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점심상  

잠깐, 광화문 어디쯤에서 만나 밥을 먹는다
게장백반이나 소꼬리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이라도
무얼 먹어도 아픈 저 점심상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너는 다시 어딘가에서 넥타이를 반쯤 풀며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누르고
나는 어디, 부모 친척 없는 곳으로 가볼까?
그때, 넌 왜 내게 왔지? 

너, 왜라고 물었니? 
C'est la vie, 이 나쁜 것들아!  
나, 어디 도시의 그늘진 골목에 가서 
비통하게 머리를 벽에 찧으며...... 

다시 간다  

詩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프렌치 토스트에 딸기잼을 듬뿍 바르고 햄 한 조각 넣어 씹어먹는 아침상. 배경음악도 아닌 배경수다처럼 틀어놓은 티비에선 올여름 휴가를 함께 하고 싶은 연예인들을 꼽는다. 남편이 묻는다. 자기는 누구랑 휴가를 가고 싶어? 스크램블 에그를 한 입 가득 넣고 남편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나, 혼자. 어느덧 나를 닮아 애교가 늘어버린 남편은 생글생글 웃으며 자기는 나와 함께 휴가를 가고 싶다고, 뻥, 일지도 모를 접대용 멘트를, 철철, 흘린다. 어디에서 보았더라. 나처럼 말한 대다수의 여자들을 본 적 있다. 그들은 일상에 지치고 시들어버린 여자들이었다. 여름 초입부터 두 달 동안, 지금까지 쭈욱 힘들고 고단하고 시들고 피곤하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남들 다 가는 유럽 배낭 여행을 보며 엄마가 말했다. 너도 다녀와. 못 간 이유는 많았다. 갑자기 가려니 난감했고 엄마가 진즉에 떠밀지 않은 것이 야속했고 봐야할 영화가 수북했다, 그때. 나중에 가지 뭐 하고 말았는데... 그때 갔어야 했다. 아니면 그때 못 간 휴가, 지금 되찾아서 떠나고 싶다. 물론, 나 혼자. 혼자, 라는 것 때문에 이 시집을 꺼낸 건 아니다. 이 시집이야말로 어떤 구실에서든 내가 불쑥 꺼내볼 수 있는 진통제니까. 진통제를 스윽, 눈으로 맥주먹는 게처럼 스윽 빨아들인다. 심장이, 마음이 차가워진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나 혼자 가장 편한 신발을 신고 노트북과 <렛미인><완벽한 병실>을 들고 떠났으면 좋겠다. 아아. 막 상상하니까 막 행복해진다. 어쨌든 나도 어디로든 다시 간다.  

 

 

  

 

 

 

 

  


책그림이 있어야 멋있어지는 알라딘 페이퍼. 한밤중만 피해서 읽자 하면서도 꼭 잠자리에 들어서야 렛미인을 펼쳐보게 된다. 꿈자리가 사나울까봐 많이 읽지 못하고 접어버린다. 영화보다 더 좋을거란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디비디가 나오는대로 꼭! 자로 잰듯 소설 쓰는 여자 오가와 요코의 완벽한 병실은 집중을 필요로 한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바꿔나가는 소설가의 재능을 훔쳐보며 마구마구 생성되는 건물들과 책상과 병실 침대를 상상한다. <임신캘린더> <약지의 표본> <박사가 사랑한 수식>과는 다르다. 언제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그 다음 작품이 참 좋은 작가중에 한사람.  

저녁은 좀 가볍게 먹고 싶다. 서늘하면 더 좋겠다. 오늘은 일년 중 가장 무더운 '대서'다. 어제 일식 이후에 시원해진 날씨. 대서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크크. 이대로라면 여름, 지낼만하다.   

 페이퍼 배경음악은 윤상 <소심한 물고기들> 이었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9-07-23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오늘 플레져님은 요새 무얼하고 계실까 생각했는데 페이퍼가 떴어요. 너무 놀라워요! 문학동네 훔치고 싶은 책 10권 리스트 당첨자 보면서 '문학'하니까 플레져님이 떠올랐거든요. 반가워요! ^^

플레져 2009-07-23 23:13   좋아요 0 | URL
아. 반가워요, 마노아님. 그저 무심코 페이퍼쓰기를 눌렀던 것이 아니라 마노아님의 궁금증 호르몬 덕분이었던가보네요 ^^ '문학' 으로 저를 생각해주셨다니 너무 좋은걸요. 헤헤.

2009-07-23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3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7-2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핑 제목을 보고 이런 제목의 시가 올라와 있을 것 같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네요. 박연준의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도 플레져님덕에 알게 됐었죠. 지금도 제가 그나마 가장 자주 펼쳐보는 시집이에요. (시를 잘 몰라요 ㅜㅡ)

그나저나 렛미인이 영화보다 더 좋단 말예요? 아아. 또 사야 된단 말예요? 휴..

밤과 이른 아침에는 서늘하니 잠도 잘 와요. 잘 자요, 플레져님.

플레져 2009-07-24 09:49   좋아요 0 | URL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
영화만큼 좋은 것 같아요. 좋은 영화는 좋은 원작이 있듯이 말이죠.
원작 소설을 매끄럽게, 액기스만 쏙, 뽑아서 간결하게 만들었다는 느낌.
돈.주.고. 사셔야 할텐데...1년 후 이벤트를 기다리기엔 좀 그렇죠? ㅎㅎ

Kitty 2009-07-2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플레져니임~~~~ 글 보니 넘 좋아용~~
남편분이 진짜 애교가 많으신 듯 ㅋㅋㅋㅋㅋ 너무 좋아보입니다~
저도 문학, 특히 한국문학하면 플레져님이 젤 먼저 생각나요!! ㅎㅎㅎㅎ

플레져 2009-07-24 09:50   좋아요 0 | URL
무뚝뚝한 나무 토막도 애교쟁이로 만들어버리는 저의 비결...은 없습니다만 ㅎㅎ 아마도 함께 한 시간 덕분에 서로를 닮아버린 것 같아요.
잘 지내신거죠? 한국문학하면 플레져! 이거이거 기분 최고인걸요 ^^!

2009-07-25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28 0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07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8-18 0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