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상: 그 장소, 그 사람들> 중에서


비, 내리 엿새 동안의 비 그리고 안개.
나는 런던의 한 선술집에서 서머셋 몸과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나의 처녀작 소설 <자랑스러운 구토제>가 평론가들로부터 냉대를 받아 무척 풀이 죽어 있었다. 유일하게 호의를 보인 것은 <타임>이었는데, 그나마 마지막 문장 때문에 잡치고 말았다. 그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내 책에 대해, "서구 문학에서 이만큼 고집스럽고 진부한 표현으로 독기를 뿜어낸 책은 없었다"라고 평하고 있었다.
서머셋 몸은 그 구절이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날 위로하였다. 하지만 자필 증정본에는 그 내용을 써먹지 않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올드 브림톤 길을 걷고 있을 때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내 우산을 건네자 그는 자신의 우산이 있는데도 얼른 받아들였다. 서머셋 몸이 두 개의 우산을 받고 가는 동안 나는 그 옆에서 계속 뛰어야만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평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되네. 내 첫번째 단편 소설도 어떤 비평가한테 극도로 비난을 받았지. 나는 끙끙 앓던 끝에 그에게 있는 말 없는 말을 다 퍼부어댔어. 그러던 어느 날 내 소설을 다시 읽어 보고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지. 그 소설은 사실 천박하고 구성도 형편없었어. 어쨌거나 나는 그 평론가의 혹평을 잊지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몇 년 후 독일 공군이 런던을 야간 폭격할 때, 그 비평가의 집에 조명을 비춰 줬지."
걸어가던 서머셋 몸은 세번째 우산을 사기 위해 잠시 멈춰 섰다. 그는 세번째 우산을 펼치고는 말을 이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선 말이야, 기회를 잡아야 하네. 그리고 바보스럽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 나는 <면도날>을 썼을 당시 종이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네. <비Rain>의 초고에서는 사디 톰슨이 원래 앵무새였지. 우린 찾아야 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해야지. <인간의 굴레>를 처음 쓰려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 들어 있던 것은 오로지 접속사 '그리고'뿐이었지. 나는 '그리고'가 들어가 있는 소설은 재밌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나머지 내용이야 저절로 구체화되기 마련이지."
그때 강풍이 불더니 그를 들어서 빌딩에 쿵 처박았다. 그는 낄낄 웃었다. 그때 서머셋 몸은 풋내기 작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조언을 한마디 했다.
"의문문의 끝에는 물음표를 붙이게.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면 아마 놀라 자빠질걸!"

-- 우디 앨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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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문득 손길이 가서 펼쳐든 우디 알렌 소설집(아니, 지금 다시 책 표지를 보니 '창작 산문집'이라고 되어 있다)을 읽다가, 나도 이 글 속의 서머셋 몸처럼 혼자 낄낄 웃었다.
아, 영락없는 우디 알렌 표 작품!
까만 뿔테 안경을 쓴 키 작은 유태인 사내가 빠른 말투로 속사포처럼 얘기를 풀어내는 모습이 바로 눈앞에 그려지지 않는가.
건축가들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의 어딘가에 은밀히 자신만의 표식을 남긴다고 한다. 마치 화가들이 그림을 완성한 뒤 한 귀퉁이에 서명을 하거나 낙관을 찍듯이.
어느 장르이든 자기 작품에 자신만의 표식을 남기는 것, 누가 봐도 한눈에 그의 작품인지 알아볼 수 있게 '도장'을 찍는 것, 멋진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우디 알렌은 언제나 우디 알렌 식의 어법과 재치와 냉소와 웃음 섞인 페이소스로 가득찬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인생은 두 가지 범주로 나뉘어 있다. 끔찍한 삶과 비참한 삶. 끔찍한 삶이란, 말하자면 장님이거나 불구이거나.....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비참한 삶에 속한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당신이 비참한 쪽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하던 <애니 홀>의 앨비는 바로 우디 알렌의 자화상이다.

한때 내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하는 동기를 불러일으켰던 건, 우스운 생각이었지만, 언젠가 우디 알렌과 만나서 직접 대화(?)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었다(상상이니까 제멋대로 날개를 펼칠 수 있는 법!)...... 뭐, '한때 법적인 딸이었던' 순이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 따위의 사적인 질문은 놔두고,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기막힌 생각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오는 건지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우디 알렌을 만나는 일은 요원한 채, 여전히 그의 영화를 보면서 혼자 낄낄거리곤 하는 요즘은 미셸 투르니에를 생각하면서, 하루에 한 단어씩 불어 공부를 한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프랑스말로 쓰여진 소설을 소리 내서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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