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좋은 친구가 어떤 소설 한 편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실화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부분은 소설같고, 허구의 대목은 현실 같다고. 이따금씩 친구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말은 어처구니 없는 현실과 맞닥뜨린 내게 위로가 된다. 이 순간은 소설일지도 몰라. 나는 지금 어떤 작가의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거야. 언제나 그 순간만, 고비만 넘기면 살 만하다. 그렇게 잠깐을 보내면 지독한 소설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시간이 흐른 다음엔 침 튀기며 내가 말이야 이런 일이 있었는데...하며 수다를 떨게 되면, 내 몸이 담겨져있던 그 소설의 시간은 더이상 지독한 기억은 아니었다고 말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떤 소설의 한 복판에 들어와 있는걸까.
어떤 책들은 표지로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책들은 작가의 이름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은유하기도 한다. 책 한 권은 온전히 작가의 몸이면서 손이고, 눈이고, 발이다. 신체의 한 부분만 스며들어있는 책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시간들이 표지에, 책등에, 목차에 실려있다.
<나쁜피>의 화숙은 소설의 인물 같지 않고 현실의 인물 같다. 곧 철거될 건물, 후미진 오락실에 가면 화숙을 만날 것만 같다. 화숙이라는 인물도 매력적이지만 이 소설의 미덕은 진순, 혜주, 화숙이 이룬 가정의 형태다. 핏줄로 생성되는 자연발생적 가정이 아니라 사연과 상황이 맺어준 특별한 가족. 이 소설에서 놓치면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의 소설들은 중독성이 강하다. 조금 전에 마신 사과맛 사이다를 자꾸 홀짝이게 되는 것처럼 이 소설도 그런 맛이 있다. 그런데 그게 녹록하지 않다. 곱씹을수록 우리가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으나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환상통>의 도입은에선 젊은 여자가 냉장고 성에를 그악스럽게 제거하고 있다. 여자의 볼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겠지. 성에를 긁어내는 손목에는 그녀의 체중이 다 실려있을 것이다.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여자가, 그러고 있다. 그토록 어린 여자가, 그 밤중에.
문득,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어릴땐 정기적으로 엄마가 냉장고 성에를 제거했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 냉장고들은 성에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얼마전 엄마는 실수로 냉장고 문을 닫지 않고 잠을 잤다. 다음날 냉장고에 성에가 끼었고 엄마는 폭설이 얼어붙은 냉장고를 보며 전자제품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냉장고 수리 기사는 엄마의 깨끗한 냉장고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양문형 냉장고가 나오기 직전에 산 냉장고인데 어디 하나 생채기가 나지도 않았으며 선반, 실리콘 등등이 얼룩 하나 없이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의 여자는 이웃집 여자의 자살 소식을 남편에게 전한다. 당신이랑 친했어? 라고 남편이 묻자 여자는 아니라고 얼버무린다. 그러자 남편은 그럼 됐어, 하고는 서재로 들어간다. 끔찍한 사건 보다 더 소름이 돋는 장면이었다. 차라리 <나쁜피>의 화숙처럼 드러내놓고 자신을 아프게 한 상대를 미워하는 게 더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다. 이웃에서 누군가, 나와 어떤 친분을 쌓았던 이웃이 죽었는데도 그저 멀거니 서서 하루가 끝났다고 말하는 여자 보다는 화숙이 더 낫다. 누군가 우스개소리처럼 말했다. 나만 아니면 되지 뭐. 이 말의 공포는 이 작품 <하루>에 스며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조차 숨기면서.
김이설의 인물들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실루엣으로는 절대로 부족하다. 또렷한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내장기관까지 또렷하게 그려줘야 할 것처럼 혹독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김이설은 혹독하고 아픈 사람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만 할 줄 안다고 말하는 작가는 아니다. 끈질기게 소리를 추격하여 청각을 시각화 시키고 시각의 통로에서 나와 대면하게 되는 <손>의 놀라운 관찰력과 주의 깊음에서 작가의 깊은 시선을 감지한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컴퓨터 세상과 독대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작가의 역량, 넓은 시선을 보여준다. 김이설의 문장은 스타카토를 치듯 빠르고 간결하며 정확하다. 딱 그 문장이어야만 할 것 같다. 딱 그 여자, 그 이름이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문장에선 활자들이 펄펄 튀어올라 뺨을 철썩- 때린다. 아야- :)
책을 선물해준 내 좋은 친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그리고 내가 힘이 되고 싶다는 고백도 전한다-
지난해 초여름에 읽은 <여덟번째 방>은 자주 떠오르는 소설이다. 김미월은 담백하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다. 캐릭터들은 문장에, 행간에 스며있지 결코 혼자 떠오르지 않는다. 문장이 살면 나도 살고 문장이 죽으면 나도 죽어, 라는 슬로건이라도 새기고 있는지 그들은 같이 움직인다. 우리는 모두 치렁치렁하지 않기로 했어, 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욕심 부린 문장, 서사가 없다. 힘을 빼고도 힘있는 소설인 셈이다. 힘을 빼면 힘이 생기는걸까.
<사랑하기 위한 일곱번의 시도> 는 엽편 소설, 콩트의 느낌이다. 허수경 시인의 번역이어서 집어들었다. 순간이라고 하는 아주 짧은 포착의 시간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갑자기 시작하고 불쑥 끝나버린다. 여운이 남는 어떤 소설도 있고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소설도 있다. 물론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소설도 있지만. 분위기를 타고 이국의 세계로 흘러가고 싶을때 읽으면 좋을 소설.
<작가의 집>은 작가의 삶과 작품이 들어있는 작가의 집에 관한 이야기다. 뒤라스는 자신의 집에서 고독을 발명하는 사람처럼 살았고 마크 트웨인의 작업실 바닥은 항상 어질러져 있었으며 카렌 블릭센의 초록의자, 초록 테이블이 있는 초록 거실은 꼭 한번 가고 싶어진다. 불만이라면, 여성 작가들에게는 굳이, 여류 작가라고 달아놓았다는 것이다. 사진만으로도 여성 남성인지는 식별 가능한데 왜 그랬을까. 유행인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컬러링이 에피톤 프로젝트의 <선인장>이었다. 혹여 누군가에 대해 함부로 말하게 될까봐, 누군가에게 폐가 될까봐 조심스러워하는 친구와 잘 어울리는 BGM이다. 또 한친구는 지금 멋진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손편지>가 참 좋다며 블로그에 동영상을 올려놓았다. 동영상에선 그녀가 손으로 빚어 퍼 올린 것처럼 깨끗한 흙냄새가 풍겼다. 이토록 청아한 5월, 오늘처럼 습기도 없는 5월엔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가 딱이다.
동네 산책로에는 벌써 보라색 창포가 피었다. 식물의 규칙적인 리듬은 존경스럽다. 내가 정말 울어야할 때 울고, 웃어야 할 때 웃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누군가에게 무엇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에너자이저, 파워레인저다. 그런 착각 조차 아름다운 5월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