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ne Francois-Ghislain Magritte
(1898.11.21~1967.8.15)
"내 그림은 아무런 의미도 감추고 있지 않은 가시적인 이미지이다. 그것은 신비를 불러일으킨다. 내 그림을 본 사람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지?'라며 간단한 자문을 한다. 신비라는 것이 아무런 숨겨진 의미 없이 단지 불가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작품 또한 의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즉흥적인 대답 (1933)
이 그림은 아파트 실내의 닫혀진 문 위에 뚫려 있는 모양이 갖추어지지 않은
구멍을 통하여 저녁을 나타낸다. 라고 작가 자신이 말하고 있다
마그리트는 벨기에의 레시느에서 태어났다.
1912년 샤틀레의 상브르에서 어머니는 투신 자살하였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영향은 20년대 후반 그림에서 나타난다.
어린 시절 마그리트는 납골당을 자주 갔는데 납골당 포플러 나무에 투영된 화가의 이미지는 막연하게나마 회화를 계시적인 힘을 가진 마술적 요소와 같다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했다.
마그리트는 1916년부터 브뤼셀의 왕립 미술학교에 다녔다. 졸업 후 벽지 공장의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광고를 위한 스케치를 그리게 되었고 1926년 브뤼셀의 한 화랑의 지원을 얻어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초현실주의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얼마 동안 큐비즘(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다음, 26년부터 30년까지 파리에 체류하여, 시인 P.엘뤼아르 등과 친교를 맺고, 쉬르리얼리즘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A.브르통 등이 제창하는 오토마티슴이나 편집광적인 꿈의 세계 탐구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며, G.키리코 등의 형이상회화파와 일맥상통하는, 신변 물체의 결합과 병치(竝置), 변모 등으로 신선하고 시적(詩的)인 이미지를 창조하는 쪽을 좋아했다.
마그리트는 대상의 외향을 아무 꾸밈없이 차갑게 재현하기 위해서 전통 회화기법과 색상의 대비를 미련없이 포기하였다.
원천적인 시적 효과로서 대상들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는 앞으로 제작될 그의 작품에서 기본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27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의 비평가들에게는 그의 작품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그는 아내와 함께 파리 근교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그는 시인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를 포함한 초현실주의자들과 알게 되어 가까이 지냈으며 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도 접하게 되었다. 1930년 브뤼셀로 돌아온 후에는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1940년대에 인상주의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양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다지 만족하지 못했고 그는 차츰 이러한 실험을 그만두었다. 그 후로는 그만의 고유한 양식으로 비논리적이며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출처 :http://namgane.cafe24.com
http://myhome.shinbiro.com/~jmjh/art-data-magritt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