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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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치바나 다카시의 '교양', '교양인'론은 주목할 만하다.  

 

  교양인론에서 '높은 수준의 제너럴리스트'는 피터 드러커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  

 

  요구하는 게 많기에 그의 이야기에 끌린다.  

 

  높고, 넓고, 깊어야 한다.  

 

  그의 다차원적인 요구가 매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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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 죽다
정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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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최인석의 부족분을 정찬으로 메웠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봉준호의 영화보다 이창동의 영화를 더 좋아하는 이유와도 같을 것이다.  

 

  정찬은 인간의 영혼을 얘기한다.  

 

  정찬은 내게 또 다른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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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미래를 위하여
김인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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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비평관은 주목에 값한다.  

 

  서투른대로 권위 있는 문학 이론을 작품에 갖다 대는 것이 비평에 대한 예우인양 생각하지는 않았나? 

 

  귀중한 가르침이다.  

 

  때려 맞춰가다보면 전체를 보기란 참으로 힘들다.  

 

  부족하지만 전체를 보기 위한 문학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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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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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장함을 넘어 해학의 언저리까지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 위화만의 특색이리라.  

 

  이를 중국적 혹은 동아시아적이라 서양인들은 이해한다.  

 

  모옌, 가오싱젠과 대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넘어가는 사이에서 허무의 한숨소리를 듣는 것은 웬일인가? 

 

  사족 : 장이머우의 영화 이름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원제와도 <살아간다는 것>이란 제목은 꽤어울리는 데 말이다. <인생>이라 하니 밋밋한 것 같아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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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3
다야마 가타이 지음, 오경 옮김 / 소화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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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전을 많이 읽는 편이다. 진실의 영역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진실일까?’하는 의문을 늘 갖는다. 사건이 이루어진 시공간을 떠난 상태에서 인간은 과연 얼마나 진실할 수 있을까? 자신을 객관화했기에 진실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이 곳에 주관으로 똘똘 뭉친 내가 서 있는데 객관화가 쉬울 리 없다. 인간은 자기 이해와 자기 합리화에 능한 존재다. 어떤 불분명한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꽤 선명한 상태로 이해된다. 기억하기 싫은 일이라 하더라도 꽤 아름답게 치장되어 기억된다.

  난 이러한 생각을 사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적용하고자 한다. 사소설을 작가의 내밀한 진실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연구의 대종을 이룬다. 허나 몇 시간 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는 일기만 하더라도 여러 모양으로 미화해 써가기 마련이다. 사소설 역시 허구의 영역이 적지 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것이 ‘허구의 기록’이라는 소설의 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더욱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야마 가타이의<이불>(1907)은 애정 소설이다. 주요 인물들이 애정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주인공 다케나카 도키오(竹中時雄)는 여제자인 요코야마 요시코(橫山芳子)를 마음에 두고 있다. 허나 도키오는 아들을 둔 유부남이고, 요시코는 청년 다나카 히데오(田中秀夫)를 사랑한다.

  이 소설을 작가는 곧 주인공이라는 각도에서 이해하곤 한다. 주인공 도키오는 가타이이고, 요시코는 작가의 실제 제자였다는 오카다 미치요(岡田美知代)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제쳐두고 이 작품의 소설적 특성을 살펴보자. 우선 소설은 3인칭 시점을 택하고 있다. 서술자는 도키오를 비롯한 인물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다. 소설의 한 대목이다.


“도키오의 뒤에는 한 무리의 배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뒤, 기둥 옆에 언제

왔는지 낡은 중절모를 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요시코는 그를 알아보자 가슴이

뛰었다. 아버지는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공상에 잠겨 서 있던 도키오는, 뒤에

그 남자가 있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123면)


  사소설은 대개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택한다. 이것은 물론 후대의 흐름이다. <이불>이 3인칭 시점을 통해 객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에 의해 소설 속 인물들은 재설정되고 있다. 실제 인물로서 그들의 성격이 어땠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란 허구의 공간 속에 발을 딛게 되면 그들은 이미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무이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위 인용문은 이러한 상황들을 잘 말해준다. 우리가 작가라 생각하는 주인공이 모르는 사실도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불>을 사소설의 시작이라 말하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 난 반기를 들고 싶다. 우리가 현재 대하는 일본의 사소설과 <이불>은 꽤 다른 것이다. 이 작품이 사소설이 된 것은 전적으로 작가 때문이다. 다야마 가타이는 <동경 30년(東京の三十年)>(1917)이라는 글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이 소설이 실제 자신이 겪은 이야기라는 것,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주제의식을 살펴보고 싶은데, 난 작가가 조혼(早婚)에 관한 문제의식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사실 도키오의 불행은 결혼 생활 때문이다. 인격적인 교제를 통한 결혼이 아니었기에 부부는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도키오는 아내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무시하기 일쑤이다. 이런 남편에 대해 아내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마지못해 사는 듯한 모습이다. 한중일의 근대 지식인들에 있어 조혼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싸워야할 봉건의 잔재가 바로 자신의 집과 가족에, 무엇보다 자신에게 가장 뿌리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진건(玄鎭健)의 <빈처>(1921)와 <술 권하는 사회>(1921)가 좋은 예이다. 일본의 첫 근대 소설이라 불리는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의 <뜬 구름(浮雲)>(1889) 역시 조혼을 비롯한 봉건적 결혼관에 반대하는 주인공에 의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도키오가 괴로울 때면 이불에 파묻히듯이 소설의 결말 역시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흐지부지 끝을 맺는다. 도키오는 조혼 제도의 희생양이 될 뿐, 어떤 건설적 태도도 보여주지 못한다.   

 

       田山花袋(1872-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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