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老의사의 조각난 거울
                 
정 재 학


우연히 나를 보는 것은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상하고 무서운 일이다
어쩌면 난 직업을 잘못 택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회의를 느낄 나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나에게는 50대 중반이 가장 힘든 시기였는데 나 자신과 화해하기에는 너무 늦어 있었다 젊었을 때는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중년이 자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붕괴는 한 순간이다 
 

의사였던 부친의 뜻대로 의대에 갔지만 정신과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생활의 전부 혹은 일부를 병원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얘기를 들어주다가 몇 개의 알약을 주고 잊으라고 당부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경험에서 오는 확률 통계적인 기술이 있다 
 

환자의 이름을 곧 잊을 만큼 난 늙어 버렸다 처음 개업했을 때보다는 환자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예전보다 아는 게 없다 처방은 확신을 주어야 한다
아니, 확신이 있는 척 해야 한다 
                                

남의 고통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말 더듬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다 지금까지 8명의 환자가 자살을 했다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내 무능력이었다 그 중 한 명은 내 아들이었다                                       

언젠가는 이 거울이 깨질 것만 같았다 이상한 불안증세였다 다행히 37년 동안 잘 버텨 주었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정신과 의사이면서도 강박증과 몇 가지 신경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다행히 직업적으로 훈련된 완벽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내 얼굴에 박힌 돌들을 언제 다 빼낼 수 있을까  
          

난 학계에서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이 나이가 되니 많이 외롭다 학계에 친구가 많은 사람은 좋은 학자가 되기 어렵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가장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나에게 옛친구들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정물화처럼 앉아 있는 환자들, 그 평온 속의 격렬함에 늘 준비를 해야 한다 이상한 일이지만 내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일은 거의 없다 회색처럼 권태롭지만 그들이 싫지 않았다 사람들이 최후의 경계선을 보이는 일은 무척 드물다 내 촉수의 한계는 명확하다 보이는 것은 일부일 뿐이다 완전함을 위해서는 아니, 완전함으로 가기 위해서는 상상에 의존해야 한다
내 귀는 언제나 임신중이다 
                                   

환자와의 약속시간이 다 되었다 깨진 유리들, 날카롭게 반짝이고 있다
이 조각들을 녹여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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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요새는 이야기가 있는 시, 한 편의 소설 같은 시, 그 서사가 영상으로 떠오르는 시가  잘 읽힌다.

어쩌면 이런 시들은 시의 본디 정신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시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수첩에 메모한 적이 있다. 다 늙어서 자살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이 시에서 그런 그림 한 조각을 마주치고는 기묘한 느낌에 잠시 잠긴다.

 

 


 

 

 

 

 

 

 

 

 

 

 

 

 

 

 

 

 

 

Epitaph - King Cri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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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10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쓸쓸합니다.

로드무비 2004-10-10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과 그림과 음악의 완벽한 조화......

에레혼 2004-10-1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님, 이 방에 자주 들락거리시는 걸 보니... 쓸쓸하시군요... 쓸쓸합니다.

로드무비님, 그 조화로움 안에 내가 없어요, 아니면 내 안에 그들이 없든지......

새벽별님, 무디어진 칼을 좀 갈아야겠는데, 칼갈이를 잃어버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