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서 밤으로 건너가는 시간. 프랑스 사람들은 이 짧고 진한 저녁 시간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른다고 했던가. 해가 지면서 설핏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면 저만치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 모호한 시간대, J는 하루 중 이 무렵을 가장 좋아했다. 하늘이 새까만 어둠으로 완전히 뒤덮이기 직전 희부연 어둑함에 막 젖어들기 시작할 즈음의 세상은 온기와 물기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공기는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고 보호해 주듯이 미묘하게 부풀어오른다. 그 공기 속으로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홑이불 같은 빛이 가벼운 구름처럼 가득 차 있다. 그제서야 J의 몸은 개운하고 가뿐하게 깨어나는 듯했고, 마음은 그리운 어딘가를 향해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무작정 나서 보고 싶은 충동 같은 물결이 은밀히 일렁이다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스물스물 물기가 잦아드는 눈으로 물끄러미 풍경을 바라보게 되는 것도 이 무렵에 종종 겪는 일이었다.
한 사람의 일생이라는 주기 곡선으로 치자면 이즈음 J의 나이대가 바로 그 저녁 무렵에 해당되지 않을까. 헌데 어렴풋하고 불분명하고 모호한 저녁 무렵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과는 이율배반적으로, J는 이제 막 당도해 여장을 풀고 있는 이 저녁 무렵을 닮은 자신의 나이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이 나이쯤의 나는 이런 모습이리라,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자화상이 개의 형상인지, 늑대의 형상인지조차 명확히 깨닫지 못한 채 여기까지 흘러온 탓일까.
집에 돌아가면 분명 텅 빈 기분에 휩싸이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J는 별 도리 없이 집으로 향했다. 무언가 이 빈 시간을 색다른 것으로 채우거나 잠시 눈이나 마음이 현혹될 무언가에 기대 흘려 보낼 방법을 궁리할 여력도 없었다. 이런 기분이 들 때 하릴없이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서성거리거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볼 염(念)을 내지 않는 데서 전과 달라진 자신을 느낀다. 그런 마음의 기웃거림이 시들하고 귀찮고 부질없는 짓이라고 느껴지는 건 분명 나이 든 탓이려니.
J는 옷을 갈아입은 뒤 곧바로 아침에 개지도 않고 놔둔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간다. 지금 같은 때는 잠 속으로 도망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충전과 회복의 방책이란 걸 알고 있기에. 베개에 머리를 뉘이면서 J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알 수 없는 일이야,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는데,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고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니 끝을 맺어야 한다는 식의 의무감과 책임감에 떠밀려 여기까지 오게 된 일인데, 그 일이 끝났다고 이렇게까지 허탈할 이유가 있을까...... 헌데 새삼스레 내게 중요한 것, 의미가 있고 없고 따위를 따지다니...... 이제 사사건건 혼자 생각 많은 척하며 그런 의미나 가치를 재는 일에는 정말 지쳐 버렸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리고 내일이라는 새로운 날이 오면 또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세수 한번 하고 나면 졸음이 달아나듯, 그렇게 말짱한 얼굴로 또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J는 좀 분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막막하고 어두워진 길을 삶으로 채워 가야 하지 않겠냐고 자신을 설득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이 나이까지 줄곧 J는 눈가리개를 하고 정해진 궤도를 달리는 말처럼 자기 앞에 주어진 길에 순응하며 단순한 낙관과 희망으로 자신을 달래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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