활보장을 받는 이들을 수급권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있었던 생활보호법에서는 이들을 생활보호대상자라고 불렀다. 두 호칭의 차이에 대해 사회복지학계에서는 큰 의미를 두고 평가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호칭의 배후에 있는 정치철학적 견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 자신 Simon and Bowie의 책을 통해 그 차이를 비로소 인식했다. 변명을 하자면 나의 한계는 어떤 의미에서 경제학을 배운 이들의 한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영역에서 권리라고는 소유권 이외에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경제학자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의의 나아가 약자와 빈자의 권리에 대해 잠시 경제학의 효율성 대 평등이라는 논변을 잊고 권리와 의무라는 정치철학적 시각을 통해 곰곰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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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논쟁이 끝갈데를 모른채 계속된다. 어떨 때는 그래, 좌 우파의 논쟁이 살아있는 사회가 좋은 거야라고 생각이 들지만 어떨 때는 효율성과 효과성으로 따져야할 문제가 한없이 트집잡는 이념의 문제가 되어버리면 이런 논쟁을 왜 21세기에 계속 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정부와 여당의 경제정책에 대한 극우파와 이에 휩싸인 한나라당 일부의 비판은 걸핏하면 사회주의다, 좌파, 반미다하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어느 경제학자를 잡고 물어보라.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중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아무도 대답 못한다. 현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를 극단화시켜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에게 합리적 토론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 맞다. 이들은 근본적 문제 - 소유와 권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경제학의 근저에 있는 철학의 문제이다. 케인즈와 피구가 다투었고 사무엘슨과 프리드만이 다투었던 문제이다.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어느 보수적인 경제학자도 정부개입주의자와 논쟁하면서 그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이고 마녀사냥을 하지는 않는다. 논쟁은 정책이 의도한 목표를 그 정책수단이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지에 촛점이 맞추어질 뿐이다.

나이브한 경제학자에게 기술적이고 실용적인 문제를 떠나서 근본문제를 고민케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경제학자들에게 철학적 고민은 과하면 독이 된다. 그들에게 그들에 맞는 고민을 허하라. 나 또한 안 보던 철학책을 붙잡고 있는 지금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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