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 최승자, '악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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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너 요즘 암만해도 자폐증인 것 같다"는 친구의 염려 덕분에(?) 오랜만에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별반 재밌는 일도 없는데 새로운 술집이나 개발하자는 치기 만만한 제안으로, 한 라인에 나래비로 늘어서 있는 술집을, 문 열고 나와 바로 옆집으로, 또 바로 그 옆집으로, 하는 식으로 옮겨다니며....... 그 중에 한 주점 이름은 '바우와 마카오'였다. 사장이 '김바우' 이고, 주방장이 '마카오'란 이름을 갖고 있단다. 돌아와서 나는 수첩에 그 이름을 써놓았다. 어쩔 작정인지는 모르겠다.
그날 술자리에서 한 동행이 요즘 봄햇살을 보면 그저 한숨이 나온다고 했다. "햇살이 너무 좋잖아요......" 그리고는 끝이다. 하기는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햇살이 너무 좋은 것이다!
일요일 저녁, 너무 좋은 햇살 아래 나서는 건 가슴이 무너질 듯싶어서, 해질 무렵이 돼서야 간신히 집밖으로 나갔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기웃거리거나 자연스레 마주치는 세상의 풍경..... 그 정도의 거리, 그 정도의 속도감에서 '보는 풍경'들이 적당하다. 감당할 만큼 아름답고 무심하다.
밤에 책장에서 묵은 시 잡지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현대시세계> 1991년 봄호. 이렇게 오래된 잡지를 버리지 않고 놔둔 까닭은 무얼까. 그 낡은 잡지를, 이 밤, 우연히 뽑아들게 한 알 수 없는 引力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쨌든 그 속에서 시 한 편을 만났다. 최승자의 '악순환'.
눈이 번쩍 뜨인다.
그래, 그런 거였다.
내가 술을 마시면서도, 취기에 조금씩 흐트러지면서도,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여 놓으면서도, 봄 햇살이 너무 좋아서 가슴이 미어지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심지어 잠속으로 빠져 들어가면서도 끊임없이 놓지 않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앙앙댐'과 '외침'이었던 것이다!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가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것과 같은......
문득 삶이 끝날 때까지, 어쨌든 그 삶을 견뎌야 하는 '독 안에 든 쥐'가 두려움과 공허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