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브람스 : 피아노 협주곡 Op.15, Op.83, 7개의 판타지 Op. 116 [2CD] - DG Originals
브람스 (Johannes Brahms) 작곡, 유진 요훔 (Eugen Jochum) 지휘, / DG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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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난 포노그래프 고객이었다. 포노가 해피몰닷컴으로 넘어갔을 때 회사는 이벤트를 했다. 리뷰를 작성하면 리뷰 당 100원의 적립금을 준다는 거였다. 당시 복학을 기다리던 나는 시간이 많았다.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전부 음반 리뷰였다. 음악은 잘 듣지 않은 채 표피적 이미지만 가지고 리뷰를 썼다. 그러다보니 양은 많지만 내용은 조악했다.

브람스 피협 음반 리뷰도 그 때 썼다. 강철 타건의 에밀 길레스니 연주도 그러할 거라 보았다. 연주를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레토릭의 향연이었다. 헌데 몇 달이 지나 내 리뷰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 나타났다. 길레스는 서정적이게 연주했으며 리뷰가 피상적이라며 제대로 알고 쓰란 나무람이었다. 그 나무람은 리뷰라는 공개석상에서 이뤄졌고 나는 낯이 붉어졌다. 그래서 그 리뷰를 지웠다. 치졸한 비겁함이 부른 회피일수도 있으나 즉자적인 반응이었기에 자기반성의 틈도 없었다. 덕분에 길레스의 브람스 음반은 상처가 되었다.

엊그제 이 음반을 다시 들었다. 4년 전과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다르니 그때의 트라우마를 잊을 수 있단 자신감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오이겐 요훔의 반주는 묵직했다. 3분이 넘도록 피아노 독주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교향곡 같았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관현악은 부수적인 것이듯, 브람스의 피협 1번에서 피아노는 관현악을 위한 치장이었다.

원래 이 곡은 브람스가 21살 때 만든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작품이 마음에 안든 브람스는 이 곡의 1악장을 교향곡으로 쓰려 한다. 그러다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으로 쓰기로 한다. 클라라와 요아킴의 충고를 바탕으로 개작을 거듭하다 25살에 이 곡을 완성하게 된다. 교향곡으로 만들려던 애초의 계획 탓인지 이곡은 관현악이 중심이다. 당시에도 피아노가 있는 교향곡이라 불리었고 피아노 독주의 기교적 과시는 없지만 진득한 멋이 있다.

이런 탓인지 길레스의 타건은 그닥 빛나지 않는다. 다만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와는 결이 다른 묵직함으로 피아노를 누른다. 서정적이라기 보단 묵묵히 자기 할일을 하는 구도자와 같은 연주다. 황홀하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요훔의 묵직한 관현악이 더 깊게 울린다. 다만 피아노를 잡아먹을 듯한 오케스트라의 두터움에 대한 호불호는 듣는 이의 취향에 따라 갈리겠다.

세밑이라 술자리가 많다. 어제도 한껏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이 곡을 들었다. 익숙한 3악장이 나왔을 때 ‘브람스 음악도 가끔은 진취적이고 활달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다만 당분간 음악을 잘 못들을 듯하다. 제일 친한 친구가 미국에서 대학원 휴가에 맞춰 잠시 귀국을 하기 때문이다. 내 방에서 며칠을 머물 테다. 지음(知音)의 친구는 아니지만 가장 편하고 살가운 친구다. 브람스보다 더 따스한 며칠이 될 듯하다. 음악은 삶을 살찌우지만 친구만큼 좋지는 않다.

이제 브람스 피협 1번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치기어린 시절에 썼던 리뷰의 조약함도 이제 다 따스히 감쌀 수 있다. 다만 자기 과시적 욕망으로 타인의 불민함을 나무라며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은 삼갔으면 한다. 음악이 계층의 차이를 드러내는 ‘구별짓기’의 수단이 아닌 바에야 그런 공격성은 실로 무용하다. 오늘도 누군가와 올 한해를 돌이키며 따스한 술잔을 기울일 듯하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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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3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음반에 이런 사연이 얽혀 있군요^^

제겐 길렐스의 조심스러운 연주라는 생각이 드는 음반입니다. 요훔의 중후한 반주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지휘자와 연주자간의 합의에 의한 것일지도요. 함께 어쩌면 터치가 엷게 느껴지는 것은 녹음탓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대학 다닐때 3명이 사는 기숙사에 살았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좀 별나지만, 새벽에 시끄럽게 굴면 도서관에 가서 음반들으며 총보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은 관현악에 피아노 하나 살짝 덧붙인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지요? (2번은 더 그렇구요..)

총보를 보며 음악을 들을때면 오케스트라와 가장 맞추기 힘든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가 어느정도 수긍이 갑니다. 1번, 2번 오케스트라, 피아노 독주 모두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바다 한가운데에 내던져져 안정적으로 항해해야 하는 배와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점에 포인트를 잡을때 이 음반의 가치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꿈같은 2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구요. 끝으로 길렐스가 표현해내는 섬세함은 강한 힘(터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연말 잘 보내시고, 복 많이 받으시는 2010년 되세요. 바밤바님 :D

바밤바 2010-01-02 20:5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도 꾸준히 행복하세요.^^
겨울바람이 시린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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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차다. 싸락눈은 손끝마저 시리게 한다. 다들 연휴라 먼데로 갔나보다. 간만에 주위에 아무도 없다. 독서로 소일하는 일도 지겨워 쇼핑을 가려 했으나 눈이 길을 막는다. 뽀드득 소리가 싫지는 않으나 살에 부딪히는 새알 같은 눈은 옷을 여미게 한다. 남쪽에선 겨울이 싫지 않았다. 그리 춥지도 않고 집은 언제나 따뜻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겨울은 유달리 춥다. 방한이 잘 되지 않는 방에, 가끔 내리는 눈 때문일 테다.

 강신주 씨의 책을 읽었다. 제목은 연서(戀書)마냥 낯간지럽다. 다만 사랑이 아닌 자본에 상처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자본주의의 도저한 폭력을 직시하고 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 한다. 라캉의 말처럼 우리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에 불과한 것이니 중심을 찾으란 말이다. 많은 사회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시인이 나온다. 타자화된 욕망의 실체를 알기 위해선 이렇게 많은 담론이 필요하다.

 이상의 이야기로 글을 풀어낸다. 김연수는 ‘여행할 권리’와 ‘꾿빠이 이상’에서 김해경의 삶을 뒤쫓는다. 강신주의 글도 그와 비슷하다. 동경이란 제국의 수도 앞에서, 초라해지는 자신을 추스르는 이상의 모습이 나온다. 허장성세를 부리는 이상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열패감과 동경을 느끼긴 어렵지 않다. 나스메 소세키의 작품 ‘소시로’에서처럼 이상은 자본주의에서 초탈하려는 원심력과 자본주의의 추종자가 되려는 구심력 사이에서 자아를 잃어간다. 27세에 요절했던 이유엔 이러한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허약한 정신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강신주는 짐멜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계속 전개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한번쯤 고민을 해봤던 이라면 새로운 내용은 없다. 4악장으로 이뤄진 이 책의 서두는 매우 쉽다.

 2악장엔 보들레르와 벤야민이 나온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바탕으로 환락의 도시가 전해주는 자본의 폭력을 말한다. 이 폭력을 수용하는 이들이 워낙 자발적이라 속에만 멍을 들이지 외상을 입히진 않는다. 벤야민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혼란스럽다. 그래도 얼마 전 읽은 황석영의 ‘심청’이란 작품과 매춘의 메커니즘을 연계시켜 이해하였더니 그리 어렵진 않았다. 다만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는 고담준론(高談峻論)과 같은 허황됨이 느껴졌다. 자본주의와 20세기를 비판하는 날이 무뎌서가 아니라 칼질이 너무 빈번하고 명쾌하지 않아서일 테다.

 3악장은 투르니에와 부르디외다. 3악장은 전체 악장 중 가장 통일성이 있으며 이야기도 단단하다. 투르니에는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이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방드리드, 태평양의 끝’이란 작품을 썼다. 그러면서 피에르 부르디외가 이야기한 ‘아비투스’에 대한 개념이 나온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본주의적이며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충실한 아비투스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무인도에서 만난 ‘방드리드(금요일)’에게 자신의 윤리를 강요한다. 허나 화재로 인해 ‘구별짓기’가 훼손당하고 로빈슨은 자신의 아비투스를 버리고 새로운 아비투스를 세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변용은 베르그송이 이야기한 ‘체험된 시간’의 개념을 차용하여 로빈슨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한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부수적 언급으로 ’구조화된 구조이면서 구조화하는 구조‘인 아비투스를 비판하고 존재의 심연에 다가서려 한다. 밀도 높은 이야기다 보니 정리가 명징치 못하다.

 종결악장은 유하와 보드리야르다. 영화 감독으로도 유명한 유하는 자신의 시를 통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욕망과 개인의 주체성 상실을 노래했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스승격인 바타유의 ‘과잉 에너지’개념을 도입하여 과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유하의 시가 부분적으로 등장하여 서울이란 공간과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 비판을 위해 니체의 영원회귀설도 나온다.

 이외에도 가라타니 고진과 좀바르트, 라파르그, 예링, 마사치, 사르트르, 리오타르의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책이 이야기하는 바가 단순하지만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다소 연성화된 사유도 보이지만 개인의 욕망을 찾아주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이런 지난한 과정 끝에 완성된다. 이야기는 3악장에서 정점을 이루며 뒤로 갈수록 다소 난해한 모습을 띈다. 하지만 평소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다. 주석 없이 언급되는 인물들에 대한 공부만 병행된다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책이다.

 글을 쓰는데도 손이 시리다. 난방이 잘되는 곳으로 이사하고 싶다. 겨울은 가난한 이에게 더 잔인한 듯하다. 밀실에 갇혀 있으려 해도 찬 공기는 몸의 표면적을 최대한 줄이라 강요한다. 세밑에 불어 닥친 한파 덕에 책은 많이 읽겠다. 나름 진지한 사유의 끝이 겨울바람 속에서도 따스한 봄노래를 가져다주길 바란다. 헌데 멘델스존의 ‘무언가’ 앨범은 없고 쇼팽의 에뛰드 앨범만 있으니 마음을 더 추슬러야겠다. 내일은 영하 10도란다. 낼부터 약속이 하나씩 줄을 잇는데 머플러를 둘러야겠다. 내게 머플러를 직접 짜준 그 아이도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으면 한다. 괜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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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2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미셀 투르니에..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이네요~ [예찬]은 마치 첫사랑마냥 꼭 품고 다니던 책인데 ^^ 함께 [방드르디...] 을 읽고는 그는 참 재밌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지요. 말씀하신 내용가운데 3악장 부분은 왠지 흥미롭군요!!

눈다운 눈이 온 저녁이네요. 내일은 포근하길 빕니다.

바밤바 2009-12-28 16:14   좋아요 0 | URL
오늘은 포근하네요^^ㅋ
바람결님 말엔 항상 따스함이 느껴지는 듯~ㅎ
 
심청, 연꽃의 길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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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은 ‘심청’을 주인공으로 한 동양의 오디세이를 구상했다. 그 오디세이는 매춘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몸을 사고파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행위가 지극히 자연스레 이뤄진다. 다만 청이의 자아가 성장하는 방식은 작가가 강제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녀는 처음엔 성공지상주의자로 보인다. 성의 매개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러다 제 정인과 행복을 꿈꾸는 로맨티스트로 바뀐다. 삶의 바닥에 부딪혔을 댄 다시금 성공지상주의자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박애주의자로 변모한다. 이런 ‘약한 고리’는 청이에게 공감하기 힘들게 한다. 청이에게 능동성을 부여하여 ‘여성 잔혹사’라는 비판을 튕겨내려 애쓴 흔적은 보이나 캐릭터와 공감이 되지 않기에 이야기는 겉돈다. 지극히 불행해 보이던 한 여인이 어느 순간 쉽게 사회적 지위를 쟁취하는 것 따위는 작가의 욕심이 지나쳤다고 말해준다.

또 청이가 새로 정착할 때마다 세밀히 묘사되는 사창가의 모습은 가독력을 떨어뜨린다. 무언가 곁가지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았던 ‘태평천국운동’에 관한 부분은 후에 한마디로 마무리된다. 작가가 이야기를 추스르는게 버거웠다는 방증이다 한중일, 괌을 아우르고 제국주의와 상업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녹여내기엔 ‘소설’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즉 진중권이 자주 말하는 ‘데우스엑스마키나’가 자주 사용된다. 무엇보다 황석영은 여성의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루키 소설이 보여주는 예의 ‘여성의 마음을 훔친 듯’한 어찌할 수 없는 공감을 느끼기 힘들다. 지나치게 보듬으려는 노작가의 욕심이 곳곳에 묻어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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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12-28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거 무척 재미있게 봤는데. ㅎㅎ 어쩜 여성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했는지 대단하다고 극찬을 했어요; 남자가 생각하는 여성의 심리가 대체 어떤건지 궁금해지네요.(하루키의 여성상은 너무 남성주의적 판타지라고 보거든요) 암튼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제가 볼 땐 황석영은 하루키에비할 작가는 아니라고 봅니다.

연휴 내내 책 많이 읽으셨네요. 전 부어라마셔라 하느라 아직도 헤롱헤롱 '-'

바밤바 2009-12-28 16:12   좋아요 0 | URL
이야~ 난 오늘부터 부어라 마셔라~ ㅋㅋ
뽀님 좋은 연휴~~ㅎ
 
객지 황석영 중단편전집 1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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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젊은 시절 단편 모음이다. 단편이기에 호흡은 짧고 재미난 시도도 많아 보인다. ‘아우를 위하여’에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았고 ‘입석 부근’에선 김훈의 느낌도 났다. 특히 소설이 묘사하는 60년대 풍경은 서사보다 더 진득한 울림을 줬다. ‘객지’에서 이야기한 당시 노동자의 삶은 투박한 묘사만으로도 절절했고 지금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에 앎의 기쁨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시 노동환경이나 임금구조 같은 것들. 무엇보다 ‘개밥바라기별’에 나온 ‘공사판 아저씨’가 잠시 언급되는 듯 하여 반가웠다.

그의 단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징하다. 김연수 식의 꼬임이나 김훈이 보인 문장에 대한 지나친 탐닉도 보이지 않는다. 글로 그의 소설을 다시 매듭짓는 건 덧없다 하겠다. 그래도 덕분에 황석영이 왜 이야기꾼인지 알게 되었다. 최근에 나온 소설들보다 좀 더 살냄새가 많이 난다. 지금의 다습고 관조적 시각도 나쁘진 않으나 이야기를 지나치게 벌려 놔 다소 헐거운 근작(近作)들 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엔 좀 더 땅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더랬다. ‘심청’이나 ‘바리데기’에서 바다를 아우른 그의 ‘구라’가 다소 미진한 느낌이 들어 사족(蛇足)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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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의 경제학 - 본능 속에 숨겨진 인간 행동과 경제학의 비밀
비키 쿤켈 지음, 박혜원 옮김 / 사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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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Instant Appeal 이다. 본능의 경제학이라 명명된 이유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익숙한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책은 재미있다. 사례도 풍부하다. 1982년 1월 13일 워싱턴 DC에서 일어나 에어플로리다 소속 보잉 737기의 사고는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의 잠언과도 궤를 같이 한다. 글래드웰은 한국의 수직적 문화가 완곡어법을 발달 시켰고 그게 괌에서 있었던 비행 사고의 원인이라 했다. 비키 쿤켈도 마찬가지로 위계 질서라는 ‘신성한 소’가 완곡어법을 낳았고 이게 82년 참사의 원인이라 한다. 원인과 결과가 비슷한 사건이지만 해석하는 방식의 다름이 재미를 준다.

‘후크 송’이 유행하는 이유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비틀즈는 ‘she loves you'라는 곡에서 'yeah'라는 단어를 29번 사용한다. 멜로디뿐만 아니라 단어도 묘하게 중독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단어 yeah 전후로 잠깐의 끊기를 시도한다. ’Can't buy me love'나 'I want to hold your hand', 'Please, please, me' 또한 중독성 단어를 노래 전체에 걸쳐 몇 차례 반복한다.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나 소녀시대의 ‘Gee'와 같은 경우도 같은 범주로 해석 가능하겠다. 후크 송은 인간의 생체 리듬과 잘 맞는 곡이기에 청중의 ’본능‘을 잘 이용한 사례라 하겠다.

다만 미국 정치인의 사례가 많아 쉽게 와 닿지 않는 점, 뒤로 갈수록 프레임에 맞춘 억지 해석이 늘어난 것은 흠이라 하겠다. 문화에 따라 각기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변수도 많이 일반화하가 어려운 예시도 많다. 무엇보다 사회 문화적 사안을 다루고 있기에 경제학에 국한시킨 책 제목도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이 책은 경제학 책이라기 보단 말콤 글래드웰 류의 사회학 서적에 가깝다. 재기 발랄하면서 연성화된 사회학 서적. 책은 쉬이 읽히고 시간도 얼마 들지 않으니 짬짬이 읽으면 되겠다. 다만 이 책은 1년 전에 외국에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1년이 지난 이번 달에나 나왔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렇게까지 화제가 된 책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중요 일간지에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소개했으며 간만에 그들과 나의 의견이 포개진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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