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숙 <Grace & Gravity Ⅲ> 박영택 저 <예술가로 산다는 것> 표지 일부 스캔 (김홍희 사진)

 

 

영혼과 육체를 저당잡힌 '단식광대'

 

 - 김명숙, 청주 작업실에서 

 

 

 ※ 이 글의 원문은 큐레이터이자 미술평론가, 경기대학교 교수인 박영택의 저서 <예술가로 산다는 것>(마음산책)에서 김명숙에 관한 부분만 전체 발췌한 것입니다. 본문의 강조 또는 별색의 괄호 안의 문장은 본 블로거가 임의로 편집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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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는 커다란 얼굴이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 한 점을 보았다. 내 앞으로 보내지는 그 많은 도록들 사이에서 그 그림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들 사이에서 어둡고 습하고 너무도 비장해보이는 그림 하나가 시선에 말려든 것이다. 내 충혈된 눈동자는 잠시 반짝이며 그 그림을 꼼꼼히 살펴나갔다.


 

작가 사진이나 연락처도 없고 어떠한 그룹전이나 단체전에도 참여한 기록이 없는 작가, 오로지 한 번의 개인전이 전부인 이 작가의 프로필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단지 그림만이 이 작가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후 작가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그 그림은 내게 지울 수 없는 잔상으로 기억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기회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매우 추웠던 1994년 1월의 어느 날 나는 그 작가를 만나러 청주 근교에 있는 한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청주 시내에 살던 그녀가 마련한 이 작업실은 시골에 위치한 조그마한 초등학교의 빈 교실이었다. 규칙적인 출퇴근 속에 꼬박 그림만을 그리며 살고 있는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조차 심하게 부끄러워했다. 그림 그리며 산다는 것의 사치와 허영을 극구 경계하면서도 아무런 벌이도 되지 못하고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는 자괴감과 두려움이 혼재된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는 세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폐와 진지함 속에 똬리를 튼, 기묘한 심리의 세계를 지닌 작가를 만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절망과 불안, 상심과 불행 속에서 그녀는 그림만을 구원으로 삼고 진력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자각 속에 수시로 빠져든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런 그림조차 없다면 더 이상 생을 지탱시킬 하등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그런 복잡한 심정의 일단을 언뜻언뜻 내비쳤다.


 

매서운 바람과 한기가 온 몸을 엄습해오던 그 날, 긴 머리에 떨리는 육성을 지닌 그녀는 그 추운 교실에서 난방기구도 없이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추위와 싸우며 그녀가 온몸으로 그려놓은 저 너덜거리고 해진 종이의 참혹함을 대면해야 했다. 그곳에서 이 작가의 삶과 그림에 대한 욕망,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가학적인 몰입을 보았던 것이다.

 

 

 

 

 

 

 

 

 

 

 

 

 

 

 

 

 

 

 

 

 

@ 김명숙 <The portrait of my hero Ⅲ>  

 

김명숙의 그림은 그녀의 몸동작을 닮았다. 또한 그녀의 짧게 끊어지고 떨림과 울림을 동반하면서 어렵게 인후를 비집고 나오는 저음의 파열적인 음성과도 겹쳐 있었다. 수없이 중첩되는 선의 떨림과 겹침, 지나칠 정도로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 그리고 경건하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진지한 정신의 힘, 이 모든 요소들이 섬세하게 진동하고 있는 그림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지고한 정신과 순수한 영혼의 상태를 갈망하는 섬유질의 육체, 예민하고 민감한 감수성으로 충만한 정신, 세상 밖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벌려져 있는 신경다발을 화폭 안에 비벼대면서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몰입하거나 종이를 뚫고 들어가 세상 밖과 맞닿으려는 것만 같았다. 커다란 종이들은 너덜거리고 찢겨나가면서 그녀가 그어대는 선들을 안타깝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나무, 숲 그리고 커다란 두상들은 어둠 속에서 신비스럽게 번져나오고 있는 듯했다.


나로서는 이토록 무섭게 그림 그리는 행위에 전념하고 있는 작가의 강박이 다소 의아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그림만이 그녀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황지우의 시가 떠올랐다.


  “그 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연안으로 가고 있다”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그래서일까, 김명숙의 그림 또한 저 시의 숨표 마냥 끊어질 듯 이어지며 모호한 확신 속에서 어떤 지점을 향해 미친 듯이 몰두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터치와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 몸으로 온 영혼으로 그려진 듯한 그림, 두려움에 시달리며 제 몸과 정신을 갉아대며 그린 그런 그림이라 그 정신과 노동과 결사적인 몸부림을 받아내야만 하는 종이는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 보이며 작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얇은 단면의 종이는 그러나 정신이나 영혼을 풍성하게, 실감나게 육체화시키지 못한다. 단면의 피부 위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모든 그림이 안고 있는 숙명적 한계이다. 사실 종이의 표면 위에 세계를 올려놓는다는 것, 그리하여 내면세계나 정신을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도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이미지의 역사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시간의 지배를 극복해보려는 매우 불온한 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림은 과연 무엇을 그릴 수 있고, 그림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런 질문을 작업의 척추로 삼고 있는 이가 바로 김명숙이다. 그의 그림은 매번 이러한 그림의 본원적 속성과 그 절망감 속에서 홀연히 등장한다. 바로 이 지점이 그녀의 그림이 여타의 상투적인 ‘그림 같은’ 그림들과 선명하게 갈라서는 지점이다.


나는 그곳에서 작가의 그간의 그림들을 마음껏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카프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단식광대>에 관하여. 나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그녀의 동기들을 떠올리며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 자리한 사람들은 없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는 오로지 작업실에 칩거해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이 시간과 공간이 이 세계의 끝이다. 한데 그림은 과연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가혹하게 자신의 혼과 육체를 저당잡혀가면서까지 몰입할까? 마치 ‘단식광대’처럼.


그녀가 그리는 것은 한결같이 나무가 있는 숲과 커다란 얼굴들이다. 생명 있는 것들, 혼을 지니고 있는 것들의 신비스러운 표정을 담아내려는 것이다. 경질의 재료들인 파스텔, 크레파스, 목탄과 같은 재료들을 종이 위에 긋고 칠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그녀는 재료에 자신을 하나로 일치시켜가면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의 세계로 온 몸을 들이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림을 받아주는 종이 한 장의 두께는 턱없이 얇다. 그래서 다만 그 피부, 그 표면에 들러붙어 절망하듯 부딪친다.


그녀의 화면은 세계 혹은 운명과 독대하고 있는 단독자의 내면공간이고, 그녀가 그리고 있는 인간과 숲은 존재 고유의 힘을 환기시켜주면서 정신과 영혼의 지고한 상태를 꿈꾸는 존재이자 떠도는 영적인 힘을 잡아내고 그것과 호흡하려는 순간의 표정이다.


화면은 수사와 장식을 피하고 모노톤에 가깝게 색채가 제한되어 있다. 화면에 무게를 주며 단정하고도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 효과는 특히 화면의 일부분에 집중광선을 사용하는 데서 고조된다. 화면 전체를 통제하기도 하고 낱낱의 작은 것들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화면은 긴장감과 신비함을 동시에 획득하게 된다. 늘상 어둡고 습하며 깊고 모호해보이는 화면은 멀어져간 것들에 대한 추억을 간직하면서 운명의 비극적인 빛깔과 눅눅한 냄새를 가득 풍긴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스님, 시벨리우스 등은 한결같이 ‘세계를 호흡하는 사람들’이며 떠도는 영적인 힘과 정신을 부단히 잡아채려는 사람들이란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무엇을 그리고자 했는지 알 듯도 하다. 저 서늘한 새벽 숲 그림 역시 자연의 모든 것들이 우주와 함께 호흡하면서 비밀스럽게 제 몸을 여는 신비스러운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그녀는 그렇게 오랜 시간 어스름한 새벽 숲에 앉아서 나무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네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 어둑한 새벽, 오래도록 숲에 앉아 동틀 무렵 햇살들에 의해 비로소 몸을 드러내는 숲을 목도한 체험은 그녀에게 그 무엇에 견줄 수 없는 경이로움과 충격이었던 것이다.

 

 

 

 

 

 

 

 

 

 

 

 

 

 

 

 

 

 

 

 

 

 

 

 

 

 

 

 

 

 

 

ⓒ 김명숙 <무제> (1991, 종이. 목탄. 분필. 아크릴, 198 × 176)

 

숲은 어떤 미지의 세계이자 영적인 세계의 원형이며 아울러 모든 생명의 근원, 거대한 자궁이자 도저히 가늠하고 측량할 길 없는 숭고함과 두려움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는 작가의 인식이 이 같은 숲을 그리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단순히 숲을 재현하거나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껴나 있다. 오히려 작가는 숲을 매개로 해서 숲에 대한 정신적 체험, 영적인 느낌과 수많은 단상들을 온전하게 일치시키고 싶어 한다.

 


 

작업실을 다녀온 이후 다시 만난 그녀의 그림은 여전히 어둡고 눅눅하고 침침한 숲그림이었다. 그 숲은 나무의 정령들이 살아 호흡하고 있으며 서로 교감하는 일종의 신성림이다. 이 숲 안에서는 소리와 색들과 냄새들이 끊임없이 서로 상응하고 있다. 나무들은 이 신성한 숲을 받치는 신전의 기둥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을 넘어서서 초자연을 지향하고 있다.

 

 

그 숲은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숲이지만 자잘한 선들의 집적과 어둠과 빛으로 인해 나누어진, 깊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비현실의 숲이기도 하고 작가만의 상상의 세계이기도 하다. 사람의 흔적이 배제되고 오로지 울창한 수목과 숲을 둘러싼 기묘한 기운과 비릿한 내음만이 자리한 그런 풍경이다. 두려움과 숭고함을 은연중 부추겨주는 숲의 육체는 타자의 몸이다. 우리들의 육체(특히 남자의 육체)와 너무 먼 그 숲은 경이롭고 모호한, 측정하기 어려운, 판독 불가능한, 난해한 선들로 빼곡히 울울하다. 그래서 그 숲은 거대한 생태계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생태계는 모든 종류의 생명을 포용하고 이를 품고 길러내며 차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풍경은 자연주의적인 그림이나 사실주의에 가 닿지 않고 미끄러지면서 일종의 생태적 세계관을, 여성만의 육체적 감각과 시선으로 잉태된 자연을 가시화한다. 나는 문득 그녀의 그림이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적인 시선을 배제시키고 신이 지배하는 목적론적 시간의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체를 더듬어가면서 그 숲 자체가 되는 그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육체가 실은 그 같은 숲이 아니겠는가, 라는 인식이 그림의 표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숲은 결국 숲의 재현이 아니다. 여성의 육체와 자연(숲)을 일치시키려는 부단한 시도는 아마도 현실과 만나고 세계를 재현하는 그녀만의 방식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화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다. 얇디얇은 종이의 표면, 거죽은 어둠과 빛으로 둘러쳐진 세상의 끝처럼 깊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세상의 자궁 같은 눅눅하고 무한한 그곳으로 우리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력은 충격처럼 혹은 전율처럼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그것은 여성의 몸과도 같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음이고 어둠과 신비를 간직한 생명의 산실이기도 하다. 파열음으로 갈라지고 쪼개지며 날카롭게 부서지는 저 빛, 선들은 그 어둠과 심연에 구멍을 내준다. 보는 이들은 그 빛에 의해 의식 저편으로 나간다.


 

모든 그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식 너머의 것을 물질화해서 보여줘야 한다는 아이러니와 딜레마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김명숙은 그 그림을 매개로 해서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의식 너머의 세계로 이끈다. 그녀의 그림은 그렇게 어디론가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보는 이들을 침잠시킨다. 스스로를 매질하며 먼 대양을 건너는 물새들의 자학적인 몸부림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태도는 육체적인 혹사와 그 혹사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화면을 통해 처절한 상처로 드러난다.


그녀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결코 다 닿을 수 없는 곳이다. 그녀는 어떤 깊음을 갈망한다. 미친 듯이 몸부림쳐보지만 인간의 육체로는 바닥에 닿지 못하고 가늠할 수도 없는 깊은 세계 말이다.


 

그녀의 그림은 그림으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깊음의 세계’를 얇은 종이의 표면에 새긴다.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이다. 그러나 작가는 온 힘을 다해 화면에 부딪쳐본다. 육체와 감각으로 문질러진 화면을 피와 상처, 고독, 절망, 날선 신경들로 참담하다. 그리고 장엄한 절망을 보여준다. 한 가닥 선은 그대로 자신의 육체와 감성의 혈관들이 되어 얹혀 있다. 이 촉각적인 선들, 선들의 촉각화는 여성만의 감각이다. 여성들은 대개 시각보다는 촉각을 통해 세계를 만나고 느끼고 인식한다. 그것은 눈에 의존하는 남성의 망막 중심주의로는 근접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여성만의 감각이다.


 

촉각적인 선, 육체화된 수많은 선들은 도저히 재현해낼 수 없는, 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세계와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 오로지 그어질 뿐이다. 대상의 재현이나 외형의 윤곽을 가까스로 연상시키는 지점에서 멈춰선 선들은 화면 전체를 빼곡히 덮치면서 그 모든 선 하나 하나를 되살린다. 이 비현실적인 선들에 의해 우리들은 작가의 정신을 날것으로 만난다. 그리고 존재의 고유한 힘들을 만난다.

 

 

 

 

 

    

 

 

 

 

 

 

 

 


 

 

 

 

 

 

2003년 9월 사바나 미술관 개인전에서 작품과 작가 김명숙 (출처는 조선일보 이미지 검색 : 조선일보 로고가 새겨진 화면 중앙의 모자이크를 본 블로거가 임의로 수정하였음)

 

그녀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비껴남으로써 어떤 범주에도 안주하지 않고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를 획득한다. 온 몸의 진액을 쏟아부어 만든 이 깊고 어둑하고 음습한 그림 속의 한 줄기 빛, 부서지며 산란하는 햇살, 물살 위에 어른거리는 빛들은 세상을 뚫고 어디론가 나간다. 그림 안에 없는 세계, 그림 밖의 세계를 김명숙은 빛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것은 여성만의 육체와 촉각으로 빚어낸 생태계이자 자연과 세계의 초상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숲을 바라보거나 물을 볼 때면 김명숙의 그림을 떠올린다. 그 순간 내 앞의 풍경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좋은 그림은 이렇게 현실을 비현실과 만나게 해주는 동시에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시선과 감각을 예리하게 비틀어준다. 그리고 나를 성숙시킨다.


 

피륙을 짜듯이 촘촘히 그림을 그려나가는 그녀의 태도와 삶은 이 부박하고 가벼운 세속과 시늉뿐인 껍데기 그림, 그리고 몰염치, 자기현시와 세속적 욕망으로 썩어가고 있는 오늘 우리 화단에 비추어 봤을 때, 소중한 성과이자 성찰과 반성의 거울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또한 두렵다. 거짓 세상에 맞서 화폭 안에다 자신의 삶의 진액을 쏟아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친친 동여매는 이 자기치유적, 자폐적 그림 그리기란 또 얼마나 허망하고 상처받기 쉬운가. 민감한 감수성과 집중력으로 자기자신을 소멸시켜가면서 회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와 존재의 의미, 정신의 정점에 육박하고자 하는 이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고립무원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 다른 무엇에 의해 충만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의하여 충만될 수밖에 없다면, 제몸을 매질하여 또 다른 연안을 꿈꾸는, 다소 무모해보이는 이 행위 또한 그녀에게는 운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림 속으로 더욱 깊이 밀어넣으면 넣을수록 분명 두려움 또한 깊어지겠지만,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그녀의 운명인 것을.

 

 
 
 
 
 
 
 
 
 
 
 
 
 
 
 
 
 
 
 
 
 
 
 
 
 
 
 
 
 
 
 
 
 
 
 
 
 
 
2003년 9월 사바나 미술관 개인전에서 작품과 작가 김명숙 (출처는 조선일보 이미지 검색 : 조선일보 로고가 새겨진 화면 중앙의 모자이크를 본 블로거가 임의로 수정하였음) 


http://blog.naver.com/gohhhim.do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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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09-16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림이 안 보이네요..

로드무비 2004-09-1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고 싶었던 책인데... 그림 보이게 해주세요.^^

에레혼 2004-09-16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지금 수정할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로드무비 2004-09-16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의 그림 두 개는 역시 안 나오네요.
그림이 참 좋네요.^^

에레혼 2004-09-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컴에서는 그림이 다 떠서..... 수정한다고 했는데 ...... 지금 다시 또 손봤습니다
이제 다 보이시나요?

urblue 2004-09-16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에 두 개 안 보여요.

로드무비 2004-09-1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입니다.^^

에레혼 2004-09-17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드디어, 마침내 보이는군요
무려 예닐 곱 번을 수정했답니다, 사진 용량이 커서 그런지 자꾸 에러가 나더라구요

김명숙의 그림 참 좋지요? 마음의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