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내가 되고 싶었던 건 투명인간이었다. 선일여자고등학교 복도에서 뿌연 운동장을 내다보면서 이런 공상으로 뭔가를 견디곤 했다. 만약 내가 단 하루만이라도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무조건 달리고 또 달릴 거야. 다만 멀어지기 위해. 내가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더 멀리에서 나타나고 싶었다.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2003년,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위기'니 '죽음'이란 말은 '이동'과 '탄생'을 우울하고 과격하게 예언한다. 문학이 사라지는 곳에서, 문학은 새로운 육체로 또 다른 생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육체의 운명과 더불어 나의 생을 실천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흔들리는 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위기'와 '죽음'의 징후만을 드러내는 데서 끝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죽음' 쪽으로 나는 달려 나갈 수밖에 없다. 내가 사라지는 곳으로부터 나는 더 멀리에서 나타나고 싶다. '주어지지 않은 역사'이므로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내가 알았던 것에 기댈 수밖에 없을 뿐이다. 그리고 다만, 나의 무지의 힘으로 으으으 달릴 뿐이다.
--- 김행숙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 시인선) 뒷표지의 말
사소한 기록
김 행 숙
발이 푹, 하고 빠지는 것이었다. 이건 실수라고 할 수도 없어. 나는 보이는 것만 믿으려고 애쓰는 사람인데, 이를테면 사거리라고 불리는 오거리. 실금같이 깨진 샛길에 대해서 세심했을 뿐.
나는 거리를 멋대로 산책했지만 함부로 기억하지 않는다. 단지 몇 사람의 안면만을 익혔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죽은 생선의 푸른 등을 내리치는 칼 든 사내와 사내의 냄새......
생선은 목을 치지 않고 토막을 친다고 사내가 낮게 우물거렸다. 생선은 참, 목이 없군요,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생선은 개보다는 장작에 가깝죠, 사내가 약간 우쭐거렸을 것이다. 그때 어쩌면 리얼리즘과 그로테스크의 관계를 생각하고 진화론과 목의 관계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기억하는 힘을 줄이기 위한 나의 노력은 미덕에 속한다. 나 역시 먹구름같이 모였다가 파래지거나 노래진다고 할 수도 있다, 있다니! 나는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믿음을 보이는 사람인데, 나는 여기 서늘해지는 목덜미.
많은 전선이 지하에 매설되거나 형태를 빌리지 않는 형태로 대치되었다. 발이 푹, 하고 꺼진 이후에 나를 총총히 관통해 사람들이 지하로 흘러갔다. 우리는 아무도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분명히 장애물이 아니다.
-------------------
오늘 오후 문득, "크시코스의 우편마차'라는 노래 제목이 떠올랐다. 그건 중학교 1학년 때 전교 합창대회에서 우리 반이 불렀던 합창곡의 제목이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크시코스'가 어느 곳의 지명인지, 아니면 어떤 이의 이름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노래를 시작할 때의 전주, 마치 우편마차가 달려올 때의 바퀴소리처럼 돌돌거리는 그 멜로디를 지금도 선명하게, 이상할 만큼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왜 한번도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크시코스'가 무엇을 뜻하는 이름인지에 대해.
시인은 한때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이 되고 싶다!"고 외치던 '벤, 베라, 베로'를 잊을 수 없었다.
그 '요괴인간'들을......
왜 그들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