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에 소방차가 있다고 요란한 싸이렌 소리가 들렸다. 골목을 꺾어서니 바로 우리 건물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여기에, 여기 이 건물에 무슨 일 난 건 아..아니죠?' 나는 이렇게 가까이서 불자동차를 보는 건 난생 처음이라 잠깐 이성을 잃고 다짜고짜 소방관을 다구쳤다.
소방관 아저씨는-'아저씨'라는 표현이 민망하게 앳된 얼굴이었다- '아닙니다'라고 중얼거리듯 말하며 짧은 순간이나마 미소도 지어 보였다. 짐작컨데 스물 중반은 되었겠지만 동안일 것이다. 얼굴은 갓 스물 정도밖에 안 되어 뵈는 젊은 두 소방관은 우리 건물 입구에 털썩 주저앉아 있고 중년의 소방관은 소방차에 바짝 붙어서서 초조하게 무전기를 만지작거렸다. 세 사람은 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고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아침부터 뜨겁게 몰아부치는 늦더위에게 한 마디씩 투덜거렸다.
"에휴~놀래라. 저 싸이렌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리네..." 계단을 올라가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내 말을 들었는지 2층 사무실에 들어서니 싸이렌 소리가 멈추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블라인드 사이로 내다보길 몇 번. 싸이렌 소리는 꺼졌어도 시동이 켜진 소방차는 당장이라도 달려갈 기세로 기를 끌어모으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출발선 앞에서 온 신경을 곧추세우고 총 소리를 기다리는 달리기 선수처럼.
그러나 좀처럼 출발 신호는 들리지 않았다. 좌불안석 무전기에 목을 메던 중년 소방관의 행동은 고장난 동영상처럼 같은 동작만 무한 반복되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뜨거운 햇빛이 빨간 소방차를 더 빨갛게 달구고 그 빛을 고스란히 다 이겨내며 서있는 소방관의 얼굴을 비틀어 짜서 얼굴엔 굵직한 주름들이 패였다. 구화를 배운 적도 없는데 그의 입모양이 '아! 더워! 더워!'하라고 말하고 있다고 또렷이 알아먹혔다.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가히 빛의 속도라 할 수 있는 초스피드로 유리 주전자를 꺼내고 냉커피 다섯 봉지를 찢어 붓고 숟갈로 챙챙 저으며 얼음도 우르르 붓다가 흔드는 한편 다른 손으론 컵 세 개를 챙기고 계단을 두 칸씩(어쩌면 세 칸일지도?) 내리 달렸다. 미친 속도, 우사인 볼트의 100m 기록과 맞먹는 속도였으리.
아! 그러나 어쩌면 좋아.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담! 내 아무리 우사인 볼트의 뺨을 후려치며 커피를 타서 미친X같이 계단을 날았어도 대한민국의 소방차는 한 수 위였던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도 여기 있던 그 육중한 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기진맥진하여 내가 갖고 온 이 달콤하고 시원한 물을 생명수처럼 받아 마셨을 풋풋한 청년들까지 집어삼키고 떠난 것이다. 나는 냉커피 주전자와 종이컵을 양 손에 들고 소방차가 도망쳤음직 싶은 방향으로 망연자실 서있었다. 부정 출발로 대회 출전 자격이 박탈된 자메이카 사나이 볼트를 보던 때와 비슷한 심정이랄까. 내 속도 모르고 냉커피의 얼음 알갱이들은 잘강잘강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더운데 이것 좀 마셔보세요. 오오, 고맙습니다! 잘그랑잘그랑잘그..... 10초만 더 빨랐어도 이 시원한 것을 마시게 해 줄 수 있었는데, 엷게 짓다만 그 미소가 함뿍 지어졌을 텐데..... 끝내 아쉬웠다.
"커피만 광속으로 타면 뭘 해? 그 생각을 너무 늦게 한 거야....."
풀이 죽어 올라 온 나에게 남편도 안타까워했다. '에이, 그 사람들 참 먹을 복도 없어. 내가 내려다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후다닥 차에 올라타더니 쏜살같이 달려가버리더라구.'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가 뭐라고 한마디 하니까 사무실 사람들이 어이가 없어서 한바탕 웃었다. 이렇게 약 5분간의 헤프닝은 끝!^^ 20110829ㅇㅂㅊ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