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의 소설들에는 우리네 삶의 조각들이 하나, 하나 떨어져 있다.
그 조각들은 거꾸로 처박힌 현실로 인해 몹시도 어그러뜨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이 '자성 소설'로 불리는 건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되비추기 때문이다.
황순원의 단편이 초기의 '빼빼 말라' 곧 부러질 것 같은 모습에서 서정의 물기가 흐르는 모습으로 변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모든 희망을 거두어버린 사회 속에서 남은 마지막 기댈 곳은 '인간'이라는 자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요즘의 작가들은 여러모로 힘들겠다.
시 쓰랴, 소설 쓰랴, 평론 쓰랴.
문학 이론에 관해 많이 아는 것이 과연 그들의 작품을 풍요롭고도 정확하게 할 것인가?
그럴까?
<그리움을 위하여>는 우선 코믹하다.
인간이란, 또 인간의 삶이란 이렇듯 헛웃음이 나오게 하는 것들일까?
헛웃음, 헛된 웃음.
그런데 헛되지 않았다.
이 웃음은.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중국과 중국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도 '中国'이란 글자를 유니폼의 앞부분에 새기는 나라.
동남아시아의 상권을 주름잡는 속물적인 나라.
현실과 이상이 교묘히 조합된 나라 중국.
이들을 이해하기란 그들의 머릿수만큼이나 지난할 것이다.
林語堂(1895-1976)